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멸망시키지 않기 위해 만렙을 숨김

시놉시스
세계 최약체 F급 헌터 강민우는 하위 게이트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 순간 전설급 만렙 상태창을 얻는다. 하지만 그 힘을 쓰는 순간 지구의 차원 축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경고가 함께 떠오른다.
1화: 멸망 경고
비는 퇴근 시간보다 먼저 서울 서부의 하늘을 지웠다.
강민우는 통제선 앞에서 젖은 운동화 끝을 바닥에 두 번 털었다. 허리에는 낡은 안전벨트가 감겨 있었고 등에 멘 배낭에는 응급 키트와 공구가 들어 있었다.
F급 헌터에게 어울리는 장비였다.
정확히 말하면 헌터 장비라기보다는 물류센터 야간 알바생 장비에 가까웠다.
"강민우 씨 맞죠?"
게이트 관리 요원이 명단을 들여다봤다.
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임시 짐꾼입니다. 위험수당 포함해서 십삼만 원이고 안에서는 파티장 지시를 따르세요."
"네."
십삼만 원이면 밀린 공과금 일부와 일주일치 도시락을 해결할 수 있었다.
민우는 게이트를 바라봤다. 폐물류창고의 출입구에 박힌 푸른 타원형 균열. 협회 표지판에는 F급, 저위험, 예상 공략 시간 두 시간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문구가 늘 맞았으면 F급 짐꾼도 조금은 덜 피곤했을 것이다.
"늦었잖아."
오태식이 민우의 배낭을 훑었다. 붉은 갑옷 위에 두른 가죽 조끼와 커다란 방패는 그의 C급 등급을 과시하듯 반짝였다.
"공구는 다 있냐?"
"있습니다."
"코어 나오면 네가 나른다. 마수 사체는 손대지 말고. 준호가 해체할 거니까."
옆에 있던 박준호가 창 끝으로 민우의 배낭을 툭 건드렸다.
"형님. 얘한테 너무 많이 기대하지 마세요. 지난번에도 계단 하나 오르다 멈췄다잖아요."
"무게가 좀 있었습니다."
민우는 배낭 끈을 고쳐 잡았다.
"뒤처지면 문 닫기 전에 먼저 나간다. 알겠지?"
"알겠습니다."
반박해 봐야 일당만 깎였다. 민우는 앞사람들의 장비를 눈으로 훑었다. 오태식, 박준호, 단검을 든 이현지. 셋은 이미 전투 준비를 끝냈다.
그들 뒤에서 민우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 안은 바깥보다 차가웠다.
깨진 팔레트와 녹슨 철제 선반이 어둠 속에 빽빽하게 서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조명은 꺼져 있었지만 바닥의 푸른 이끼가 희미한 빛을 냈다.
민우는 코끝을 찡그렸다.
마력 냄새가 이상했다. 오래된 건전지가 녹아내릴 때 나는 금속 냄새에 비 냄새가 섞여 있었다.
"몬스터 세 마리."
이현지가 손가락을 폈다.
선반 너머에서 회색 들개들이 기어 나왔다. 박준호의 창이 먼저 움직였다. 한 마리가 꿰뚫렸고 오태식의 방패가 두 번째 개의 머리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민우는 뒤로 물러났다.
이현지의 단검이 마지막 목을 그었다.
전투는 열 초도 걸리지 않았다.
"F급 게이트 맞네."
박준호가 피를 털었다.
"이렇게 쉬우면 오늘 일찍 끝나겠는데."
민우는 바닥에 떨어진 회색 털을 보지 않았다. 들개들이 나왔던 선반 아래를 봤다.
푸른 이끼의 빛이 일정하지 않았다.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 심장 박동처럼.
"저쪽은 피하는 게 낫겠습니다."
오태식이 돌아봤다.
"뭐?"
"마력 흐름이 이상합니다. 코어 쪽이 아닐 수도 있어요."
박준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F급이 마력 흐름도 봐?"
민우는 말끝을 흐렸다.
"그냥 느낌이요."
"느낌은 집에서나 챙겨."
오태식은 방패로 선반을 밀어 길을 냈다.
민우는 따라갔다. 일당을 포기할 정도로 확신할 근거는 없었다. 다만 배낭 안의 응급 키트가 걸음을 칠 때마다 평소보다 크게 흔들렸다.
