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한 랭커가 던전을 무시함

1화: 만렙의 귀환
검은 피가 마왕성의 옥좌 아래로 흘렀다.
한성운은 검끝에 맺힌 피를 한 번 털어 냈다.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이 닿자마자 새카만 돌이 지직거리며 녹아내렸다.
"끝났나."
대답할 존재는 없었다.
마왕의 몸은 이미 목을 잃은 채 옥좌에 기대어 있었다. 십 년 동안 수없이 들었던 포효도 마지막까지 성운을 저주하던 목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성운은 무너지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발할라의 하늘은 늘 붉었다. 전쟁이 끝났다는 날에도 먼 곳에서는 성채가 타고 마수들이 울었다.
그 풍경에 질린 지 오래였다.
손을 펼치자 검은 보석 하나가 손바닥 위에서 빛났다. 마왕성의 심장과 연결된 차원핵이었다.
성운은 그것을 가볍게 쥐었다.
쩍.
균열이 퍼지며 붉은 하늘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그의 앞에 푸른 빛의 틈이 열렸다.
지구로 이어지는 좌표였다.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성운은 끝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장마철 아스팔트 냄새와 편의점 앞의 따뜻한 어묵 국물, 집 근처 골목에 있던 낡은 국밥집까지.
이번에는 누구에게도 검을 들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는 검을 등에 걸고 차원문을 향해 걸었다.
문턱을 넘기 직전 멀리서 쇳소리가 울렸다.
처음에는 마왕성의 붕괴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소리는 너무 일정했다. 짧게 세 번 울리고 이어서 거칠게 끊겼다.
경보음이었다.
성운이 눈을 좁혔다.
푸른 빛 너머로 보인 것은 기억 속 서울이 아니었다.
무너진 고가도로 위로 회색 연기가 떠 있었다. 빌딩의 창문은 깨져 있었고 도로를 가로막은 버스는 녹슨 철골처럼 기울어져 있었다.
차원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성운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었다. 먼지와 피 냄새가 섞여 콧속을 찔렀다.
전쟁터의 냄새였다.
그는 발밑의 금 간 도로를 따라 몇 걸음 옮겼다. 망가진 편의점 간판 아래에는 빈 캔과 깨진 마나석 조각이 섞여 굴러다녔다.
문을 닫은 약국 유리에는 흰 페인트로 큼지막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 안전구역 동문, 북쪽 2km.
그 아래에는 작게 덧칠된 문장이 있었다.
― 단독 이동 금지. 해 지기 전 입장.
"여기 서울 맞나."
대답 대신 골목 건너편에서 비명이 터졌다.
사람들이 동문이라 쓰인 철제 바리케이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낡은 배낭을 멘 노인과 아이를 업은 여자가 뒤엉켜 달렸다.
누군가는 물통을 놓쳤고 누군가는 뒤를 돌아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바리케이드 위의 감시탑에서는 붉은 등이 다급하게 깜빡였다.
그들의 뒤로 개처럼 생긴 마수들이 네 발을 굴렀다. 몸통은 송아지만 했고 이마에는 비틀린 뿔이 두 개씩 솟아 있었다.
성운은 마수의 발걸음을 세었다.
열셋.
발할라에서는 길목을 지키는 최하급 사냥개보다도 약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바리케이드 위의 사람들은 총을 겨누며 창백하게 소리쳤다.
"뿔개 무리다! 문 닫아!"
"아직 밖에 사람이 있어요!"
"B급 헌터 부르라고!"
철문이 삐걱거리며 닫히기 시작했다.
여자는 아이를 품에 안고 넘어졌다. 아이의 손에서 토끼 인형이 굴러 나왔다.
뿔개 한 마리가 낮게 몸을 숙였다.
성운은 한숨을 쉬었다.
돌아오자마자 눈앞에서 사람이 뜯기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피 냄새가 더 짙어지면 밥맛도 떨어질 것이다.
그는 허리의 검을 뽑았다.
은빛 선이 허공을 스쳤다.
가장 앞선 뿔개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어서 뒤따르던 마수들의 목에 가느다란 붉은 선이 떠올랐다.
성운은 검을 한 번만 휘둘렀다.
열세 마리의 몸이 동시에 쓰러졌다.
도망치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췄다.
바리케이드 위의 경계병도 입을 다물었다. 마수 사체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미끄러졌다.
성운은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이 정도면 됐지."
그때 폐허가 된 상가 안쪽에서 낮은 진동이 울렸다.
쿵.
뿔개들의 사체가 한쪽으로 밀려났다. 어두운 골목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기어 나왔다.
뿔개보다 세 배는 큰 몸이었다. 목덜미에는 사람 얼굴만 한 비늘이 겹겹이 붙어 있었고 입가에서는 검은 침이 흘렀다.
바리케이드 위에서 누군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철갑 뿔개."
"저건 B급이 와도 시간이 걸려."
여자는 아이를 일으키려다 다시 주저앉았다. 젊은 남자가 그들 앞을 막아 섰지만 손에 든 쇠파이프는 떨리고 있었다.
철갑 뿔개는 가장 가까운 성운을 향해 노란 눈을 굴렸다. 그러고는 성운이 아니라 넘어진 아이의 인형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성운은 마수의 기척을 읽었다.
조금 더 단단할 뿐이었다.
"너도 귀찮게 하네."
철갑 뿔개가 땅을 박찼다. 콘크리트가 갈라지고 거대한 몸이 아이와 성운 사이로 덮쳐 왔다.
성운은 검을 뽑지 않았다.
다가온 주둥이를 손바닥으로 밀었다.
