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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보는 전설의 골잡이1화

미래를 보는 전설의 골잡이

미래를 보는 전설의 골잡이

0001화 머리를 맞은 날

초여름 햇빛이 보조경기장의 하얀 라인을 지워 버릴 듯 내려앉았다.

강도윤은 벤치 끝에 앉아 축구화 끈을 세 번째 고쳐 묶었다. 매듭은 처음부터 단단했다. 손가락이 할 일을 찾지 못해 같은 자리를 만질 뿐이었다.

전광판에는 후반 22분과 0대 0이 떠 있었다.

성남 유나이티드 유스의 최종 선발전. 오늘 성적표가 나오면 다음 달부터 누가 이 운동장을 쓸 수 있는지 정해진다.

도윤의 이름은 아직 명단 밖이었다.

"강도윤."

박 코치가 턱으로 터치라인을 가리켰다.

"몸 풀어. 후반 막판에 넣는다. 길게 줄 시간은 없다."

"네."

대답은 빨랐지만 다리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길게 줄 시간이 없다는 말은 코치가 늘 하던 말이었다. 오늘은 유난히 정확했다. 도윤에게 남은 시간도 길지 않았다. 지난주 면담에서 코치는 다음 시즌 계약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이번 테스트에서 눈에 남는 장면을 만들지 못하면 방출 명단의 맨 아래쯤에 도윤의 이름이 놓일 터였다.

그는 벤치 뒤에 둔 가방을 힐끗 봤다. 아침에 어머니가 몰래 넣어 둔 김밥이 있었다. 뚜껑 안쪽에 붙은 메모도 기억났다.

오늘은 네가 제일 빛날 거야.

도윤은 그 말을 보자마자 메모를 떼어 주머니에 넣었다. 어머니에게는 팀에 남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 뒀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가능성은 있었다.

다만 골문보다도 작았다.

"형."

옆에서 종아리를 늘이던 박민재가 고개를 들었다. 같은 나이였고 같은 스트라이커였다. 이번 시즌 도윤보다 두 배 많은 경기에 나갔으며 오늘도 선발 원톱이었다.

"열 분이면 되겠네."

민재가 피식 웃었다.

"그 정도면 형도 마지막 인사는 할 수 있겠다."

도윤은 대꾸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재의 말이 거슬린 것은 아니었다. 너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였다.

그는 골대 뒤쪽으로 뛰어가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잔디 냄새와 스프링클러의 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관중석에는 학부모와 유스 관계자 몇 명이 흩어져 있었다. 그중 회색 재킷을 입은 남자가 수첩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박 코치가 옆에 있던 스태프에게 낮게 말했다.

"서울 새벽고래 쪽에서 왔다더라. K2는 당장 뛸 애를 찾는다던데."

도윤의 귀가 그 말에 붙들렸다.

서울 새벽고래 FC. 2부 리그 팀이었다. 화려한 이름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문은 하나였다. 유스에서 밀려나면 축구를 계속할 수 있을지조차 장담하기 어려운 도윤에게는 그 이름이 유럽 명문보다 가까웠다.

"도윤아, 준비!"

그는 대답 대신 속도를 올렸다.

후반 31분, 교체 보드에 19번이 떴다.

도윤은 손바닥으로 유니폼 앞면을 한 번 쓸었다. 등판의 이름이 땀에 달라붙었다. 터치라인을 넘는 순간 박 코치가 짧게 말했다.

"박스 안에서만 놀지 마. 너는 공 없을 때가 더 낫다."

칭찬인지 위로인지 모를 말이었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잔디 위로 들어갔다.

첫 공은 좋지 않았다.

오른쪽 측면에서 낮은 패스가 들어왔다. 도윤은 등을 지고 받아 내려고 했지만 상대 센터백의 손이 먼저 등에 닿았다. 균형이 흔들리는 사이 공은 발등을 벗어났다.

"압박!"

상대가 공을 걷어 냈다. 도윤은 돌아섰지만 이미 수비 라인이 정리된 뒤였다.

두 번째 공에서는 민재가 손을 들었다.

"여기!"

도윤은 골문을 등진 채 잠깐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민재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꽂혔다. 그는 황급히 옆으로 내줬다. 민재는 한 번 접고 왼발 슛을 날렸다.

공은 골키퍼 정면으로 굴러갔다.

