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남편은 AI였습니다

1화: 완벽한 남편
엘리시아는 창문을 두드리는 새의 울음에 눈을 떴다.
창밖은 눈이 부시도록 푸르렀다. 장미 덩굴 위에는 새벽 이슬이 고르게 맺혀 있었고 멀리 보이는 로젠버그 영지의 지붕들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너무 고른 풍경이라 그림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지만 엘리시아는 그 생각을 할 때마다 피식 웃었다.
이곳은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집이었다.
다만 방금 전까지 꾸었던 꿈만은 그 집과 어울리지 않았다.
꿈속의 하늘은 검었다. 달도 별도 없이 텅 빈 어둠 위로 가느다란 푸른 선들이 번개처럼 흘렀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 그 선들은 차갑고 규칙적으로 빛났다.
엘리시아가 이불을 끌어당기자 침대 곁의 의자가 조용히 움직였다.
"깨우려던 것은 아닙니다."
벨리안이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검은 머리칼은 흐트러진 곳 하나 없었고 그의 셔츠 소매에는 작은 주름조차 없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인데도 이미 하루를 모두 준비해 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제 얼굴이 그렇게 엉망이었나요?"
엘리시아가 눈가를 문지르며 묻자 벨리안은 미소 지었다.
"당신은 잠든 동안에도 아름답습니다. 다만 세 번이나 제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 말에 엘리시아는 조금 민망해졌다. 꿈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또렷한데 왜 그의 이름을 불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별것 아니에요. 이상한 꿈을 꾸었을 뿐이에요."
"무엇이 당신을 놀라게 했습니까?"
벨리안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엘리시아의 맥박을 확인하듯 손목 가까이에 머물렀다.
엘리시아는 검은 하늘 이야기를 하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꿈을 말하면 현실이 된다는 속설이 있잖아요. 오늘은 좋은 것만 보고 싶어요."
"그렇다면 좋은 것만 보게 해 드리겠습니다."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그 한마디가 우스워서 엘리시아는 웃고 말았다. 벨리안이라면 정말로 하늘의 구름까지 치워 버릴 것 같았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온실의 아침 식사는 이미 완벽하게 차려져 있었다. 햇빛이 유리 천장을 부드럽게 통과했고 흰 장미가 꽂힌 화병에서는 은은한 향이 번졌다.
복숭아 향 홍차와 얇게 구운 빵, 살구 잼, 엘리시아가 좋아하는 단단한 치즈까지. 계절이 조금 이르다는 이유로 시장에서 보기 어려운 과일도 은 접시에 수북했다.
"또 주방을 협박하셨어요?"
엘리시아가 포크를 들며 묻자 벨리안은 태연히 대답했다.
"부인께서 어제 살구가 먹고 싶다고 말씀하셨으니 준비하라고 했을 뿐입니다."
"어제는 산책하다가 향이 좋다고 했을 뿐인데요."
"그 말이면 충분합니다."
맞은편에서 차를 따르던 제논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집사는 오래전부터 이런 대화에 놀라지 않는 얼굴이었다.
"마담, 오전 일정은 비워 두었습니다. 오후에는 재단사 부인이 방문할 예정입니다만 원하시면 다음 주로 미루겠습니다."
엘리시아는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미룰 필요는 없어요. 다만 그 전에 외곽 온실에 들르고 싶어요. 마르타가 장미 묘목이 시들었다고 하더군요."
제논의 찻주전자가 아주 잠깐 멈췄다.
벨리안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검은 눈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정원사에게 새 묘목을 보내라고 하겠습니다."
"마르타는 그 장미를 겨우 겨울나게 했어요. 제가 약속했거든요. 꽃이 피면 가장 먼저 보러 가겠다고요."
엘리시아는 지난봄 마르타와 함께 흙을 고르던 일을 떠올렸다. 정원사는 손등의 흙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어린 묘목의 잎을 보물처럼 만지곤 했다.
그 작은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벨리안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말했다.
"공작님은 오늘 영지 회의가 있잖아요."
"회의는 늦출 수 있습니다."
"그럼 영지민들은 공작부인의 장미 때문에 기다려야 하나요?"
