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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전담 힐러가 되었다5화

악당 전담 힐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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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번호표를 뽑은 빌런들

강이현은 새로 받은 전용 단말의 첫 줄에 문장을 적었다.

진료실 안에서 총을 꺼내지 않는다.

그 아래에는 환자 이름과 증상과 발작 시각과 강화제 사용 여부가 차례로 들어갔다. 이현은 마지막 항목을 하나 더 만들었다.

번호표.

"이게 꼭 필요합니까?"

유라가 단말을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은 이름을 불러도 못 들은 척합니다. 숫자는 확인하겠죠."

"안 들은 척하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진료를 늦춥니다."

"얼마나 늦춥니까."

"규칙을 어긴 만큼요."

유라는 잠시 이현을 보았다. 그다음 네 줄을 복도 화면에 띄웠다.

첫째. 번호표가 없는 사람은 진료하지 않는다.

둘째. 진료실 안에서는 정숙한다.

셋째. 치료 중 무기를 소지하면 순서를 다시 받는다.

넷째. 환자를 위협하면 진료를 거부한다.

이현은 네 번째 줄을 보며 목이 말랐다.

"거부한다는 말이 너무 세지 않습니까."

"선생님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가능하면이라고 했습니다."

"가능하면은 규칙에 넣지 않는 편이 명확합니다."

유라는 이미 복도에 모인 조직원들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오늘부터 진료실 규칙이다."

조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이현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떠들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또 하나의 법이 되어 버렸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오늘 밤 열한 시. 창고문으로 나오십시오.

제가 당신을 꺼낼 수 있습니다.

단 혼자 나오셔야 합니다.

유라가 화면을 보았다.

"같은 번호인가."

"그렇습니다."

"추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중계기를 여러 번 갈아탔다."

"구조자입니까?"

"모른다."

유라는 무전기를 들었다.

"창고 통로 봉쇄. 외부 경계를 강화한다."

"진료실 안에는 총을 들고 들어오지 마십시오."

이현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환자들이 눈치채면 오늘 치료는 끝입니다. 바깥만 지키고 안쪽은 그대로 두십시오."

유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무전기에 말했다.

"진료실 내부 무기 사용 금지. 외부 경계만 강화한다."

무전기 너머에서 누군가 물었다.

"회장님 명령입니까?"

이현은 괜히 등골이 서늘해졌다.

"제 규칙입니다."

조직원들이 더 똑바로 섰다.

유라는 번호표 묶음과 무기 보관표를 탁자에 놓았다. 이현은 보관표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치료가 끝나도 오늘은 돌려주지 마십시오."

유라는 그 말까지 규칙에 넣었다. 진료실 앞의 빌런들은 자기 차례보다 무기 반환 시점을 더 심각하게 받아 적었다.

이현은 그것을 보며 자신이 병원을 만든 건지 교도소를 만든 건지 알 수 없었다.

진료실 앞에는 일곱 명이 줄을 서 있었다. 간격은 넓었지만 서로 총을 겨누지는 않았다.

첫 번째는 도식이었다. 손끝은 가늘게 떨렸고 얼굴은 밤새 잠을 못 잔 사람처럼 잿빛이었다.

두 번째 남자는 차례가 오기도 전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붕대를 감은 오른손에서는 검은 피가 번지고 있었다. 허리에는 짧은 권총이 매달려 있었다.

"비켜."

남자가 도식을 밀쳤다.

도식이 벽에 부딪혔다.

"번호표를 보여 주십시오."

"나는 여기 간부다."

"간부면 번호표가 필요 없습니까?"

남자의 손이 허리로 내려갔다.

유라가 움직이려 했지만 이현이 먼저 손을 들었다.

"총을 잡으면 오늘은 진료하지 않습니다."

"내가 죽어도?"

"총을 꺼내면 치료할 방법이 없습니다."

남자는 이를 갈았다.

"회장님께 말하겠다."

차무진의 스피커가 켜졌다.

"이미 듣고 있다."

복도 전체가 얼어붙었다.

이현은 남자의 손을 가리켰다.

"손 부상은 급하지만 도식 씨가 먼저입니다. 도식 씨는 호흡이 불안정합니다."

