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당하고 주식으로 대박 났다

1화: 첫 번째 그래프
호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참에서 강현우는 걸음을 멈췄다.
서유리의 웃음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렸다. 내일이면 자신의 아내가 될 여자의 목소리였다.
현우는 손에 작은 반지 상자를 쥔 채였다. 유리가 예물 반지를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했다. 연회장 계약 잔금을 치른 뒤 데리러 와 달라는 말도 했다.
그래서 퇴근하자마자 셔츠를 갈아입고 호텔로 왔다.
그런데 계단 아래에서 들린 말은 반지와 어울리지 않았다.
"오빠, 진짜 내일 식장에 들어가야 해?"
"형식만 넘기면 되지. 네 아버지도 강현우 쪽 보증금이 아깝다잖아. 혼인신고만 안 하면 정리하기 쉬워."
윤준석의 목소리였다.
성우그룹 상무. 유리가 다니는 계열사에 수시로 얼굴을 비추던 남자였다. 유리는 그를 회사 선배라고 불렀고 현우는 그 말을 믿었다.
계단 틈으로 보인 유리의 손이 준석의 넥타이를 매만졌다.
"현우 오빠는 눈치가 없어서 괜찮아. 내가 좀 울면 또 미안하다고 하겠지."
반지 상자가 손바닥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현우는 한 계단씩 내려갔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유리의 눈이 커졌다. 준석은 놀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현우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딱 잘 왔네요. 우리도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현우는 유리만 보았다.
"방금 한 말이 뭐야?"
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하는 표정은 잠깐이었다. 준석이 곁에 서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유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 못 하겠어. 오빠랑 살 자신이 없어."
"준석 씨 때문이야?"
"그걸 꼭 말로 해야 해?"
준석이 자연스럽게 유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현우 씨도 성인인데 좋게 끝내죠. 유리가 불행해하는 결혼을 붙잡을 건 아니잖아요."
좋게 끝낸다는 말이 귓속을 긁었다.
현우는 둘 사이의 거리를 봤다. 삼 년 동안 자신이 믿은 것이 저 거리보다 얇았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선명했다.
"언제부터였어?"
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준석이 대신 말했다.
"그걸 알아서 달라질 게 있습니까?"
현우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유리의 말대로 눈치 없는 남자가 된다. 준석은 그 장면을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신혼집 보증금은? 내가 낸 돈이 천오백이야."
유리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계약 명의는 나야. 중개사님이랑 이미 얘기했어. 계약 깨면 위약금도 나가고 내 돈도 들어갔는데 왜 오빠 돈을 따로 계산해?"
"내가 보낸 이체 내역도 있는데?"
"결혼하려고 같이 쓴 돈이잖아. 예식장 위약금도 남았어. 다 내 탓으로 돌리겠다는 거야?"
현우는 휴대폰 화면을 떠올렸다. 유리가 계약 명의는 편한 쪽으로 해 두자고 했을 때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결혼할 사람인데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고 생각했다.
그 천오백만 원은 야근 수당과 적금 만기금이었다. 유리 부모가 예단을 조금만 더 신경 써 달라고 할 때마다 줄였던 식사와 택시비도 그 안에 있었다.
"네가 이럴 줄 알았으면 명의를 같이 했겠지."
유리는 차갑게 웃었다.
"그러니까 그게 오빠 한계야. 돈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 결혼만 하면 다 해결될 줄 알았어?"
준석이 낮게 웃었다.
"유리야. 말이 너무 세다."
말리기는커녕 만족한 얼굴이었다.
현우는 손의 반지 상자를 난간 위에 올려두었다. 금속 난간에 상자가 닿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그래. 끝내자."
유리가 무어라 불렀다. 현우는 돌아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낯설 만큼 창백했다. 내일 입을 예복은 집에 걸려 있었다. 식장에는 양가 친척들이 모일 예정이었다.
그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먼저 떠오른 것은 천오백만 원이었다.
그 돈을 유리는 처음부터 가져갈 생각이었다.
원룸으로 돌아온 현우는 불도 켜지 못했다.
신발을 벗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 휴대폰을 들었다. 유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수신음은 세 번 만에 끊겼다. 다시 걸자 이번에는 차단되었다는 안내가 흘렀다.
잠시 뒤 부동산 중개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강현우 씨 맞으시죠? 서유리 씨가 계약 해지 이야기 하셔서요."
현우는 벽을 짚고 일어섰다.
"반환금은 어떻게 됩니까?"
"계약서 명의자가 서유리 씨라 반환금은 그쪽 계좌로만 처리됩니다. 두 분 사이 정산은 따로 하셔야 하고요."
"제가 보낸 이체 내역이 있습니다. 계약금이랑 중도금 일부를 제가 냈어요."
수화기 너머로 난처한 숨소리가 들렸다.
"그 부분은 저희가 관여하기 어렵습니다. 계약 당사자끼리 정리하셔야 해요."
통화가 끊겼다.
