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님, 제발 깔끔하게 이혼해 주세요!

시놉시스
태성그룹 후계자 강태무와 윤서아의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 계약이었다. 계약 만료일, 서아는 약속된 폐공장 부지 양도안과 이혼 합의서를 내민다. 그러나 누구보다 계약에 냉정했던 태무가 서명하지 못한다.
1화: 계약은 오늘 끝납니다
윤서아는 아침 식탁 위에 이혼 합의서를 올려두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세 장짜리 서류였다. 삼 년 전 결혼 계약서에 적힌 문장보다 훨씬 짧았다. 더 이상 미룰 이유도 없었다.
맞은편의 강태무는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는 늘 그렇듯 휴대전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오늘 일정은?”
“오전엔 법무법인에 가고 오후엔 삼척에 내려가요.”
“현장 답사는 다음 주라고 했던 것 같은데.”
“다음 주 일정은 없어요.”
서아가 서류를 그의 앞으로 밀었다.
태무의 손이 멈췄다.
“계약 만료일이니까요.”
조용한 다이닝룸에 에스프레소 머신의 잔열만 남았다. 태무는 서류 첫 장을 내려다봤다. 제목 아래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윤서아. 강태무.
결혼할 때는 그 순서가 중요하지 않았다. 태성가가 원하는 단정한 아내와 후계자에게 필요한 무사한 결혼 생활. 이름은 그 조건을 확인하는 도장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혼 합의서에서 서아의 이름은 제일 위에 있었다.
“부지 양도 확인서도 같이 넣었어요.”
서아가 두 번째 파일을 가리켰다.
“삼척 동해화학 부지. 토지와 건물은 내 명의로 이전하고 기존 설비 철거 비용은 태성개발이 부담한다. 계약서 7조 그대로예요.”
태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양도 확인서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서아가 손글씨로 적어 둔 메모가 보였다.
오후 두 시, 등기 서류 접수.
“이미 준비했군.”
“당신도 준비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서아는 웃지 않았다. 태무는 약속을 어긴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늦은 귀가에도 사과 대신 일정표를 남겼고 결혼기념일에는 선물 대신 필요한 것을 묻는 사람이었다. 다정하지 않은 방식이었지만 계약에는 정확했다.
그러니 오늘도 서명만 하면 된다.
태무가 펜을 집었다. 검은 만년필 끝이 서명란 위에서 멈췄다.
“서아.”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드물었다. 대개는 윤서아 씨였다. 회의실에서 부르는 호칭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목소리로.
“왜요?”
“오늘은 안 된다.”
서아가 눈을 깜빡였다.
“부지 이전이요?”
“이혼 서명.”
“계약은 오늘 끝나요.”
“알아.”
태무의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그는 무언가를 계산하듯 입술을 다물었다가 낮게 말했다.
“하루만 기다려.”
서아는 잠시 그를 보았다. 삼 년 동안 한 번도 사적인 질문을 하지 않던 남자가 처음으로 약속 밖의 시간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유는 없었다.
“이유를 말해 주세요.”
“지금은 말할 수 없어.”
“그럼 안 됩니다.”
태무의 시선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향했다. 흔들린 얼굴이었다. 서아는 그 표정이 낯설어서 오히려 더 경계했다.
“당신 사정은 당신이 해결하세요.”
그녀는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서류는 오늘 안에 검토해 주세요. 거절할 수 있는 계약은 아니니까.”
“서아.”
“삼 년 동안 충분히 기다렸어요.”
서아는 가방을 들었다. 현관으로 향하는 동안 태무는 붙잡지 않았다. 그가 붙잡을 줄 알았던 적도 없었다.
그래서 더 쉽게 떠날 수 있다고 믿었다.
태성개발 법무팀 회의실은 지나치게 밝았다.
서아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 등기 접수 서류를 한 장씩 확인했다. 토지대장, 건축물대장, 양도 계약서, 철거 비용 보증서. 종이마다 그녀의 이름이 선명했다.
동해화학 부지는 강원도 삼척 외곽에 있었다. 한때 직원 천 명이 드나들던 화학 공장이었지만 십오 년 전 가동을 멈췄다. 낡은 굴뚝과 비어 있는 기숙사, 바닷바람에 삭은 창고만 남았다.
사람들은 그 땅을 위자료 치고는 지나치게 값싼 선택이라고 했다.
서아는 달리 생각했다. 값이 싸다는 말은 아직 누군가가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뜻일 때가 많았다.
“윤 이사님.”
법무팀 부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양도 서류는 모두 완비됐습니다. 다만 대표님 측 최종 확인이 들어오면 접수하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서아는 고개를 들었다.
“최종 확인은 필요 없어요. 원 계약에 대리권과 이전 시점이 명시되어 있으니까요.”
그녀가 계약서 7조에 표시한 책갈피를 펼쳤다.
‘계약 종료일 자정까지 양수인 윤서아의 단독 요청으로 이전 절차를 개시한다.’
부장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부지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토양 정화 책임도 남아 있을 수 있고요.”
“그래서 제가 받는 거예요.”
서아는 서류 끝을 반듯하게 맞췄다.