도식이 기침했다. 목 안쪽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이현은 도식 앞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강화제를 먹은 시간이 언제입니까."

"어제 저녁입니다."

"아침에 반 알 먹었군요."

도식의 눈이 커졌다.

이현은 손목을 잡았다. 회색빛이 천천히 번졌다.

도식의 회로 안쪽에서 눅눅한 벽과 기름 묻은 쇠문과 검은 장갑의 감각이 스쳤다. 작은 알약이 손바닥 위로 건너오는 장면이 뒤늦게 따라왔다.

"창고에서 받았습니까?"

도식의 회로가 크게 흔들렸다.

이현은 더 묻지 않고 새는 길을 감쌌다. 붉은 찌꺼기가 한곳으로 몰리지 않도록 흐름을 나누자 도식의 숨이 돌아왔다.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통증이 치고 올라왔다.

이현은 바로 손을 떼지 않았다. 도식의 마력은 잠깐 조용해진 뒤 다시 목 쪽으로 몰리고 있었다. 푸른 불꽃이 기도 가까이에서 흔들릴 때마다 도식의 숨이 짧아졌다.

"눈을 감지 마십시오. 제 목소리를 들으면서 숨을 세 번 나눠 쉬세요."

"하나씩 셉니까?"

"제가 셉니다."

이현은 회로가 새는 방향을 확인하며 낮게 숫자를 불렀다. 첫 번째 숨이 들어오고 두 번째 숨이 빠져나갔다. 세 번째 숨에서야 도식의 어깨가 내려갔다.

그때 이현은 약물의 잔향 안쪽에서 또 다른 감각을 읽었다. 누군가 약을 먹이는 동안 주변에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다들 창고 문과 복도 카메라를 먼저 보고 있었다.

이현은 그 장면을 붙잡지 않았다. 환자의 기억을 캐내는 건 치료가 아니었다. 그래도 창고라는 단어는 머릿속에 남았다.

"약물은 오늘부터 금지입니다."

"안 먹으면 일을 못 합니다."

"일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죽습니다."

도식이 고개를 숙였다.

그 옆에서 간부가 욕설을 내뱉었다.

이현은 고개를 들었다.

"정숙 규칙 위반입니다."

"환자 하나 살리면서 말도 못 하게 하나?"

"소리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게 병원이야?"

"지금까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규칙을 만드는 겁니다."

남자는 결국 권총을 풀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유라가 종이를 내밀었다. 08이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내가 여덟 번째라고?"

"순서를 다시 받았습니다."

이현은 도식의 손목에서 손을 놓고 간부를 보았다.

"환자를 밀쳤고 치료 중에 위협했습니다. 진료는 보류합니다."

남자가 몸을 일으키자 차무진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선생님이 거부한 치료를 강요하지 마라. 밖으로 나가서 번호표를 다시 받아."

간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현은 스피커를 향해 말했다.

"병원 안에서 협박하지 마십시오. 규칙만 설명하십시오."

잠시 뒤 차무진이 대답했다.

"규칙을 어기면 치료받지 못한다."

그 말에 복도에 있던 조직원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라는 08번 종이를 다시 회수해 맨 아래에 붙였다. 누구도 항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에 있던 조직원 하나가 자신의 번호를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뒤로 물러났다.

"다음 사람은 03번."

유라가 부르자 03번 환자가 입을 열었다.

"저는 무기를 두고 왔습니다."

"그럼 들어오십시오."

"정말 번호대로만 합니까?"

"응급이면 바뀝니다. 거짓말하면 다시 받습니다."

이현은 도식의 차트에 시간을 적었다. 치료 시작 시각과 호흡이 안정된 시각을 남겼다. 숫자를 적는 동안에도 문밖의 발소리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했다.

누군가 규칙을 지키고 있었다.

그 사실이 묘하게 불안했다. 말 한마디가 사람들의 손을 멈추게 하는 건 자신이 바라던 안전과 달랐다. 그래도 총구가 내려가고 환자가 숨을 쉬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밤 열한 시가 가까워졌을 때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창고문이 열립니다. 지금 나오면 살 수 있습니다.

이현은 유라에게 화면을 보여 주었다.

"확인하되 문은 열지 마십시오."