창고 중앙에는 컨테이너 하나가 놓여 있었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
코어였다.
하지만 민우가 본 코어는 매끈한 구체가 아니었다. 표면에 가는 금이 수십 개나 퍼져 있었다. 금은 안에서부터 천천히 벌어지고 있었다.
"잠깐만요."
민우가 말했다.
오태식은 방패를 들었다.
"이번엔 또 뭐야?"
"코어에 금이 갔습니다. 협회에 보고하고 장비를 갖추는 게 좋겠습니다."
박준호가 컨테이너 안을 들여다보고 코웃음을 쳤다.
"저게 금이면 내 창은 유리막대지. F급 코어는 원래 좀 거칠어."
"아니요. 저건 안쪽에서 벌어지는 금입니다."
민우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때 코어가 한 번 뛰었다.
쿵.
선반 위의 상자들이 흔들렸다.
이현지가 눈썹을 찌푸렸다.
"태식 오빠. 이건 보고가 맞는 것 같은데."
"코어만 꺼내면 끝이야."
오태식의 방패가 빛났다.
그가 컨테이너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민우는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잡지 못했다.
오태식의 방패 가장자리가 코어 표면을 스쳤다.
쩌억.
푸른 균열이 코어에서 천장까지 치솟았다.
창고 전체가 기울었다.
"뒤로!"
민우가 외쳤다.
바닥이 갈라지며 검은 바람이 솟구쳤다. 박준호가 창을 놓치고 넘어졌다. 무너진 팔레트가 그의 종아리를 짓눌렀다.
이현지가 벽을 박차 출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오태식은 방패를 세우고 소리쳤다.
"준호부터 빼! 통로가 닫힌다!"
민우는 선반 아래에 깔린 박준호의 다리를 봤다. 그는 손을 뻗었지만 다른 쪽에서 떨어진 철골이 민우의 어깨를 쳤다.
숨이 막혔다.
몸이 뒤로 밀려나며 무너진 선반 밑으로 처박혔다.
먼지 너머로 이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우는요?"
"F급 하나 때문에 다 죽을 거야? 출구까지 열 걸음도 안 남았어!"
오태식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그 다급함 속에는 계산도 섞여 있었다.
대답은 없었다.
박준호의 신음과 발소리만 멀어졌다.
민우는 팔을 움직여 봤다. 오른손은 철제 프레임에 눌려 있었다. 어깨에서는 뜨거운 피가 흘렀다.
코어의 균열은 이제 창고 벽보다 컸다.
그 안쪽은 빛이 아니라 빈 곳이었다.
균열 한 줄기가 출구 쪽 통로를 타고 기어갔다. 그 끝은 게이트 바깥의 통제선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민우는 눈을 감았다.
십삼만 원 받고 죽기엔 좀 억울했다.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시야 한가운데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긴급 관리 권한 접속]
[대상: 강민우]
[전설급 만렙 상태창 동기화]
민우는 눈을 떴다.
글자는 허공에 떠 있었고 창고의 모든 소리는 멀어져 있었다.
[모든 스탯: 측정 불가]
[핵심 권한: 차원 봉합 / 개념 고정]
[지구 차원 과부하율: 99%]
마지막 문장이 유난히 붉었다.
[경고]
[사용자 출력 10% 이상 해방 시 차원 축 붕괴 가능성: 100%]
[현재 균열을 방치할 경우 국지 붕괴까지 남은 시간: 00:02:17]
민우는 숨을 들이켰다.
"이게 무슨."
힘을 쓰면 지구가 무너진다.
그럼 이걸 왜 준 건데.
코어에서 검은 파편이 쏟아졌다. 하나가 민우의 뺨을 스치며 뒤편 선반을 녹였다.
상태창이 새 문장을 띄웠다.
[최소 개입 권장]
[주변 잔류 마력의 재배열이 가능합니다]
[직접 출력은 권장하지 않습니다]
친절한 설명은 없었다.
민우는 눌린 손을 빼려다 멈췄다. 손목에 걸린 철제 결속끈이 보였다. 선반을 묶던 가는 끈이었다.
그는 결속끈을 잡았다.
