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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종 직전, 망겜의 마왕으로 살아남는 법1화

섭종 직전, 망겜의 마왕으로 살아남는 법

섭종 직전, 망겜의 마왕으로 살아남는 법

1화: 섭종 10초 전

“진짜 끝이네.”

강현우는 침대에 엎드린 채 모니터 아래의 시계를 봤다.

자정까지는 12초가 남아 있었다.

화면 속 아카샤 대륙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성문 앞 광장에 늘어섰던 유저 상점도 없었다. 길드 채팅도 마지막 인사 몇 줄을 남긴 뒤 멎었다.

[아카샤 정식 서비스 종료까지 00:00:10]

붉은 숫자가 검은 하늘 한가운데 떠 있었다.

현우는 마우스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열 해 동안 주말을 통째로 삼켰던 게임이었다. 길드원들은 하나둘 떠났지만 현우는 보스 패턴과 숨은 통로를 외우며 남았다.

마지막 공지가 화면 위를 흘렀다.

[종료 기념 이벤트: 최종 보스 체험권을 모든 접속자에게 지급합니다.]

현우는 피식 웃었다.

“끝까지 장난은 치네.”

멸망의 마왕 아스타로트.

검은 산맥의 주인이자 아카샤의 최종 레이드 보스였다. 현우는 이 보스를 잡기 위해 삼백 번은 전멸했고 공략이 완성된 뒤에는 초보 길드의 연습을 도왔다.

이제 그 보스를 직접 조종하라고 한다.

현우는 망설이지 않고 버튼을 눌렀다.

[멸망의 마왕 아스타로트에 접속합니다.]

모니터가 검게 물들었다.

눈꺼풀이 닫힌 것도 아닌데 시야가 암흑에 잠겼다. 귓가를 긁는 낮은 종소리가 한 번 울렸다.

그다음 순간 현우는 백옥좌에 앉아 있었다.

시야가 너무 높았다. 발밑으로 길게 뻗은 검은 양탄자와 양옆에 선 석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손등에는 핏줄 대신 검은 문양이 흐르고 있었다. 손가락을 접자 검은 금속 장갑이 피부처럼 함께 움직였다.

“와. 연출은 좀 신경 썼네.”

목소리가 낯설었다.

낮고 무거운 음성이 넓은 대전을 울렸다. 현우는 헛기침을 하려다 멈췄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천천히 돌고 있었다. 마력 게이지라면 파란 막대 하나로 끝날 감각이 몸 안에서는 파도처럼 부딪혔다.

하늘에 떠 있던 숫자가 보였다.

현우는 종료 창을 기다렸다.

평소라면 검은 화면 뒤에 서비스 종료 안내가 떠야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 아래로 차가운 돌의 결이 느껴졌다.

현우는 숨을 들이켰다.

차갑고 습한 공기가 폐 안으로 밀려들었다. 촛농 냄새와 오래된 갑옷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 사이에 쇠 냄새가 짙었다. 피 냄새였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몸이 예상보다 무거웠다. 어깨 뒤로 무언가가 균형을 잡았다. 고개를 돌리자 검은 망토 아래로 뿔 달린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이건 뭐야.”

현우는 허공을 쓸었다.

메뉴를 열 때처럼 손가락을 튕겼다. 인벤토리 단축키도 떠올렸다. 로그아웃 아이콘이 있던 오른쪽 위를 노려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투명한 창도 체력 바도 없었다. 대전의 횃불만 바람도 없는데 흔들렸다.

쿵.

성 어딘가에서 둔탁한 충격음이 울렸다.

잠시 뒤 대전의 거대한 문이 안쪽으로 밀려 열렸다.

은발의 남자가 들어왔다. 검은 갑옷은 여러 군데 찢겨 있었고 왼쪽 어깨에서는 피가 흘렀다. 창백한 얼굴 아래로 드러난 송곳니와 붉은 눈동자.

제1군단장 제르엘이었다.

현우는 무의식적으로 패턴을 떠올렸다. 제르엘은 아스타로트 2페이즈에서 소환되는 호위 보스였다. 넓게 베는 검격을 피하면 체력이 절반쯤 깎이고 그때부터 마왕이 광폭화했다.

하지만 눈앞의 제르엘은 스킬을 쓰지 않았다.

그는 현우 앞까지 걸어오다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갑옷이 돌바닥을 긁었다.

