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채집가가 경제권을 쥐락펴락함

1화: 히든 직업의 함정
시놉시스
전투 랭커를 꿈꾸던 강도현은 정식 서비스 첫날 히든 퀘스트를 완수한다. 그러나 그가 받은 직업은 검도 마법도 아닌 [만물 채집가]였다. 모두가 버린 생산 직업의 설명창 아래에서 도현은 다른 이에게 보이지 않는 위험한 빛을 발견한다.
"미안한데, 장비 점수도 보증금도 애매하네."
한태욱은 길드 모집 게시판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게시판 위에는 작은 길드 [새벽의 창]의 모집 조건이 떠 있었다.
전위 및 딜러 모집. 최소 장비 점수 120.
레이드 수리비 공동 적립금 3골드.
강도현은 자기 상태창을 닫았다. 장비 점수는 46. 시작 지급 가죽 갑옷과 낡은 단검 하나가 전부였다. 가진 골드는 2골드 13실버였다.
현실에서 아껴 둔 돈으로 접속 장비를 샀다. 남은 생활비는 다음 달 이용료를 내면 바닥이었다. 아르카나 온라인에서 전투 직업을 잡고 길드 레이드에 들어가야만 장비를 맞출 수 있었다.
그러니 저 87실버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도현이 다시 편의점 야간 근무를 구해야 하느냐를 가르는 벽이었다.
"보증금은 첫 레이드 정산에서 빼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이미 전직한 사람 얘기지."
태욱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뒤에는 강화된 방패를 멘 남자와 은빛 활을 든 여자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도현이 말을 꺼낼 때마다 시선을 교환했다.
"전직 전인 사람을 데리고 던전에 들어갔다가 생산직 나오면 누가 책임져? 우리도 시작 자금이 넉넉한 길드는 아니야."
생산직.
아직 직업조차 얻지 않았는데 그 단어가 먼저 목을 조였다. 아르카나 온라인에서 전투 직업은 사냥터와 레이드의 입장권이었다. 제작가도 돈을 벌 수는 있었다. 하지만 초반 제작가는 재료를 살 돈부터 필요했다.
돈 없는 생산직은 아무것도 만들 수 없었다.
"오늘 안에 전직하겠습니다. 히든 퀘스트 단서도 찾았습니다."
도현이 말하자 태욱의 눈썹이 올라갔다.
"히든 퀘스트?"
"초보자 숲 외곽 감시탑입니다. 전직 전만 들어갈 수 있다고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태욱은 곧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결과 보고 와. 검사나 성기사면 자리는 만들어 줄게."
그 말에는 뒷부분이 붙어 있었다.
다른 직업이면 오지 마라.
도현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대신 길드 창을 닫고 광장을 빠져나왔다. 분수대 주변에는 이미 전직에 성공한 플레이어들이 새 무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번개가 감긴 검을 든 남자가 외쳤다.
"광역기 있는 마법사 구합니다! 북문 던전 바로 갑니다!"
사람들이 그쪽으로 몰렸다. 도현은 그 사이를 지나 외곽으로 달렸다.
게시판에서 베껴 둔 문장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새벽을 잃은 탑에서, 주인의 손을 기다리는 것을 찾아라.
그 단서가 전설급 검사 전직으로 이어진다는 소문은 없었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말한 사람도 없었다. 지금의 도현에게는 그 모호함마저 기회였다.
초보자 숲 끝에는 절벽을 등진 무너진 감시탑이 있었다. 사냥터에서 멀지 않은데도 길은 한산했다. 탑 입구의 붉은 문장이 사람들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장 조건: 전직하지 않은 자.
도현이 문장 앞에 서자 근처에서 멧돼지를 잡던 플레이어 둘이 고개를 들었다.
"또 들어가는 사람 있네."
"아까도 셋 들어갔다가 죽어서 돌아왔어. 안에 레벨 8짜리 갑옷이 있다던데."
"전직 전에 죽으면 경험치 손해가 더 큰데 왜 저래?"
도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단검 손잡이를 쥐고 문장을 통과했다.