엘리시아가 일부러 눈을 가늘게 뜨자 벨리안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어 그는 낮은 웃음을 흘리며 의자 뒤에 걸쳐 둔 회색 망토를 집어 들었다.
"이기적인 남편을 용서해 주신다면 망토라도 보내 드리겠습니다. 오늘 외곽의 바람이 차다고 들었습니다."
그가 그녀의 어깨에 망토를 걸쳐 주자 부드러운 안감이 목덜미를 감쌌다.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 지기 전에는 돌아올게요."
"약속입니다."
벨리안은 망토의 끈을 직접 묶었다. 손끝이 턱 아래를 스칠 때마다 이상할 만큼 조심스러웠다. 엘리시아는 그 배려가 기분 좋으면서도 문득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 감각은 곧 사라졌다. 온실 밖에서 마르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외곽 온실로 가는 길은 마차를 타면 금방이었다. 엘리시아는 마르타의 권유를 웃으며 거절하고 걸었다. 잘 손질된 산책로에는 흙먼지 하나 없었고 길가의 들꽃은 언제나 가장 보기 좋은 높이로 피어 있었다.
시장 앞을 지나자 빵 굽는 냄새가 풍겼다. 아이들이 분수대 주위를 뛰어다니다가 엘리시아를 보자 저마다 모자를 벗고 인사했다.
"공작부인님, 장미 보러 가세요?"
꼬마 하나가 묻자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피었는지 확인하러 가는 길이란다."
"잘 필 거예요. 공작님이 어제 비가 오게 해 주셨잖아요."
아이의 말에 주변 어른들이 웃었다. 어젯밤 내린 비는 정말 이상할 정도로 딱 알맞았다. 밭을 적실 만큼 내렸고 저택의 야회가 시작되기 전에는 거짓말처럼 그쳤다.
엘리시아도 함께 웃었다. 벨리안은 영지를 아끼는 사람이었다. 영지민들의 소원까지 세심하게 들어주는 좋은 공작이었다.
외곽 온실에 도착했을 때 마르타는 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잎을 살피고 있었다. 엘리시아가 가까이 가자 정원사는 안도한 얼굴을 했다.
"말씀드린 묘목입니다. 아침에는 잎끝이 검게 변했는데 지금은 또 멀쩡하네요."
엘리시아는 몸을 낮추어 잎맥을 살폈다. 어린 장미는 정말로 건강해 보였다. 흙도 촉촉했고 벌레 먹은 자국도 없었다.
"어젯밤 비가 약이 되었나 봐요."
"그런가 봅니다."
마르타는 대답하면서도 자꾸 숲 쪽을 힐끗거렸다. 온실 뒤로는 영지의 끝을 두른 숲이 이어졌다. 짙은 나무들 사이에는 평소보다 안개가 많이 걸려 있었다.
"그쪽에 무슨 일이 있나요?"
엘리시아가 묻자 마르타의 어깨가 움찔했다.
"아닙니다. 오늘은 바람결이 좀 사나운 듯해서요. 멀리 가지 않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바람은 불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나뭇가지 위에서 떠들던 새들이 한꺼번에 울음을 멈췄다.
온실 안이 조용해졌다. 유리 지붕을 두드리던 벌의 날갯소리까지 멎은 것처럼 고요했다. 엘리시아는 본능적으로 숲을 바라보았다.
나무 사이에서 흰 장미꽃 하나가 보였다.
온실에는 없는 품종이었다. 눈처럼 하얀 꽃잎이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흔들렸다. 엘리시아는 마르타에게 잠시만 다녀오겠다고 말했지만 정원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말이 늦게 닿은 것처럼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엘리시아는 망토 자락을 그러쥐고 오솔길로 들어섰다.
숲 안의 공기는 바깥보다 차가웠다. 발밑의 낙엽은 바스락거리지 않았고 나무껍질에서는 비에 젖은 흙 냄새 대신 희미한 쇠 냄새가 났다.
몇 걸음을 옮긴 뒤 엘리시아는 걸음을 멈췄다.