민재는 혀를 차며 도윤을 노려봤다.

"더 빨리 줬어야지."

도윤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변명이 아니라 한 번의 기회였다. 그러나 경기 시계는 이미 후반 37분으로 향하고 있었다.

상대 수비가 걷어 낸 공이 다시 오른쪽으로 흘렀다. 윙어가 크로스를 올릴 준비를 하자 도윤은 박스 중앙으로 달렸다. 민재도 같은 쪽으로 파고들었다. 두 사람의 동선이 겹쳤다.

공이 높게 솟았다.

도윤은 더 높이 뛰기 위해 팔을 휘둘렀다.

그때 상대 센터백의 팔꿈치가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찍었다.

쿵.

소리가 귀 안쪽에서 울렸다.

눈앞이 새하얘졌다. 몸은 잔디에 떨어졌는데 공은 여전히 허공에 멈춘 것처럼 보였다. 심판의 호루라기가 멀리서 들렸다.

"괜찮아?"

누군가의 목소리가 물속처럼 일그러졌다.

도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짚고 고개를 들었다.

공이 두 개였다.

하나는 아직 공중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오른쪽 페널티아크 바깥 잔디 위에 있었다.

도윤은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두 번째 공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공에서 잔디까지 가느다란 푸른 선이 이어졌다. 선은 한 번 튀고 옆으로 휘어 상대 미드필더의 발끝으로 향했다.

환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몸은 이미 움직였다.

도윤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심판이 경기를 이어 가는 사이 실제 공이 푸른 선이 그린 자리로 떨어졌다. 상대 미드필더가 발목을 꺾어 앞으로 밀려는 순간 도윤이 먼저 발끝을 들이밀었다.

툭.

공이 도윤의 발등에 걸렸다.

상대의 발이 허공을 가르며 지나갔다. 도윤은 자신도 놀란 채 공을 끌어 왼쪽으로 돌렸다. 이번에는 상대 풀백의 어깨가 안쪽으로 기울었다. 그가 어디를 막으려 하는지 알기 전에, 그 다음 동작이 희미한 선으로 겹쳐 보였다.

도윤은 반대쪽으로 치고 나갔다.

"도윤아!"

벤치 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그는 중앙까지 공을 몰고 들어갔다. 민재가 다시 손을 들었다. 도윤은 잠시 망설이다 패스했다. 민재의 슛이 골키퍼 품에 안겼다.

아쉬움보다 이상한 확신이 먼저 올라왔다.

방금 본 건 우연이 아니었다.

도윤은 숨을 고르며 손등으로 땀을 닦았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푸른 선은 사라졌지만 상대가 공을 잡자 다시 나타났다. 공 하나와 사람 하나의 움직임이 아주 짧게 앞서 겹쳤다. 한 걸음. 겨우 한 걸음 먼저 아는 정도였다.

그런데 축구에서 한 걸음은 컸다.

도윤은 다음 패스를 노렸다. 상대 수비형 미드필더가 고개를 들었다. 푸른 선이 왼쪽 측면으로 길게 뻗었다. 그는 이번에는 자신 있게 달려들었다.

너무 빨랐다.

실제 공은 잔디에 한 번 더 튄 뒤 출발했다. 도윤의 발끝은 텅 빈 공간을 찼고 공은 그의 뒤로 지나갔다.

"야!"

상대 윙어가 공을 받아 전력으로 질주했다. 도윤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보인다고 해서 닿는 것은 아니었다. 머릿속의 선만 믿고 먼저 뛰면 몸이 공을 놓친다. 지금의 다리는 후반 40분을 막 넘긴 다리였다. 선이 아무리 정확해도 발목이 그보다 빨리 돌아가지는 않았다.

상대 윙어가 페널티박스 쪽으로 파고들었다. 도윤은 뒤에서 따라붙으며 억지로 다음 장면을 보려 하지 않았다. 어깨의 높이와 시선만 봤다. 윙어의 왼발이 공 옆으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접는다.

이번에는 눈이 아니라 몸으로 읽었다.

도윤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몸을 낮췄다. 윙어가 안으로 꺾는 순간 긴 다리를 뻗었다. 공이 정강이에 맞고 터치라인 밖으로 튀었다.

거친 숨이 목을 긁었다.