탑 안쪽은 축축했다. 무너진 천장 사이로 들어온 빗물이 돌바닥에 고여 있었다. 벽에는 오래된 횃불 꽂이와 찢긴 깃발이 남아 있었다.
그는 입구에서 포션 하나를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체력 회복 포션 하나가 30실버였다. 미리 마실 만큼 여유로운 지갑이 아니었다.
세 번째 계단을 밟는 순간 금속이 돌을 긁는 소리가 울렸다.
감시탑의 수호수 Lv.8
녹슨 갑옷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투구 틈에는 붉은 빛 두 점이 떠 있었다. 수호수는 사람 키보다 긴 창을 바닥에 끌며 계단을 막았다.
도현은 목이 바짝 말랐다. 레벨 8은 초보자 둘이나 셋이 파티를 꾸려 잡는 몬스터였다. 그는 레벨 4였다.
수호수가 창을 찔렀다.
퍽!
도현은 옆으로 몸을 던졌다. 창끝이 돌벽에 박히며 파편을 튀겼다. 팔뚝을 스친 조각에 체력 바가 줄었다.
HP 82%
정면으로 치고받으면 두 번도 못 버틴다.
도현은 위층으로 달렸다. 수호수의 느린 발걸음이 뒤를 쫓았다. 계단 끝에는 발판 절반이 무너진 공터가 있었다. 건너편 벽에는 기름이 반쯤 든 항아리 하나와 아직 꺼지지 않은 횃불이 걸려 있었다.
그는 바닥을 훑었다. 발판 아래는 어둡고 깊었다. 돌 사이에는 굵은 금이 사방으로 퍼져 있었다.
수호수는 멈추지 않았다.
도현은 단검을 던졌다. 날은 수호수의 투구를 맞고 튕겨 나갔다. 대신 괴물의 시선이 잠깐 위로 향했다.
그 짧은 틈에 도현은 기름 항아리를 발판 중앙으로 밀어 떨어뜨렸다. 이어 횃불을 뽑아 불씨를 던졌다.
화르륵!
기름이 금 간 돌 위에서 번졌다. 수호수가 창을 휘두르며 불길을 가르고 들어왔다. 도현은 마지막까지 기다렸다가 옆벽으로 몸을 붙였다.
콰직!
불에 달궈진 발판이 수호수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갑옷과 창이 잔해 속으로 떨어졌다.
도현도 균형을 잃었다. 손을 뻗어 난간을 잡았지만 낡은 나무가 부러졌다. 손등이 찢어지고 그는 한 층 아래 바닥까지 굴렀다.
HP 51%
눈앞이 아찔했다. 그래도 일어섰다. 수호수의 몸은 무너진 기둥에 한쪽 다리가 끼어 있었다. 붉은 빛이 흔들리는 투구 아래에서 창이 다시 들렸다.
도현은 쓰러진 갑옷을 보며 욕을 삼켰다. 이 정도면 처치 판정이 떠야 정상 아닌가.
그때 수호수의 손이 향하는 곳을 봤다.
잔해 너머. 금 간 제단 위에 푸른 구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봉인핵
도현은 움직임을 멈췄다. 처음 입구에서 봤던 단서가 떠올랐다. 주인의 손을 기다리는 것.
수호수를 죽이는 퀘스트가 아니었다. 수호수가 지키는 물건을 되찾는 퀘스트였다.
수호수가 창을 던졌다. 도현은 구르며 피했다. 창끝이 제단 옆에 박혔다. 그는 남은 체력을 보지 않고 제단으로 달렸다.
봉인핵을 잡는 순간 차가운 진동이 손바닥을 타고 올랐다.
숨겨진 시험을 완료했습니다.
파괴가 아닌 회수를 선택한 자에게 전직의 문이 열립니다.
수호수의 붉은 눈이 꺼졌다. 녹슨 갑옷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도현은 그제야 포션 하나를 마셨다. 달콤한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가자 상처가 천천히 아물었다.
30실버가 사라졌다.
그 대가가 아깝지 않게 해야 했다.