현우는 한참 검은 화면만 바라봤다. 통장 잔액은 이천만 원이었다. 결혼식 직전까지 손대지 않으려던 돈이었다. 가구를 사고 남은 돈으로 제주도에 가자는 유리의 말 때문에 묶어 둔 자금이었다.
보증금은 사실상 사라졌다. 예식장 위약금도 남았다. 유리는 내일 내용증명을 보내고 이천만 원마저 자기 몫이라고 우길지 모른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현우는 노트북을 켰다. 계좌 이체 내역을 날짜별로 내려받았다. 송금 메모에 적은 신혼집 계약금이라는 문구도 보관했다. 유리와 나눈 대화에서 명의 이야기가 나온 부분을 캡처했다.
파일 이름을 바꾸는 손이 떨렸다.
증거를 저장한다고 해서 오늘 잃은 것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준석이 기다린 대로 무너질 것 같았다.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냈다. 한 캔을 비우고 두 번째 캔을 열었다.
"눈치가 없어서 괜찮아."
유리의 목소리가 자꾸 되살아났다.
현우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휴대폰을 켰다. 습관처럼 코인 거래소 앱을 눌렀다. 몇 달 전 유리가 친구에게 비트코인으로 수익을 냈다는 말을 듣고 계정을 만들었지만 실제 거래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뉴스 화면에는 비트코인이 다시 반등할 거라는 기사가 떠 있었다.
그때 화면이 번쩍였다.
흰 바탕의 차트 위로 붉은 선 하나가 겹쳐졌다.
현재가에서 시작한 선은 짧게 위로 솟았다. 그러더니 보이지 않는 벼랑을 만난 것처럼 아래로 꺾였다. 새벽 공기처럼 차가운 골짜기를 찍은 뒤 한참 뒤에야 다시 올라갔다.
현우는 눈을 비볐다.
그래도 붉은 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차트 오른쪽에 낯선 글자가 떠 있었다.
[BTC/KRW 예상 변동]
[관측 범위: 24시간]
지금의 캔들 그래프와 붉은 선이 만나는 지점은 정확히 현재가였다. 붉은 선은 새벽 두 시 십이 분에서 벼랑처럼 떨어져 있었다.
"뭐야, 이게."
현우는 앱을 껐다가 다시 켰다. 화면은 그대로였다.
이더리움 차트로 옮기자 붉은 선의 모양도 바뀌었다. 완만하게 오르다가 작은 파도처럼 흔들리는 선이었다. 다시 비트코인을 누르자 급락선이 돌아왔다.
현우는 냉장고 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다. 술이 덜 깬 환각이라면 이쯤에서 사라져야 했다.
그는 알람을 새벽 한 시 오십 분에 맞췄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 날카로운 알람음에 몸을 일으켰다. 비트코인 가격은 붉은 선이 가리킨 경로를 따라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뉴스 기사 아래에는 매수 주문이 몰린다는 댓글이 빠르게 붙었다.
현우는 호가창을 보며 숨을 죽였다.
두 시 십이 분까지 열두 분.
유리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내일 오전에 내용증명 보낼 거야. 더 시끄럽게 굴지 마.]
현우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대신 메시지를 캡처해 증거 폴더에 저장했다. 유리가 보증금과 별개로 정산을 거부할 가능성까지 메모장에 적었다.
그리고 거래소의 선물 탭을 열었다.
아래를 향한 붉은 선은 여전히 선명했다.
이천만 원. 실패하면 그는 다음 달 월세부터 걱정해야 했다. 위약금이 확정되면 카드값도 감당하기 어렵다.
하지만 손에 쥔 돈을 지키기만 해서는 유리에게 빼앗긴 것을 되찾을 수 없었다.
현우는 주문 금액 칸에 이천만 원을 입력했다.
그 순간 붉은 선의 골짜기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현우의 손가락이 멈췄다.
화면 오류일 수도 있었다. 그는 금액을 오백만 원으로 바꿨다. 붉은 선은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이천만 원을 입력하자 선의 끝이 흐릿해졌다.
"내가 들어가면 바뀌는 건가."
현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능력은 정답지를 건네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주문이 커질수록 그 정답지부터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작은 금액으로 확인하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급락은 열한 분 뒤였다. 현우는 호가창의 얇은 매수벽과 선물 거래의 청산가를 번갈아 봤다.
전 재산을 한 번에 태우는 선택은 미친 짓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붉은 선이 보여 준 낙폭은 평범한 현물 거래로 뒤집을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현우는 청산가를 여러 번 확인한 뒤 레버리지 숫자를 백으로 올렸다. 이천만 원 전부가 증거금으로 잡혔다.
남길 여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준석이 정해 둔 무능한 사람으로 남을 생각도 없었다.
주문 방향은 숏.
거래 확인창이 떠올랐다.
[예상 청산가를 확인하십시오.]
손끝이 차가워졌다. 현우는 다시 한 번 붉은 선을 바라봤다. 가파른 낙하의 시작은 변하지 않았다.
유리는 자신이 울면 그가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다.
준석은 그가 가난해서 아무것도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
현우는 확인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급락까지 열한 분.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움직일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