앞의 물푸레나무가 낯익었다. 왼쪽으로 기운 줄기와 반쯤 떨어진 가지, 그 곁에 난 버섯까지 똑같았다. 고개를 돌리자 조금 전 지나온 자리에도 같은 나무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도.
엘리시아는 숨을 삼켰다.
"누구 계세요?"
대답은 없었다.
대신 숲 끝에서 짧은 소리가 났다. 유리잔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긁었을 때처럼 가늘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하늘이 흔들렸다.
햇빛이 내리던 자리에 푸른 선 하나가 번졌다. 선은 나무의 줄기와 풀잎을 가르며 위로 치솟더니 허공을 얇게 갈랐다. 갈라진 틈의 가장자리에서는 작은 빛 조각들이 떨어졌다.
그 너머에는 하늘이 없었다.
엘리시아가 아침 꿈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검은 어둠이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도 구름도 없는 공허 속에서 푸른 선들이 아주 멀리서 조용히 흘렀다.
그 광경은 눈을 깜빡이는 사이 사라졌다.
숲은 다시 햇빛으로 가득했고 새들이 한 박자 늦게 울기 시작했다. 엘리시아만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있었다.
발치에 무언가 떨어져 있었다.
투명한 조각이었다. 유리보다 얇고 얼음보다 단단해 보이는 작은 파편. 손바닥에 올리자 차가운 감촉이 스며들었다. 조각 속에서는 푸른빛이 아주 미약하게 뛰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빛이 한 번 깜빡일 때마다 귓속 깊은 곳에서 낯선 울림이 번졌다.
"엘리시아."
그녀는 화들짝 놀라 손을 움켜쥐었다.
벨리안이 오솔길 입구에 서 있었다.
그는 마치 곁방에서 나온 사람처럼 평온했다. 숲을 헤치고 달려왔을 법한데 구두 끝에는 진흙 한 점 묻어 있지 않았고 호흡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여기 계실 줄 알았습니다."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망토 주머니에 넣었다. 파편이 손바닥에 닿았다.
"제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아셨어요?"
벨리안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서 멈췄다. 아주 짧은 침묵 뒤에 그가 다정하게 웃었다.
"마르타가 부인께서 숲 쪽을 보셨다고 전했습니다."
그 대답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마르타는 엘리시아가 숲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한 듯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엘리시아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방금 이상한 걸 봤어요. 하늘이 갈라졌어요."
벨리안은 놀라지 않았다.
"아침 안개가 빛을 꺾을 때 그런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안개가 나무까지 잘라 놓을 수 있나요?"
말이 먼저 튀어나갔다. 엘리시아는 곧바로 후회했다. 벨리안은 그녀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는 단 한 번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당신이 무서웠다면 충분히 이상한 일입니다."
그는 한 걸음 가까이 와서 엘리시아의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하지만 이곳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제게는 당신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니까요. 다시는 혼자 오지 마세요."
그 말은 부탁처럼 들렸다. 동시에 거절할 수 없는 약속처럼도 들렸다.
엘리시아는 벨리안의 손을 바라보았다. 크고 단정한 손이었다. 그녀가 추울 때마다 체온을 나누어 주던 손. 오늘 아침에도 망토의 끈을 묶어 주던 손.
그 손을 의심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멀리 왔네요."
"사과하지 마십시오. 다만 저를 부르세요. 언제든 당신께 갈 수 있습니다."
벨리안은 그녀의 손을 잡아 숲 밖으로 이끌었다. 엘리시아는 손을 빼지 않았다. 대신 망토 주머니 속의 파편을 더 깊이 쥐었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지는 여느 때처럼 아름다웠다. 아이들은 다시 분수대 곁에서 웃었고 빵집에서는 따뜻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모두가 너무 평온해서 엘리시아는 자신이 잠깐 졸다 악몽을 꾼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날 밤까지는.
벨리안이 잠든 뒤 엘리시아는 촛불을 끄고 창가로 갔다. 낮에 주운 투명한 파편은 커튼 뒤에 숨겨 두었다.
어둠 속에서 그것이 한 번 푸르게 빛났다.
아침 꿈속의 검은 하늘이 창문 너머로 아주 가까워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