“폐하.”

호칭 하나가 대전의 공기를 가라앉혔다.

“동문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이 숲에서 화살을 퍼붓고 있습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검을 쥔 손등만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현우는 입술을 다물었다. 게임에 없는 장면이었다. 이벤트 보스 체험권이라면 성문 앞 전장을 배경으로 보스 스킬을 시험할 수 있어야 했다. 제르엘이 상처를 입고 보고를 올리는 대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른 군단장은?”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동문에 남은 병사는 마흔이 채 안 됩니다.”

제르엘은 고개를 조금 더 숙였다.

“폐하께서는 지하 피난로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제가 남아 시간을 벌겠습니다.”

그 말에 현우의 시선이 멈췄다.

시간을 번다.

레이드에서 제르엘은 늘 먼저 죽었다. 유저들은 그의 검격을 끊기 위해 군단장을 우선 처치했다. 죽을 때마다 그는 정해진 비명과 함께 검은 입자로 흩어졌다. 현우도 그 장면을 수백 번 봤다.

지금 제르엘은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얼굴로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쿵.

이번 충격은 더 가까웠다.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안내해.”

제르엘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피난로로 말씀입니까?”

“성문으로.”

제르엘이 즉시 고개를 들었다.

“안 됩니다. 폐하께서 직접 나서실 일이 아닙니다.”

현우도 그 말에 동의하고 싶었다. 마왕성 밖에 뭐가 있는지도 이 몸으로 죽을 수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피난로부터 찾는 건 답이 아니었다. 메뉴도 없고 로그아웃도 없다면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사람에게 물어야 했다.

“직접 보고 판단한다.”

현우는 계단을 내려갔다.

발걸음이 돌바닥을 울릴 때마다 벽의 마법등이 하나씩 켜졌다. 제르엘은 말리지 못하고 한 걸음 뒤를 따랐다. 현우가 성문으로 향한다는 소식은 복도를 지나며 퍼졌는지 임프 하인들과 고블린 병사들이 벽에 붙어 길을 열었다.

그들의 눈에는 기대보다 공포가 먼저 담겨 있었다.

성문 앞은 더 심했다.

거대한 철문 한쪽이 안으로 휘어 있었다. 무너진 돌더미 사이에서 작은 임프 병사가 다리를 붙잡고 신음했다. 다른 병사 둘은 깨진 방패 뒤에 웅크린 채 밖을 노려보고 있었다.

성문 너머 숲은 밤보다 검었다.

그 어둠 속에서 은빛 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폐하!”

제르엘이 현우의 앞을 막아섰다.

현우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손끝에서 칠흑의 불꽃이 피어났다. 타오르는데 열기가 없었다. 불꽃은 화살을 삼키고 성문 바깥까지 뻗어 나갔다. 빛나는 화살은 소리도 못 내고 검은 재가 되어 떨어졌다.

몸 안의 뜨거운 파도가 한 번 크게 출렁였다.

[멸망의 광염]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름은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현우는 손을 내렸다. 성문 앞에 선 병사들이 얼어붙은 듯 그를 쳐다봤다.

그때 돌더미 아래의 임프가 기침을 했다.

“마왕님….”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현우가 가까이 다가가자 임프는 본능처럼 몸을 움츠렸다. 이빨을 악문 얼굴은 아직 앳됐다. 가죽 갑옷 아래로 흘러나온 피가 돌틈을 적시고 있었다.

체력 바는 없었다.

회복 물약도 없었다.

현우는 제르엘을 돌아봤다.

“왜 안 꺼내?”

“돌을 치우면 다시 화살이 들어옵니다. 적의 수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폐하를 노출할 수 없습니다.”

제르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병사 하나를 꺼내려다 둘이 더 죽을 수 있었다. 게임이라면 자동 회복을 기다리거나 부활 지점으로 보내면 됐다.

임프 병사의 손이 돌더미 위에서 허공을 더듬었다.

“저는… 아직 칼을 잡을 수 있습니다.”

현우의 머릿속에서 오래된 공략 문장이 떠올랐다. 임프 전령은 무시해도 되는 잡몹. 보스 방 입구까지 달리는 데 방해만 되는 몬스터.

그 문장을 생각한 자신이 갑자기 역겨웠다.

“제르엘.”

현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저 병사부터 꺼낸다.”