유라가 폐쇄회로 화면을 켰다. 창고 통로는 비어 있었다. 철문 앞 바닥에 손톱만 한 검은 물체가 놓여 있었다.

"기록 장치 같습니다."

유라의 손이 총으로 향했다.

"진료실 안에서는 무기 금지입니다."

유라는 손을 멈추고 무전기를 들었다.

조직원들이 방호 장갑을 낀 채 장치를 회수했다. 기록 장치가 격리 봉투 안에 들어오자 유라가 저장 목록을 확인했다.

진료실 배치도.

환자 번호 01부터 07까지.

이현의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우리 안쪽에서 찍은 자료입니다."

기록 장치에서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이현 씨. 누가 다음 환자가 될지 알고 싶지 않습니까."

유라는 곧바로 장치를 끄려 했다. 이현이 그녀의 손을 막았다.

"끝까지 들으십시오."

"위치를 알아내려는 유도일 수 있다."

"이미 위치는 알고 있습니다. 환자 번호까지 알고 있고요."

음성 뒤로 아주 작은 진동음이 섞였다. 이현은 그 소리를 듣고 눈을 찌푸렸다. 도식의 회로에서 느꼈던 금속성 마력이었다. 장치가 단순한 녹음기가 아니라 환자의 회로를 확인하는 도구일 가능성이 있었다.

유라가 화면의 파일 목록을 넘겼다. 가장 최근 파일의 시각은 이현이 전용 단말을 처음 켠 뒤였다.

"이 안에서 신호를 보냈습니다."

"환자 중 누군가 장치를 가지고 있었겠군요."

"확인하려면 모두 뒤져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진료는 끝입니다."

이현은 장치를 격리 봉투째 내려다보았다. 의심은 필요했지만 의심만으로 환자를 수색할 수는 없었다.

음성이 끊기자 진료실 안쪽에서 작은 금속음이 났다.

벽 쪽 대기 의자 아래에 사람이 하나 웅크리고 있었다.

대기 환자들이 자리를 바꾸는 사이 의자 밑으로 숨어든 모양이었다. 누구도 그가 언제 들어왔는지 보지 못했다.

남자는 검은 후드를 쓰고 있었다. 손목에는 번호표가 없었다.

"누구냐."

유라가 묻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회장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가 코트 안쪽에서 작은 금속 조각을 꺼냈다.

차무진의 등뼈 쪽에서 불꽃이 폭발했다.

"이현!"

이현은 남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회색빛이 금속 조각과 남자의 회로 사이로 파고들었다. 기록 장치와 같은 쇠 냄새가 났다. 남자의 가슴 안에는 차무진의 검은 결절과 닮은 매듭도 있었다.

남자의 회로는 병처럼 뒤틀린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얇은 선을 심어 놓았다. 선의 끝은 심장으로 가지 않고 손목의 금속 조각에 이어져 있었다.

"이걸 누가 넣었습니까."

"당신은 질문부터 하는군요."

"환자에게 필요한 질문입니다."

"저는 환자가 아닙니다. 전달자입니다."

"전달자는 번호표를 받지 않아도 됩니까?"

남자의 웃음이 멎었다.

이현은 손목을 놓지 않은 채 유라를 보았다.

"무기부터 확인하십시오. 손목의 금속 조각은 격리하고 환자의 몸에는 손대지 마십시오."

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직원들이 가까이 다가왔지만 아무도 남자의 몸을 억지로 뒤지지 않았다. 이현이 정한 순서가 이미 그들의 손을 묶고 있었다.

남자가 웃었다.

"역시 당신이군."

차무진의 불꽃이 다시 커졌다.

이현은 곧바로 손을 들었다.

"그만하십시오. 환자가 있습니다."

붉은 기운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이현은 후드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번호표가 없으니 치료하지 않습니다. 무기와 장치를 내려놓고 증상부터 기록하십시오."

"저는 치료받으러 온 게 아닙니다."

"그럼 나가십시오."

"나갈 수 없습니다."

"그건 제 문제가 아닙니다."

남자의 회로 안쪽에서 금속성 마력이 튀었다. 멀리 있던 차무진의 검은 결절이 다시 반응했다.

벽 위 화면에서 환자 번호가 하나씩 깜빡였다.

그리고 아무도 뽑지 않은 09번이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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