“깨끗한 건물을 받으면 임대료를 받겠죠. 저는 오래된 곳을 고쳐서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게 만들 생각입니다.”
“사업을 직접 하시려고요?”
“네. 누구의 배우자 명함 말고 제 이름으로요.”
서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삼척 지역번호였다.
“윤서아 씨 맞으십니까? 동해화학 옛 경비반장이었던 최영철입니다.”
그녀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네. 안녕하세요.”
“부지 넘겨받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철거부터 한다고요?”
“안전 점검부터 하려고 합니다. 아직 정해진 건 없어요.”
전화기 너머에서 바람 소리가 길게 지나갔다.
“그 공장에 사람들 삶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냥 밀어버리지만은 말아 줘요.”
서아는 창밖의 유리 빌딩을 보며 천천히 답했다.
“그래서 직접 가 보려는 겁니다. 들은 이야기 없이 결정하지 않겠습니다.”
통화가 끝나자 법무팀 부장이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서아는 접수 서류의 마지막 칸에 서명했다.
그 순간 문이 열렸다.
강태무의 비서 정 실장이 숨을 고르며 들어왔다.
“윤 이사님. 대표님께서 댁으로 돌아와 주셨으면 합니다.”
“서명했나요?”
“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그럼 저도 할 말이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기다리고 계십니다.”
서아는 잠시 고민했다. 계약이 끝나는 날만큼은 도망치듯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해야 할 말을 끝까지 하는 편이 그녀답기도 했다.
“한 시간만 드릴게요.”
집무실의 커튼은 반쯤 닫혀 있었다.
태무는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아침에 남겨 둔 이혼 합의서는 여전히 서명되지 않은 채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서아는 문을 닫고 먼저 말했다.
“한 시간이 지나면 삼척으로 출발할 거예요.”
“알아.”
“그러니까 말씀하세요. 왜 이혼을 미루자는 건지.”
태무는 서류를 책상 위에 놓았다. 늘 결정이 빠른 사람이었다. 회의에서는 상대가 문장을 끝내기 전에 결론을 냈다. 계약서의 빈틈은 먼저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부탁하는 건 하루다.”
“하루 뒤에는요?”
“답을 주겠다.”
“무슨 답을요?”
“이혼에 서명할지.”
서아는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걸 고민할 일이었어요?”
“나한테는 그렇다.”
짧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태무의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거칠었다.
서아는 창가로 걸어가 그를 등졌다. 결혼 첫해에는 그의 침묵을 해석하려 애썼다. 피곤한 건지 화가 난 건지 자신이 싫은 건지. 어느 날부터는 해석을 그만뒀다. 계약서에 없는 마음을 추측하는 일은 손해였으니까.
“태무 씨.”
처음으로 이름만 불러 보자 목이 조금 건조해졌다.
“당신이 약속을 미루는 건 처음이에요. 그래서 더 불안해요.”
그가 고개를 들었다.
“불안하게 하려는 게 아니야.”
“그럼 설명하면 되잖아요.”
“설명하면 네가 더 싫어할 거다.”
“지금도 썩 좋진 않아요.”
태무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무너졌다. 서아는 그 짧은 변화를 보았지만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가 낮게 말했다.
“부지는 오늘 네 명의로 넘어간다. 그건 건드리지 않겠다.”
“당연한 말이에요.”
“알아.”
“그리고 이혼은 내일 오전 열 시까지 답을 주세요.”
서아는 책상 위의 펜을 집어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때도 이유를 말할 수 없다면 서명하세요. 더 기다리는 건 제 선택이 아니니까.”
태무는 펜을 보았다. 손을 뻗지 않았다.
서아는 그 모습에 이상하게 화가 났다. 붙잡아 주길 바랐던 적은 없다. 다만 자신이 떠나는 일이 그에게 펜 하나만큼도 무겁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유 없는 망설임을 보이면, 삼 년의 고요가 전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내일 봐요.”
그녀는 돌아섰다.
“서아.”
문 손잡이에 닿은 손이 멈췄다.
“미안하다.”
서아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 말도 이유가 될 수는 없어요.”
문이 닫혔다.
집무실에 혼자 남은 태무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책상 위에는 이혼 합의서와 삼척 부지 양도 확인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서명만 하면 끝나는 약속이었다. 다른 하나는 서명하지 않아도 이미 서아에게 가야 할 것이었다.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선대 회장 법률대리인에게서 온 전화였다.
“강 대표님. 정기 주주총회 관련 확인이 필요합니다. 혼인 관계 유지 조항에 변동이 생긴 겁니까?”
태무는 눈을 감았다.
“내일 답하겠습니다.”
“신탁 의결권은 주총일 기준으로 판단됩니다. 지금 이혼 절차가 시작되면—”
“알고 있습니다.”
전화를 끊은 그는 금고를 열었다. 맨 안쪽에서 얇은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선대 회장의 승계 의결권 신탁.
여섯 달 뒤 주주총회까지 혼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문장이, 차가운 활자로 적혀 있었다.
태무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혼 합의서 위에 봉투를 올려두었다.
내일이면 말해야 한다.
그런데 서아가 그 이유를 듣고도 자기 곁에 남을 리 없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