이상하게도 코어에서 새어 나온 마력이 실처럼 보였다.
파랗고 검은 실들이 창고 안을 헤집고 있었다. 하나는 출구로 향했고 하나는 천장 균열을 타고 바깥으로 뻗었다.
민우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실을 자기 힘으로 끊는 건 쉽다.
손가락 하나를 까딱하는 것만으로도 이 창고와 균열을 통째로 지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얼마나 망가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99%라는 숫자는 장난처럼 보이지 않았다.
민우는 이를 악물었다.
0.01%도 쓰지 않는다.
자기 안의 것을 꺼내지 않고 여기 이미 흩어진 것만 쓴다.
그는 가장 얇은 마력 실에 결속끈을 걸었다.
"부서지지 말고."
말이 끝나자 결속끈이 미세하게 울렸다.
민우는 창고 바닥의 푸른 이끼를 보았다. 들개 사체 곁에 흩어진 마나석 가루도 보였다. 선반 아래 스며든 잔류 마력까지 실처럼 풀려 나왔다.
그는 그것들을 하나씩 결속끈 쪽으로 끌어당겼다.
자신의 마력은 아니었다.
이미 게이트 안에 고여 있던 것들이다.
그런데도 손끝이 타들어 갔다. 마력이 흘러야 할 길을 바꾸려 하자 쇳물이 혈관을 훑는 듯했다.
첫 번째 실이 결속끈을 따라 코어로 되돌아갔다.
쿵.
코어가 다시 뛰었다.
민우의 손등이 찢어졌다. 하지만 이번 박동은 균열을 넓히지 않았다. 출구로 기어가던 검은 줄이 멈췄다.
그는 선반 기둥을 지지점으로 삼아 두 번째 실을 접었다.
세 번째 실은 바닥 균열에 묶었다.
마력이 새어 나오는 길이 하나씩 좁아졌다.
마지막 실을 붙드는 순간 균열 너머의 어둠이 민우를 바라봤다.
눈은 없었다.
그런데도 분명히 시선이었다.
낯선 의식이 균열 반대편에서 그의 이름을 더듬는 느낌.
민우는 손을 떨지 않았다.
"여긴 자리 없어요."
결속끈이 팽팽해졌다.
그가 손가락을 접자 코어의 균열도 종이처럼 접혔다.
창고를 흔들던 바람이 꺼졌다.
푸른 빛은 한 번 깜빡이고 사라졌다.
민우는 한참 뒤에야 선반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오른손은 피투성이였고 어깨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살아 있었다.
출구 쪽에는 오태식과 이현지가 서 있었다. 박준호는 다리를 절뚝이며 관리 요원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오태식의 표정이 먼저 굳었다.
"살아 있었네."
민우는 대답 대신 깨진 코어 조각 하나를 주웠다.
검은 금속처럼 굳은 파편이었다. 표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시야에 짧은 문장이 떠올랐다.
[차원 붕괴지 잔류물]
[정상 게이트 반출 기록 없음]
민우는 파편을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어떻게 나온 겁니까?"
관리 요원이 물었다.
민우는 무너진 창고를 돌아봤다.
"선반이 넘어졌습니다. 코어도 같이 무너졌고요."
오태식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희가 밖으로 뺀 직후에 끝났어요. F급이라 충격이 컸던 모양입니다."
그는 민우를 노려봤다.
입 다물라는 뜻이었다.
민우는 그 눈빛이 싫지 않았다. 관심받는 것보다야 나았다.
"보상은 계약대로죠?"
민우가 물었다.
오태식의 입가가 비틀렸다.
"짐도 못 나르고 사고 친 날인데 뭘 더 바라. 계약금만 받아."
"그걸로 됐습니다."
통제선을 벗어날 때 비는 거의 그쳐 있었다.
민우는 편의점 처마 아래에서 삼각김밥 하나를 골랐다. 계산대 앞에 섰을 때 상태창이 다시 떠올랐다.
[경고]
[서울 서부 하위 게이트 2곳에서 동종 균열 징후 감지]
[차원 과부하율: 99.01%]
[외부 균열 반응으로 과부하율이 상승했습니다]
민우는 계산대 위의 삼각김밥을 내려다봤다.
평범하게 밥 한 끼 먹는 일도 생각보다 어려워진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