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의 후손이 현대 무림을 씹어먹음

1화: 주칠 궤짝과 먼지 덮인 족보
시놉시스
밀린 체육관 월세를 막기 위해 외가의 빈집을 정리하러 온 서진우는 다락방에서 낯선 태극 문양이 새겨진 주칠 궤짝을 발견한다. 궤짝 안에는 서씨 집안이 전설의 태극검가와 이어져 있다는 족보와 정체불명의 호흡법이 잠들어 있었다.
서진우는 장부 맨 아래에 적힌 숫자를 한참 보았다.
석 달치 월세. 전기료. 수도요금. 그리고 보증금에서 밀린 돈을 빼겠다는 관리인의 문자.
구겨진 종이 위 숫자는 이상할 만큼 단정했다. 체육관 바닥의 낡은 매트보다도 더 정확하게 서태만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아빠. 이건 내가 들고 있을게."
"놔둬. 종이까지 네가 들면 무거워지냐?"
서태만은 웃으며 장부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접힌 부분을 더 단단히 눌러 주머니에 넣었다. 담배를 꺼내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가 빈손으로 내려왔다.
진우는 그 짧은 망설임을 모른 척했다.
외가의 대문은 녹슨 경첩을 끌며 열렸다. 마당 잡초는 무릎까지 자라 있었고 처마 밑에는 작년 제비집이 마른 진흙 덩어리처럼 붙어 있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비어 있던 집이었다.
"멀쩡한 건 남겨 두고 깨진 건 버리자. 고물상 아저씨가 오후에 온댔어."
서태만이 마당을 둘러보며 말했다.
"장독은요?"
"그건 누가 사 가겠냐. 뚜껑 깨진 것만 치우면 돼."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다. 하지만 진우는 안다. 지금 이 집에서 나오는 낡은 장식장 하나와 놋그릇 몇 개가 체육관 월세 하루 이틀을 늘려 줄 수도 있다는 걸.
체육관이 망하면 아버지는 다시 막일을 뛰겠다고 했다. 낮에는 공사장에 나가고 밤에는 체육관 문을 열겠다고. 그 말을 들은 날 진우는 아무 대답도 못 했다.
자신은 고등학생이었다. 몸도 약했고 공부도 아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집에 보탬이 되겠다고 편의점 야간 알바를 알아봤지만 아버지는 단칼에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더 답답했다.
"다락방은 네가 볼래? 나는 뒤쪽 창고부터 정리할게. 천장은 밟는 데만 밟아."
"알겠어요."
진우는 낡은 계단을 올랐다.
다락방 문에는 손바닥만 한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열쇠를 돌릴 때마다 삐걱대는 소리가 집 전체에 울렸다. 세 번째에야 잠금이 풀리며 먼지가 폭죽처럼 터졌다.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장롱 두 채와 깨진 액자, 곡식 자루, 이름 모를 상자들이 벽을 따라 빽빽했다. 햇빛은 작은 창 하나로 겨우 들어와 공중의 먼지만 밝게 비췄다.
진우는 휴대폰 손전등을 켰다.
"팔 만한 건 어디 있냐."
그는 혼잣말을 하며 상자를 열었다. 낡은 이불과 교과서, 이미 고장 난 라디오뿐이었다. 장롱 안쪽에는 예전에 아버지가 입었다는 검은 도복이 걸려 있었지만 소매가 좀에 먹혀 있었다.
도복 가슴에는 희미하게 지워진 태극 무늬가 남아 있었다.
진우는 잠깐 손을 멈췄다. 아버지는 젊을 때 동네 대회에 몇 번 나갔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입던 도복일 것이다.
하지만 물어볼 틈은 없었다. 아래층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아빠 괜찮아요?"
"화분 하나 깨졌다. 네 일 해!"
목소리는 멀쩡했다. 진우는 한숨을 삼키고 장롱을 밀었다.
장롱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바닥에 박힌 다리가 끼익거리며 나무판을 긁었다. 진우가 이를 악물고 한 번 더 밀자 장롱이 옆으로 비켜났다.
그 아래에서 다른 바닥이 나왔다.
다락방 전체는 짙은 갈색 나무판이었는데 장롱 밑 한 칸만 색이 옅었다. 못도 새것이었다. 누군가 오래전에 감추고 다시 덮은 자리처럼 보였다.
