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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연 독식하는 천재 서생1화

기연 독식하는 천재 서생

기연 독식하는 천재 서생

1화: 서고의 책벌레

시놉시스

단전이 없어 검을 잡지 못한 백운휘는 백리세가 서고에서 버려진 글만 읽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폐기될 고서 한 권 속에서, 누구보다 먼저 천하의 기회를 읽어 낼 문을 발견한다.

목검이 마룻바닥을 세 번 내리쳤다.

"비켰다가 나와라."

백태진의 목소리는 수련장 끝까지 울렸다. 막 끝난 대련의 열기와 젖은 흙냄새가 아직 마루 위에 남아 있었다.

운휘는 문가에 세워 둔 장부를 품에 안고 한 걸음 물러났다.

태진은 운휘를 지나치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또래의 젊은이들이 땀에 젖은 도복을 입고 검을 휘두르는 동안 운휘는 먹물 묻은 손가락으로 공용 장부만 넘겼다.

"장부 정리는 끝났나?"

"오늘 들어온 약재까지 적었습니다."

"그럼 수련장도 정리해. 너는 칼보다 걸레가 익숙할 테니까."

주변에서 낮은 웃음이 터졌다.

운휘는 대꾸하지 않았다. 방계의 서생이 직계의 수련생에게 맞서 봐야 얻는 것은 새 업무와 새 비웃음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마룻바닥에 떨어진 피 묻은 천 조각을 주웠다. 손끝에 닿은 천에서는 쇠 냄새보다 쓴 약 냄새가 먼저 났다.

철근초를 달일 때 나는 냄새였다. 근육 통증을 눌러 주지만 대련 전 복용은 금지된 약재.

운휘는 태진의 오른손을 한 번 보았다. 막대하게 부은 엄지와 어색하게 굽은 검지. 사흘 전 그가 사범에게 호되게 혼난 이유도 같은 손가락이었다.

태진은 운휘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목검을 어깨에 걸쳤다.

"오늘 밤까지 끝내 놔. 서고 벌레가 할 일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운휘는 천 조각을 물통에 담갔다.

약재 장부에는 철근초가 다섯 첩 모자란다고 적혀 있었다. 그 사실 하나면 태진을 곤란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운휘는 장부를 덮었다.

태진을 무너뜨린다고 자신의 단전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며칠간의 통쾌함보다 지금은 서고의 열쇠와 조용한 밤이 더 값졌다.

검을 든 자들이 수련장을 빠져나간 뒤에야 운휘는 피와 흙을 닦았다. 창백한 손등 위로 찬물이 흘렀다.

그 손은 열여섯 해 동안 한 번도 내기를 품은 적이 없었다.

스승은 단전의 자리가 텅 비었다고 말했다. 의원은 억지로 기를 돌리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했다. 백리세가의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운휘에게 검 대신 책을 쥐여 주었다.

처음에는 원망했다.

그러나 서고에는 검법보다 오래 살아남은 것들이 있었다. 망한 문파의 문서, 끊긴 상단의 장부, 이름 없는 약초꾼이 남긴 필사본. 운휘는 사람들이 쓸모없다며 밀어 둔 글에서 늘 누군가의 욕심과 거짓말을 읽어 냈다.


해가 기울 무렵 운휘는 외곽 서고의 문을 열었다.

서고지기 노인은 화로 옆에서 졸고 있었다. 운휘가 피 묻은 천을 든 채 들어서자 노인은 눈꺼풀도 제대로 들지 않은 채 손가락을 흔들었다.

"수련장 난리는 끝났느냐."

"예. 태진 도련님이 서고에 묵은 장부를 내일까지 정리하라 하셨습니다."

"그놈은 검을 휘두르는 시간보다 남을 부려 먹는 시간이 길구나."

노인은 혀를 차더니 서가 맨 아래를 가리켰다.

"저기 뒤쪽이다. 곰팡이 먹은 종이는 골라내서 태워라. 글을 읽을 줄 아는 놈이 있으니 내 팔자가 편해졌지."

운휘는 대답 대신 등불에 기름을 채웠다. 불빛이 낮은 서가 사이를 가늘게 훑었다.

장부 더미는 생각보다 심했다. 군량을 빼돌린 하인의 장부와 비단 값을 부풀린 상단의 영수증이 한데 섞여 있었다. 운휘는 종이를 넘길 때마다 필체와 날짜를 나눴다.

