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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헌터는 퇴근 후에 꿀만 빱니다1화

S급 헌터는 퇴근 후에 꿀만 빱니다

S급 헌터는 퇴근 후에 꿀만 빱니다

시놉시스

인류 최강의 S급 헌터 강무혁은 최종전의 한가운데서 길드연합의 배신을 맞는다. 죽음 뒤에 눈을 뜬 곳은 10년 전, 그가 E급으로 각성했던 협회 측정실이었다.

이번 생의 무혁은 복수보다 먼저 퇴근을 고른다. 전생의 기억을 품은 E급 신입은 가장 쉬운 슬라임 던전을 찾아 나선다.

1화: 회귀했는데 E급이라니 오히려 좋아

검은 피가 검날을 타고 흘렀다.

강무혁은 무너진 성벽 위에서 마지막 마수를 내려다봤다. 놈의 심장은 이미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검을 거둬도 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게이트 안쪽의 진동은 멎지 않았다.

문제는 마수가 아니었다.

“검성님, 퇴로가 막혔습니다!”

뒤에서 들린 외침에 무혁은 고개를 돌렸다. 함께 들어온 헌터들이 있던 통로가 붉은 결계로 닫혀 있었다. 저 문양을 그는 너무 잘 알았다.

길드연합의 봉쇄식.

마수를 잡는 데 쓰는 결계가 아니었다. 안에 남은 사람을 버릴 때 쓰는 결계였다.

붕괴한 기둥 너머로 박진철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가 튄 방패를 든 그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여기까지입니다.”

무혁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십 년이었다. 게이트가 터질 때마다 가장 먼저 들어갔고 사람을 살려 달라는 무전에 가장 늦게 나왔다. 검성이라는 이름이 생긴 뒤에는 잠든 시간보다 인터뷰와 호출에 끌려다닌 시간이 길었다.

그 끝이 고작 이 장면이었다.

“뒤에 있는 애들은 빼.”

무혁의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평온했다.

박진철은 코웃음을 쳤다.

“명령할 처지는 아니잖습니까. 당신 하나만 없어지면 위쪽도 다 편해져요.”

결계 너머에서 신입 헌터 하나가 주저앉았다. 마수의 시체에서 새어 나온 마나가 바닥을 핥고 통로 위 천장은 금이 간 유리처럼 갈라졌다.

무혁은 박진철 대신 그들을 봤다.

살리고 싶었다. 그것이 늘 문제였다.

지금 남은 마나를 전부 쥐어짜면 결계와 천장을 함께 벨 수 있다. 통로의 사람들은 빠져나갈 것이다. 대신 검을 휘두른 자신은 붕괴 한가운데 남는다.

예전 같았으면 고민하지 않았을 선택이다.

무혁은 입안에 고인 피를 뱉고 검을 세웠다.

“다음 생이 있으면.”

박진철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구세주 같은 건 절대 안 한다.”

검광이 어둠을 갈랐다.

붉은 결계가 찢어지고 천장이 무너졌다. 흰빛이 시야를 삼키기 직전 무혁은 멀어지는 비명을 들었다.

누군가 살아 나갔는지는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강무혁 씨? 들리세요?”

눈을 뜨자 천장이 지나치게 하얬다.

피 냄새도 화약 냄새도 없었다. 대신 소독약과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무혁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다 멈췄다.

손이 작았다.

검을 쥐며 굳은살이 박였던 손바닥은 매끈했다. 손목을 타고 올라가던 오래된 흉터도 없었다. 가슴을 더듬자 최종전에서 갈렸던 갈비뼈도 멀쩡했다.

“측정 중에 잠깐 기절하셨어요. 처음 각성하면 놀랄 수 있죠.”

흰 가운을 입은 직원이 안도한 얼굴로 말했다. 책상 위에는 오래된 마나 측정구가 놓여 있었다. 투박한 유리구 안에서 푸른 빛이 반딧불처럼 흔들렸다.

각성자협회 서울지부.

열아홉의 자신이 등록하러 왔던 장소였다.

벽시계 아래 달력을 확인한 무혁은 숨을 멈췄다.

십 년 전이었다.

손끝이 떨렸다. 그는 맥박을 짚으며 안쪽의 마나를 훑었다. 거대한 바다처럼 다룰 수 있던 전생의 회로는 사라져 있었다. 대신 얇은 실 같은 마나가 심장 근처에 조용히 감겨 있었다.

억지로 넓히면 끊어진다.

그 사실을 확인하려고 마나를 조금 밀어 올렸을 때 가슴이 따끔하게 쑤셨다. 무혁은 즉시 흐름을 접었다. 감각은 남았지만 육체는 아직 전생의 검성을 담을 그릇이 아니었다.

그래도 손끝에서 마나가 흐르는 방향만큼은 선명했다.

직원이 측정구를 들여다봤다.

“등급은 E급입니다.”

그는 미안한 듯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높은 등급이 전부는 아니니까 너무 낙담하지 마시고요. 저등급 던전부터 경험을 쌓으시면 됩니다.”

무혁은 측정구의 희미한 빛을 보다가 웃었다.

E급.

전생의 그는 그 글자 하나를 부끄러워했다. 높은 곳에 올라야 사람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강해지지 못하면 누군가의 부름에 답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달랐다.

E급이면 가장 위험한 곳에 끌려갈 일도 적었다. S급의 호출도 없고 국제 길드의 회의도 없다. 새벽에 울리는 재난 경보를 듣고 장비도 못 챙긴 채 뛰어갈 이유도 없다.