진우는 무릎을 꿇었다.
못머리 주변에는 긁힌 자국이 여러 겹이었다. 장롱을 움직인 사람은 자신이 처음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이 자리를 굳이 이렇게 숨겨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공구 상자에서 작은 망치와 일자드라이버를 가져왔다. 못 하나를 들어 올리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손바닥에는 먼지와 녹이 들러붙었다.
마지막 못이 빠지자 바닥판이 가볍게 들렸다.
눅눅한 흙냄새가 새어 나왔다.
빈 공간 안에는 붉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주칠 궤짝.
먼지로 탁해진 붉은 칠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그런데 뚜껑 한가운데의 문양만큼은 이상하게 또렷했다. 검은 선과 흰 선이 맞물린 태극이었다.
진우는 무심코 손가락을 댔다.
차가워야 할 나무가 미지근했다.
문양 아래에는 칼끝으로 얕게 새긴 네 글자가 있었다.
태극검가.
"검가?"
진우는 피식 웃었다. KMO 중계에서 듣던 명문가 이름들도 대개는 그룹 회장 집안 이야기였다. 남궁그룹이나 모용미디어 같은 곳은 뉴스에도 나왔다. 검가라니. 무협 소설 제목 같은 말이었다.
그런데 상자 옆면에는 서씨를 뜻하는 글자가 없었다.
집안 물건이라면 적어도 할아버지 이름 한 글자쯤은 있을 법했다. 궤짝은 낯선 사람의 유품처럼 조용했다.
뚜껑에는 작은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열쇠구멍은 녹으로 꽉 막혀 있었다.
진우는 포기하지 않고 드라이버 끝을 밀어 넣었다. 몇 번 비틀자 쇠가 손가락을 스쳤다. 검지 끝이 얇게 찢어졌다.
"아, 씨."
피 한 방울이 뚜껑의 태극 문양 위로 떨어졌다.
철컥.
손을 놓기도 전에 자물쇠가 풀렸다.
진우는 숨을 멈췄다.
드라이버가 돌아가서 열린 게 아니었다. 녹슨 고리가 혼자 아래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먼지가 가라앉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았다.
누군가 장치를 만들어 둔 것일 수 있다. 피에 반응하는 장치 같은 건 요즘도 영상에서 본 적 있다.
그런데 이 궤짝은 휴대폰보다도 오래돼 보였다.
진우는 마른침을 삼키고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기름종이로 싼 책 세 권과 두꺼운 족보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비단 끈은 바래 있었지만 매듭은 풀어지지 않았다. 궤짝 바닥에는 작은 은빛 패가 하나 놓여 있었다.
패에는 아까와 같은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진우는 가장 위의 책을 꺼냈다. 표지에 먹으로 쓴 글자는 번졌지만 읽을 수 있었다.
태극검가 비화록.
두 번째 책은 족보였다. 표지의 금박은 거의 지워졌지만 안쪽 종이는 놀랍도록 멀쩡했다.
그는 종이를 넘겼다.
처음 몇 장에는 서문이라는 성이 반복됐다. 이름 옆에는 검을 든 사람의 작은 인장이 찍혀 있었고 어떤 이름은 붉은 줄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다 중간부터 먹을 덧칠한 흔적이 나타났다.
서문이 지워지고 서가 되었다.
진우는 눈을 찌푸렸다. 한 글자를 가린 먹색은 세월에 바랜 다른 글자보다 훨씬 검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숨기기 위해 억지로 덮은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 장 가까이 넘기자 익숙한 이름들이 보였다.
서태만.
그 아래.
서진우.
글자 옆에는 작은 주석이 있었다.
태극검가 직계 종손.
진우의 손이 굳었다.
"우리 집이?"
목소리가 먼지 낀 천장에 부딪혀 작게 돌아왔다.
서태만은 늘 자기 집안을 별 볼 일 없는 시골 서씨라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떠돌이 무술가였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술자리에서 과장된 이야기 정도로만 들었다.
그런데 족보는 너무 구체적이었다. 아버지의 본관과 태어난 해, 자신이 태어난 병원의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
장난으로 만들 수 있는 문서가 아니었다.