세가의 오래된 장부에는 특이한 표기가 있었다. 방위를 적을 때 글자 위에 작은 점을 찍고 달의 차고 기우는 모양으로 날짜를 숨기는 방식이었다.

백리세가 초대 가주가 전란 중에 창고 위치를 감추려고 만든 표기라고 들었다. 지금은 이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운휘가 무너진 상자 하나를 들어 올렸을 때였다.

바닥판 아래에서 낡은 책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가죽 표지는 바싹 말라 갈라져 있었다. 제목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먹으로 그은 듯한 선만 남아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긁어 낸 흔적이었다.

운휘는 책을 꺼내 먼지를 털었다.

"그것도 태울 물건인가요?"

노인이 눈을 비비며 힐끗 보았다.

"어디서 나온 건데?"

"바닥 아래에서 나왔습니다."

"그럼 더더욱 잡서겠지. 수십 년 동안 아무도 안 찾았으니 주인 없는 종이다. 화로 옆에 놔둬라."

운휘는 책을 펼쳤다.

첫 장의 글은 문장이라 부르기 어려웠다. 산과 물을 뜻하는 글자가 엉켜 있었고 가운데마다 붉은 먹점이 박혀 있었다. 몇 줄은 아예 칼로 도려낸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누군가 글을 망가뜨린 것이 아니라 감춘 것이다.

운휘의 손이 멈췄다.

붉은 점은 무작위가 아니었다. 세가 장부의 방위점과 같은 간격으로 찍혀 있었다. 다만 동서남북이 아니라 북두칠성의 순서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는 서가에서 초대 가주의 군량 장부를 찾아 책상 위에 펼쳤다. 낡은 장부의 점과 고서의 붉은 점을 번갈아 훑었다.

한 식경이 지났을 무렵, 운휘는 비어 있는 글자 하나에 손가락을 얹었다.

북쪽을 뜻하는 점 다음에는 달의 기울기를 적는 부호가 와야 했다. 그런데 고서에는 약초의 성질을 나타내는 글자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틀린 글자가 아니었다. 한기를 뜻하는 옛 표기였다.

운휘는 숨을 멈췄다.

방위와 시각, 약성. 셋을 겹치자 잘린 문장이 다시 이어졌다.

―눈이 세 번 녹는 북쪽 바위 아래. 뿌리는 얼음보다 깊다.

등불의 심지가 짧게 타들었다.

운휘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대신 책장을 넘겼다.

다음 장에도 같은 방식의 암호가 이어졌다. 어느 장에는 흙의 색을 뜻하는 글자가 있었고 어느 장에는 사람의 발자국 수를 가리키는 글자가 있었다. 단순한 암호문이 아니었다.

누군가 무림의 산과 골짜기마다 숨은 물건을 찾는 법을 기록하고 있었다.

운휘는 페이지 가장자리에서 희미한 두 글자를 찾아냈다.

천기.

그 아래의 글자는 훼손되어 읽을 수 없었다. 그래도 책의 성격을 짐작하기에는 충분했다.

천기를 기록한 책.

그가 다시 첫 문장을 들여다보았다. 백리세가에서 북쪽 바위라 부를 곳은 하나뿐이었다. 뒷산 깊숙한 금지 구역의 암벽.

그곳은 겨울이면 주변보다 먼저 얼고 봄이 와도 눈이 오래 남았다.

그런데 왜 가문은 그곳을 금지했을까.

운휘는 책장을 한 장 더 넘겼다. 도려낸 글 사이로 남은 네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천년설삼.

그 이름을 아는 순간 심장이 처음으로 크게 뛰었다.

막힌 경맥을 녹이고 죽은 단전에도 길을 낸다는 전설의 영약. 의원들이 헛된 약초꾼의 허풍이라 치부하던 물건이었다.

운휘는 책을 덮지 못했다.


서고 문이 열리며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었다.

"사형. 아직도 여기 있었어요?"

백소연이었다.

소연은 양손에 작은 약초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검집을 허리에 찬 모습은 아직 앳됐지만 눈빛만은 또래 사내들보다 먼저 앞으로 나아가 있었다.

운휘는 고서를 장부 아래로 밀어 넣었다.

"약초는 왜 들고 왔지?"

"어머니께서 쓰시던 탕약 재료예요. 약방에 맡기려 했는데 이걸 보세요."

소연은 바구니 안쪽에서 작은 뿌리 하나를 꺼냈다. 잎은 시들었는데 뿌리 끝에는 푸른빛 흙이 단단히 붙어 있었다.