제르엘은 움직이지 않았다.

“폐하.”

“명령이다.”

짧은 말이었는데 대전에서 느낀 마력과는 다른 무게가 성문 앞에 내려앉았다.

제르엘의 붉은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곧 검을 꽂고 양손으로 돌더미를 붙잡았다. 다른 병사들도 뒤늦게 달려들었다.

성문 밖 어둠에서 두 번째 화살이 날아왔다.

현우는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검은 불꽃을 성문 위로 길게 펼쳤다. 불꽃은 부서진 철문을 감싸며 벽이 되었다. 화살은 검은 막에 닿자마자 녹아내렸다. 성문 틈으로 스며들던 바람까지 멎었다.

마력이 빠져나가자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게임에서 스킬 쿨타임을 기다릴 때와는 달랐다. 뼛속이 비어 가는 느낌이었다.

돌이 움직였다.

임프 병사가 끌려 나왔다. 다리는 기묘하게 꺾여 있었고 옆구리에는 깊은 상처가 났다. 하인 하나가 천 조각으로 피를 막으려 했지만 손이 떨려 제대로 묶지 못했다.

현우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병사는 마왕의 얼굴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죄송합니다. 성문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현우는 대답 대신 손을 상처 위에 얹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회복 스킬의 이름도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이 몸의 마력이 상처를 거부한다는 감각은 느껴졌다. 파괴만을 위해 만들어진 권능이었다.

그는 손안의 마력을 억지로 가늘게 눌렀다.

검은 불꽃 한 줄기가 피 묻은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병사가 비명을 삼켰다. 현우도 손을 뗄 뻔했다. 그러나 불꽃은 살을 태우지 않았다. 찢어진 살 가장자리를 천천히 끌어당겼다. 피가 멎고 꺾인 다리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병사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살려… 주셨습니까?”

현우는 그 질문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

이름조차 모르는 병사였다. 게임 안에서는 클릭 한 번으로 지워지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 아이는 살고 싶다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래.”

현우는 어렵게 말했다.

“그러니까 다음에는 성문 무너지기 전에 뒤로 빠져.”

임프의 눈가가 붉어졌다. 병사는 아픈 다리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연달아 숙였다.

제르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현우를 보는 눈빛은 조금 전과 달랐다. 전투 명령을 기다리는 부하의 눈이 아니었다. 오래 꺼져 있던 불씨를 발견한 사람의 눈이었다.

현우는 성문 위로 시선을 옮겼다.

검은 막 바깥의 숲은 고요했다. 화살을 쏜 자들은 물러난 듯했다.

하지만 숲의 가장자리 한쪽이 하얗게 번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안개인 줄 알았다. 곧 나뭇가지가 하얀 면에 닿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봤다. 잎의 초록도 흙의 검정도 남지 않았다. 누군가 거대한 지우개로 세계를 문지르는 것처럼 숲이 비어 갔다.

현우의 손끝이 굳었다.

종료 효과가 아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로그아웃은 없었다. 메뉴도 없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피를 흘렸고 죽음을 무서워했다.

그렇다면 저 흰 공백에 닿은 사람도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제르엘이 검을 바닥에 세웠다. 그는 성문 앞의 병사들과 하인들을 한 번 돌아본 뒤 깊이 고개를 숙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현우가 그를 봤다.

“무슨 명령을?”

“마왕성의 누구도 버리지 않겠습니다.”

제르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폐하께서 돌아오셨으니 제1군단은 끝까지 그 뜻을 지키겠습니다.”

현우는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자기가 한 말은 병사 하나를 꺼내라는 명령뿐이었다. 그런데 제르엘의 눈에는 그것이 이 성 전체를 향한 약속처럼 새겨져 있었다.

성문 밖의 흰 공백이 나무 한 그루를 더 삼켰다.

현우는 검은 불꽃이 남긴 벽을 바라봤다.

살아남으려면 우선 알아내야 했다. 여기가 어디인지. 저 흰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몸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다만 한 가지는 정해졌다.

“부상자부터 옮겨.”

현우는 성문을 등지고 말했다.

“창고와 식수 상태도 확인해. 살아 있는 놈부터 세고.”

제르엘이 검을 가슴에 댔다.

“명을 받듭니다. 마왕 폐하.”

그 호칭이 이번에는 낯설지 않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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