“좋네요.”

직원이 눈을 깜빡였다.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등록 절차는 빨리 끝낼 수 있죠?”

무혁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이번 생은 칼퇴할 겁니다.”

직원은 E급 신입이 긴장해서 엉뚱한 말을 한다고 생각한 듯 고개만 끄덕였다.

무혁은 그 반응이 마음에 들었다. 평범하게 보이는 건 아주 훌륭한 재능이었다.


등록증을 받아 든 뒤 무혁은 협회 로비로 나왔다.

기억보다 시끄러운 곳이었다. 신입 헌터들은 게시판 앞에서 일자리 공고를 뜯어봤다. 누군가는 길드 명함을 받아 들고 있었고 누군가는 선불금이라 적힌 숫자 앞에서 오래 망설였다.

무혁은 지갑 속 현금을 세었다. 교통비와 밥값을 빼면 사흘을 버티기 어려운 돈이었다.

일을 아예 안 할 생각은 아니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던전을 돌고 수당을 받아서 월세를 내면 된다. 남는 시간에는 늦잠을 자고 맛있는 것을 먹는다. 가능하면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는 곳에 작은 집도 하나 마련한다.

꿈은 소박했다.

“블랙스톤 쪽이면 장비도 빌려준다던데.”

“대신 계약 기간이 삼 년이래. 중간에 나가면 위약금이 엄청나다잖아.”

무혁은 그 이름을 듣고 발을 멈췄다.

블랙스톤.

전생의 박진철이 몸담았던 길드였다. 아직은 수도권 하급 던전의 인력을 긁어모으는 중견 길드일 뿐이다. 하지만 계약서 한 장으로 E급 헌터들을 묶고 위험한 곳에 밀어 넣는 버릇은 이미 시작됐을 것이다.

창구 직원이 무혁을 발견하고 명함을 내밀었다.

“신입이면 여기 조건 괜찮습니다. 교육도 해 주고 파티도 붙여 줘요. 혼자 돌다가 다치는 것보다 훨씬 낫죠.”

명함 뒤에는 계약서가 있었다. 무혁은 종이를 한 장 넘겼다.

장비 대여비. 월별 교육비. 공략 수당 우선 상계. 독점 공략 조항. 계약 해지 위약금.

전생에 수없이 봤던 덫이었다.

“안 합니다.”

“그래도 혼자 시작하면 수입이 불안정한데요.”

“불안정한 건 싫어서요.”

무혁은 계약서를 조용히 밀어 놓았다.

직원은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붙잡지 않았다. 그저 E급 하나가 결국 다시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판단은 틀렸다. 무혁은 대형 길드의 보호도 승급 교육도 필요 없었다. 위험도가 낮고 이동 시간이 짧고 끝나면 바로 수당을 주는 일만 있으면 됐다.

그는 게시판으로 향했다.

C급은 장비 유지비가 크다. D급은 파티장 성격에 따라 퇴근 시간이 달라진다. B급 이상은 쳐다볼 이유조차 없었다.

그러다 노란색 공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 동부 7구역 E급 게이트 / 슬라임 군락 / 일일 파티 모집]

집결은 오전 아홉 시. 예상 공략 시간 두 시간. 수당은 적당했다.

무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두 시간이라니.

입구에서 오른쪽 벽을 세 번 두드리고 물길을 따라가면 코어까지 삼 분이었다. 전생에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슬라임을 한 마리씩 잡다가 진흙탕에 빠져 시간을 버렸다.

그는 공고 아래의 신청판에 이름을 적었다.

강무혁.

등 뒤에서 직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던전은 오늘 마나 진동이 조금 높다고 하던데 괜찮겠어요?”

무혁은 공고 구석의 작은 경고 문구를 다시 봤다. 평소보다 높은 마나 진동. 보통은 파티를 미루거나 인원을 더 받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수치가 위험 등급을 올릴 정도는 아니었다.

“슬라임이잖아요.”

직원은 더 말하지 못했다. E급 헌터가 E급 던전을 고르는 건 지나치게 당연한 선택이었으니까.

무혁은 등록증을 주머니에 넣었다.

“내일 아홉 시죠?”

“집결은 여덟 시 오십 분입니다. 늦으면 파티에서 빠질 수 있어요.”

“안 늦습니다.”

이번 생에서 가장 성실하게 지킬 약속이었다.


그날 저녁 무혁은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두 개와 컵라면을 샀다.

낡은 원룸 바닥에 앉아 김이 오르는 라면을 내려다보자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전생에는 식은 전투식량을 입에 넣고 다음 게이트 좌표를 확인한 날이 더 많았다.

내일은 던전을 끝내고 점심 전에 나올 수 있다.

수당을 받으면 국밥을 먹는다. 그 다음에는 낮잠을 잔다.

누가 뭐라 해도 오후 일정은 비워 둘 생각이었다.

휴대전화에 새로 받은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동부 7구역 E급 게이트 일일 공략. 내일 08:50까지 집결 바랍니다. 현장 마나 진동으로 인해 입장 전 재점검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무혁은 마지막 문장을 잠시 읽었다.

전생의 기억 속 슬라임 군락은 평화로운 던전이었다. 지루해서 문제였지 위험해서 문제인 곳은 아니었다.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알람을 맞췄다.

내일 가서 벽만 두드리면 끝날 일이다.

무혁은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이 세계가 얼마나 엉망이든 오늘만큼은 상관없었다.

내일부터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꿀을 빨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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