쾅!
마수의 머리가 바닥에 박혔다. 충격은 골목 끝까지 번졌지만 성운의 발밑에는 금 하나 생기지 않았다.
철갑 뿔개가 발톱을 휘둘렀다. 성운은 귀찮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퍽.
단단한 두개골이 안쪽에서부터 터졌다.
검은 피가 성운의 옷자락 앞에서 멈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막이 피를 튕겨 냈다.
아이의 인형은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채 바닥에 남았다.
잠깐의 정적 뒤에 철문이 다시 열렸다.
검은 머리를 묶은 여자가 검을 든 채 뛰어나왔다. 발걸음은 빨랐지만 성운에게 가까워질수록 조심스러워졌다.
"문 열어! 살아 있는 사람부터 들여보내!"
감시탑 위의 경계병이 급히 외쳤다.
"강 헌터님, 저 남자 신원 확인이 먼저입니다!"
"마수 떼를 혼자 베어 낸 사람보다 저 아이가 먼저예요. 문 열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었다.
경계병들은 잠시 망설였지만 곧 철문을 더 밀어 열었다. 여자는 피난민들을 안쪽으로 보내고 아이의 이마를 확인했다.
허리춤에서 붕대를 꺼내 손을 움직이는 손놀림이 익숙했다.
성운은 그 모습을 보며 검을 든 손을 내렸다.
"다친 분은 안 계세요?"
그녀는 피난민들에게 먼저 묻고 나서야 성운을 돌아봤다.
"헌터예요?"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방금 그 검술은…… 아니, 됐어요. 우선 안으로 들어가야 해요. 냄새 맡은 마수들이 더 몰릴 거예요."
성운은 바리케이드 너머를 봤다. 철판 뒤에는 컨테이너와 천막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익숙한 서울의 건물들 사이로 낯선 감시탑과 푸른 결계등이 솟아 있었다.
천막 앞에는 빈 그릇을 든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국자를 든 배급병이 묽은 죽을 퍼 주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가 뭐 하는 데지?"
여자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서울 안전구역 동문이요. 설마 밖에서 오셨어요?"
"그런 셈이지."
"대격변 이후로 외부에 사람이 남아 있었다고요?"
성운은 대답 대신 무너진 도로를 둘러봤다.
대격변.
발할라의 차원전쟁이 떠올랐지만 이곳의 마력은 다르게 뒤섞여 있었다. 누군가 문을 억지로 열어 놓은 냄새였다.
여자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강아린입니다. B급 헌터고 동문 경계 지원을 나왔어요. 성함이……"
"한성운."
아린은 이름을 되뇌다가 바리케이드 쪽을 힐끗 봤다. 경계병 몇 명이 무전기를 붙들고 성운을 가리키고 있었다.
"등록은 안 되어 있으시죠?"
"등록?"
"각성자 협회에요. 안전구역 안에서 지내려면 신원 확인은 받아야 해요. 지금은 그보다……"
성운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밥 파는 곳 있나?"
아린의 눈이 커졌다.
"네?"
"뜨거운 밥. 국물 있으면 더 좋고."
바리케이드 밖에 널린 마수 사체와 무너진 건물을 보고 있던 아린이 잠시 말을 잃었다.
"있긴 한데 배급 시간은 끝났어요. 그리고 지금은 혼자 돌아다니시면 안 돼요. 오늘 외곽 게이트가 두 번이나 흔들렸거든요."
"돈은 있다."
성운은 품 안에서 작은 가죽주머니를 꺼냈다. 황금화 몇 닢이 손바닥에서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아린의 표정이 더 복잡해졌다.
"그건 여기서 못 써요. 제가 아는 식당이 하나 있기는 해요. 주인아주머니가 아직 불을 껐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성운은 금화를 다시 넣었다.
"세상 참 많이 변했네."
"5년이에요. 대격변이 일어난 지."
그 말이 묵직하게 떨어졌다.
성운은 멈춰 섰다.
발할라에서는 열 해였다. 지구에서는 고작 닷새나 몇 달이 지났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고향은 이미 다섯 해 동안 무너지고 있었다.
아린은 그의 침묵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목소리를 낮췄다.
"가족이 있으셨어요?"
성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기억하는 집은 아주 오래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현관에 쌓인 전단지와 식탁 위의 찬 반찬, 주말이면 들리던 세탁기 소리까지 선명했다.
그 사이에 무엇이 사라졌는지는 아직 알고 싶지 않았다.
"일단 들어가죠."
아린이 조심스레 말했다.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 확인해 봐요. 식당도 제가 찾아볼게요."
성운은 그녀를 바라봤다. 겁을 먹은 기색이 눈에 남아 있었지만 아린은 피난민들이 모두 철문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쓸 만한 사람이었다.
"밥부터."
"네. 밥부터요."
아린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철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하늘이 어두워졌다.
구름이 낀 것도 아닌데 동문 위의 빛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성운은 고개를 들었다.
서울 안전구역 상공에 검은 원이 열리고 있었다.
원 안에서는 붉은 금이 번개처럼 번졌다. 주변의 결계등이 하나둘 꺼졌고 경계병들의 무전기에서는 찢어진 잡음이 쏟아졌다.
아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게이트가…… 이 위치에?"
성운의 표정도 처음으로 굳었다.
검은 틈 너머에서 흘러나온 냄새를 그는 알고 있었다.
발할라에서 마왕의 군세가 차원문을 열 때마다 남기던 냄새였다.
성운은 텅 빈 배를 한 번 내려다봤다.
따뜻한 밥 한 끼 먹기 전에 게이트부터 치워야 할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