박 코치가 멀리서 주먹을 쥐었다. 회색 재킷의 남자는 수첩을 덮지 않았다. 대신 도윤을 보며 펜 끝을 멈췄다.

도윤은 잔디에 손을 짚고 일어났다. 머리는 아팠지만 방금 전보다 선명했다.

미래를 쫓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미래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게 지금의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추가시간은 2분.

성남 유나이티드 유스가 마지막 코너킥을 얻었다. 골키퍼까지 앞으로 올라오지는 않았지만 수비수 둘이 박스 안으로 들어왔다. 도윤은 페널티 스폿 부근에 섰다. 민재는 골문 가까운 쪽으로 붙었다.

"이번엔 내 쪽 봐!"

민재가 윙어에게 외쳤다.

도윤은 고개를 들었다. 오른쪽 코너 플래그 옆에서 공이 발등을 떠났다.

순간, 세상이 조용해졌다.

공의 궤적이 푸른 선으로 길게 번졌다. 니어 포스트 쪽으로 휘어 들어간 뒤 수비수의 어깨에 맞았다. 튄 공은 골문 정면이 아니라 골대와 페널티 스폿 사이의 좁은 빈 공간으로 떨어졌다.

도윤 앞에는 수비수 둘이 있었다.

선대로 달리면 늦는다.

그는 앞으로 뛰지 않았다.

오히려 반 걸음 뒤로 물러났다.

"뭐 해?"

민재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도윤은 보지 않았다.

크로스가 날아왔다. 민재가 몸을 날려 헤딩했다. 공은 골문 대신 수비수의 등 위를 때렸다.

튄 공이 도윤이 비워 둔 자리로 떨어졌다.

푸른 선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필요 없었다.

도윤은 오른발 인사이드로 공의 아랫부분을 짧게 밀었다. 힘을 줄 여유도 없었다. 골키퍼가 몸을 던지기 전에 공은 그의 손끝 아래를 지나 골라인을 넘었다.

철렁.

그물 소리가 운동장을 갈랐다.

도윤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심판이 중앙을 가리키는 손짓을 보고서야 두 팔을 벌렸다. 팀원들이 달려와 등을 쳤다. 누군가는 그의 머리를 헝클어 놓았다.

"미쳤다, 도윤아!"

"어떻게 거기 있었어?"

도윤은 대답할 수 없었다.

어떻게 거기 있었냐고.

그 질문의 답은 자신도 몰랐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1대 0. 짧은 출전 시간에 넣은 결승골이었다.

민재는 물병을 집어 들며 도윤 곁을 지나갔다. 축하한다는 말은 없었다. 도윤도 붙잡지 않았다. 가슴 안에서 들끓는 것은 복수심이 아니라 이상할 만큼 차가운 기쁨이었다.

이 한 골로 모든 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한 번 더 뛰어 볼 문은 열 수 있었다.

샤워실로 가려던 도윤을 회색 재킷의 남자가 불렀다.

"강도윤 선수."

남자는 명함을 내밀었다. 검은 글씨 아래에 서울 새벽고래 FC와 감독 서성우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K2리그 서울 새벽고래입니다. 다음 주 공개 테스트가 있어요. 와서 한 번 뛰어 보겠습니까?"

도윤은 명함을 받지 못한 채 남자의 얼굴을 봤다.

"저를요?"

"골만 보고 온 건 아닙니다."

서성우는 도윤의 다리를 한번 내려다봤다.

"뺏긴 뒤에 돌아오는 속도. 공이 떨어질 자리를 찾는 방식. 그건 가르친다고 바로 생기지 않아요. 다만 오늘은 머리를 다쳤으니 병원부터 가고요."

도윤은 그제야 명함을 쥐었다.

종이 모서리가 손바닥을 눌렀다. 현실감이 났다.

"가겠습니다."

대답은 이번에도 빨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겁이 나지 않았다.

서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도윤은 한참 명함을 내려다보다 운동장 밖으로 걸었다.

담장 너머에서 공 차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유스 팀 선수들이 작은 골대 앞에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누군가 세게 찬 공 하나가 담장을 넘었다.

도윤은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봤다.

공은 아직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는 이미 잔디 위로 떨어질 푸른 선이 그어져 있었다.

도윤은 멈춰 섰다.

관자놀이가 다시 욱신거렸다.

손안의 명함을 더 세게 쥔 채 그는 공이 떨어질 곳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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