"뒷산 아래에서 캤대요. 그런데 오늘부터 산길을 막는다고 하더라고요. 큰아버지 쪽 사람들이 순찰을 늘렸어요."

"갑자기?"

"산짐승 때문이라는데 믿기지 않아요. 사형도 그쪽으로 가지 마요."

소연은 말끝을 흐렸다. 수련장 쪽을 힐끗 보는 눈빛에 걱정이 묻어 있었다.

운휘는 그 시선을 알아차렸다. 소연은 태진이 자신을 부려 먹는 것을 볼 때마다 불쑥 나서려 했다. 운휘가 말리면 늘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나는 서고에 있었어. 산에 갈 이유가 없지."

"정말요?"

"정말이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직은 산에 갈 준비가 없었다.

운휘는 바구니의 흙을 손끝으로 비볐다. 푸른 흙 사이에는 흰 결정이 얇게 섞여 있었다. 뒷산 북쪽 암벽의 그늘에서만 생기는 한설토였다.

고서의 문장이 지목한 곳과 맞아떨어졌다.

소연은 그가 흙을 살피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뭐예요?"

"뿌리가 오래 산 흙이야. 약방에는 바로 맡겨."

"사형도 저녁은 드세요. 며칠째 죽만 드셨잖아요."

소연은 잔소리처럼 말했지만 바구니 한쪽에 싸 둔 따뜻한 찐빵을 책상에 놓고 돌아섰다.

운휘는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간 뒤에도 한동안 찐빵을 보았다.

가문 안에서 자신을 쓸모없는 방계라 부르지 않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소연의 짧은 당부는 언제나 계산을 흐트러뜨렸다.

하지만 흐트러진 계산은 다시 세우면 됐다.

소연이 가져온 흙은 확신을 주었다. 누군가 이미 뒷산을 살피고 있었다. 순찰이 늘어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누가 설삼의 존재를 아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다.

먼저 손에 넣으면 그만이었다.


밤이 깊자 서고지기는 먼저 잠들었다.

운휘는 화로의 불을 줄이고 고서를 다시 펼쳤다. 이번에는 첫 문장 아래의 미세한 긁힌 자국까지 놓치지 않았다.

달빛을 비스듬히 받게 하자 먹물 아래에 감춰진 획이 떠올랐다.

―달이 기울기 전 진의 눈을 찾지 못하면 설삼은 산과 함께 잠든다.

그 아래에는 세 줄의 짧은 경고가 있었다.

―뿌리를 끊지 말 것.

―찬 기운을 억지로 막지 말 것.

―입구의 발자국을 믿지 말 것.

운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설삼은 그저 바위틈에 난 약초가 아니었다. 누군가 진법으로 감춰 둔 물건이었다. 잘못 다루면 약효를 잃는 정도가 아니라 산의 한기를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그는 세가 지도를 꺼내 고서 위에 올렸다. 북쪽 암벽의 굴곡과 장부에 남은 옛 사냥길을 겹쳤다.

금지 구역의 정문은 일부러 눈에 띄게 나 있었다. 반면 그 아래에는 오래전 무너진 수로가 하나 있었다. 물길은 막혔지만 바람은 여전히 드나들었다.

입구의 발자국을 믿지 말라.

진짜 길은 사람이 드나드는 길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운휘는 서고의 구석에서 낡은 먹통과 얇은 동전을 챙겼다. 동전은 바람의 방향을 읽는 데 쓰고 먹물은 진법의 기운이 새는 틈을 찾는 데 쓸 생각이었다. 무공을 배운 사람이라면 비웃을 준비물이었다.

그러나 운휘에게 없는 것은 기력이 아니라 근거였다.

이제 근거가 생겼다.

그는 찐빵을 반으로 갈라 한쪽을 먹었다. 차가워진 빵이 목을 넘자 마음도 차분해졌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밤 움직인다.

순찰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이 낫고 설삼을 노리는 자가 있다면 더더욱 늦출 이유가 없었다.

운휘는 고서를 품 안에 넣었다. 책의 표지는 차갑고 무거웠다.

그 무게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씌워진 무력한 서생이라는 이름보다 훨씬 가벼웠다.

창밖으로 뒷산의 검은 능선이 보였다. 달빛 아래 가장 높은 암벽 한쪽이 유난히 희게 빛났다.

백운휘는 등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미소 지었다.

새벽이 오기 전에, 천년설삼이 잠든 동굴의 진짜 입구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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