진우는 비화록을 펼쳤다.
첫 장에는 다른 설명도 없이 문장 하나만 적혀 있었다.
태극검가 직계가 아닌 자가 이 글을 읽는 순간 혈맥이 끊기리라.
등골이 서늘해졌다.
읽기만 해도 죽는다는 말이 말이 되나 싶었다. 그런데 방금 전 자물쇠가 열린 순간을 떠올리자 비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다음 장에는 사람의 몸을 그린 그림이 있었다. 붉은 먹선이 배 아래에서 가슴과 팔, 목을 지나 이마까지 이어졌다. 옆에는 빽빽한 한자가 적혀 있었다.
[천극신수].
진우는 한자를 더듬어 읽었다.
하늘의 끝을 끌어들이고 몸의 막힌 문을 연다.
숨을 세 번 들이쉬고 한 번 멈춘다. 숨이 닿는 곳을 따라 의식을 옮긴다. 설명은 단순했다. 하지만 도형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 깊은 곳이 답답해졌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자세를 이제야 떠올린 기분이었다.
아래층에서 서태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우야! 컵라면이라도 먹고 하자. 해 진다."
진우는 얼른 족보를 덮었다.
"네. 금방 내려갈게요."
대답은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도 내려가면 아버지는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라면을 끓일 것이다. 내일이면 고물상에 물건을 넘기고 체육관 관리인에게 다시 며칠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상자를 나르는 것뿐이다.
진우는 비화록을 다시 내려다봤다.
태극검가. 직계 종손. 천극신수.
전부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믿는다고 당장 월세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모른 채 덮어 버리면 평생 같은 자리에서 손만 쥐고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궤짝을 장롱 그림자 쪽으로 옮겼다. 족보와 비화록은 품 안에 넣었다. 아래로 내려가 아버지와 라면을 먹고 고물상에게 넘길 물건을 함께 정리했다.
서태만은 진우가 평소보다 조용한 것을 눈치챘다.
"왜 그러냐. 먼지 먹었어?"
"아뇨. 다락방에 옛 책이 좀 있던데요."
"책? 그 집엔 그런 거 많지. 할머니가 버리지 말랬던 건 건드리지 마."
"왜요?"
"그냥. 조상님 물건이라잖아. 나도 자세히는 몰라."
서태만은 젓가락으로 김치를 집으며 말을 흐렸다. 정말 모르는 표정이었다.
진우는 더 묻지 않았다.
해가 완전히 지고 아버지가 마당의 고장 난 수도꼭지를 보러 나간 뒤에야 그는 다시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휴대폰 손전등을 껐다. 창문 너머의 희미한 달빛과 낡은 전구 하나면 충분했다.
비화록은 마지막으로 같은 문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직계가 아니라면 읽는 순간 혈맥이 끊긴다.
진우는 손가락의 얕은 상처를 내려다봤다. 이미 피는 멎어 있었다.
"맞으면 죽는다는 소리잖아."
입으로 내뱉으니 더 어처구니없었다.
하지만 궤짝은 자신의 피에 열렸다. 족보에는 자신의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도형을 바라볼 때마다 몸 어딘가가 아주 작게 반응했다.
확인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진우는 다락방 한가운데 앉아 다리를 꼬았다. 도형에 그려진 대로 허리를 세웠다. 어깨에 들어간 힘을 뺐다.
첫 번째 숨은 짧았다.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고 가슴은 금세 답답해졌다. 그는 중간에 멈출 뻔했지만 이를 악물었다. 체육관 바닥을 닦으며 들었던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버티는 놈이 마지막까지 선다.
그 말이 지금만큼 싫었던 적은 없었다. 버티기만 해서 달라진 게 없었으니까.
진우는 두 번째 숨을 더 깊게 들이마셨다.
배 아래가 서늘해졌다. 그 서늘함은 이내 얇은 실처럼 척추를 타고 올랐다. 착각이라고 생각한 순간 손목 안쪽이 화끈 달아올랐다.
태극 문양과 닮은 희미한 빛이 피부 아래에서 한 번 번졌다.
진우의 눈이 커졌다.
쿵.
심장 박동과는 다른 울림이 손목에서 터졌다.
그 울림은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