갈라진 제단 뒤의 벽이 열렸다. 안쪽에는 손바닥만 한 신전이 있었다. 회색 로브를 입은 노인이 돌의자에 앉아 도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늦었구나."
전직관 아르벤
아르벤은 봉인핵을 받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창을 쥔 수호수에게서 네가 찾은 것을 빼앗지 않았구나. 네가 필요했던 것은 죽음이 아니라 손이었다."
도현은 손등의 피를 닦았다.
"원하는 직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원하는 길을 말해 보아라."
"검사요."
그는 한 치도 망설이지 않았다.
"혼자 사냥할 수 있고 레이드에서도 자리를 얻을 수 있는 직업이 필요합니다. 더 빨리 강해질 수 있는 직업이면 됩니다."
아르벤의 눈이 가늘어졌다.
"힘을 구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도현은 광장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전투 인원만 받아. 장비 점수도 보증금도 애매하네.
"강해지지 못하면 아무도 내 몫을 주지 않으니까요."
봉인핵이 빛났다. 신전 천장에서 쏟아진 흰빛이 도현을 감쌌다.
히든 직업 전직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도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심장이 빨라졌다. 히든 직업. 적어도 평범한 검사보다는 위일 것이다.
당신의 직업은 [만물 채집가]로 확정됩니다.
빛이 사라졌다.
도현은 한참 동안 마지막 문장을 바라봤다.
"…뭐라고요?"
눈앞에 새 설명창이 떴다.
[만물 채집가]
등급: 히든
자연물과 광물, 마수 사체, 고대 유적 장치를 손상 없이 채집 및 해체할 수 있습니다.
초기 스킬: 만물 채집 / 위험 감지 / 약점 분석
전투 스킬은 없었다. 검술도 없었다. 마력을 날리는 기술도 없었다. 스킬 목록을 끝까지 내렸지만 빈칸뿐이었다.
전직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 문장이 가장 또렷했다.
신전 바깥에서 시스템 알림을 들은 플레이어들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히든 전직이래!"
"무슨 직업인데?"
누군가 도현의 머리 위에 떠오른 직업명을 읽었다.
잠깐의 정적 뒤에 웃음이 터졌다.
"만물 채집가? 그거 풀 뜯는 직업 아니야?"
"히든인데 생산직이면 망한 거지. 차라리 일반 검사 뽑는 게 낫겠다."
"저걸로 길드 들어가겠다고 했으면 태욱 형 표정 볼 만했겠는데?"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를 내면 저들이 더 즐거워할 뿐이었다. 하지만 속은 뜨겁게 뒤집혔다.
전직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런데 시스템은 그에게 몬스터를 잡을 칼 대신 바구니를 쥐여 주었다.
아르벤이 낮게 말했다.
"땅은 언제나 답을 품고 있다. 그러나 답을 캐는 손은 드물지."
"그 답으로 몬스터를 막을 수는 없잖습니까."
"네가 싸울 곳은 네가 정할 일이다."
노인이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쩌적.
신전 바닥의 균열이 길게 벌어졌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금 간 돌바닥을 밟지 않으려 물러났을 뿐이었다.
도현의 눈에는 달랐다.
균열 틈에서 아주 가는 초록빛이 피어올랐다. 빛은 바닥을 지나 감시탑 밖 절벽 아래로 길게 이어졌다.
[위험 감지]가 반응합니다.
고농도 독성 지역이 감지되었습니다.
미확인 채집 대상이 존재합니다.
도현은 숨을 멈췄다. 빛의 끝에는 폐광이 있었다. 초보자들은 검은 안개가 체력을 깎는다며 근처에도 가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상태창은 위험을 경고하면서도 그 안에 채집 대상이 있다고 알려 주고 있었다.
누군가 뒤에서 비웃었다.
"채집가면 저기 가서 버섯이나 캐 봐!"
도현은 절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검은 안개 사이로 초록빛이 한 번 더 선명하게 깜빡였다.
전투 직업을 잃었다고 해서 돈을 벌 길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확인하면 된다. 저 독기 속에 있는 것이 정말 30실버짜리 포션보다 값진지.
도현은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 허리에 꽂았다.
그리고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폐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