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가 약사는 탑 보상으로 병원비를 갚는다

3화: 조건부 처방전
동의 지연 시 발작 재개 예상 시간: 11분.
붉은 텍스트가 공중에서 모래시계처럼 흩어졌다. 11분이라는 숫자는 환자의 호흡이 다시 얼어붙기까지 남은 시간이었고 동시에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하는 침묵의 비명이기도 했다.
카이엘의 손목에서 다시 드르륵 소리가 났다. 관절 사이 마찰음이 아니라 피가 지나가는 통로에 얇은 얼음 가시가 돋아나는 소리였다. 검은 제복 장갑 위로 하얀 서리가 다시 피어올랐다.
"선택해라."
카이엘의 목소리는 벼랑 끝에서 긁히는 돌 같았다.
"이대로 내 맥이 얼어 약방이 닫히든가, 내 전담 약사로 서명하고 내일 아침까지 목숨을 연장하든가."
"둘 다 아닙니다."
서이린은 계약서를 조제대 위로 바짝 끌어당겼다. 양양하게 펼쳐진 검은 양피지 위에는 금색 먹으로 적힌 조항들이 빽빽했다. 이린은 펜을 잡는 대신 조제대 구석에 놓인 보라색 마력 시약 램프의 뚜껑을 열었다.
"뭐 하는 짓이지?"
카이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린은 대답 대신 보랏빛 불꽃을 계약서 하단으로 끌고 갔다. 은밀하게 칠해진 투명 마력 인장이 주황색으로 그을리며 숨겨진 세 줄의 문장을 드러냈다.
제작 조항 4조: 약사는 황실 의료조합의 승인 없이 본 계약의 치료 기록을 외부에 공개할 수 없으며 위반 시 대공령 의료채권 전액은 황실 법원으로 즉시 몰수된다.
제작 조항 7조: 약사가 환자의 지시를 거부하거나 처방에 실패할 경우, 약방의 자격은 상실되며 현실의 연계 채무는 상계 불능 상태로 이행된다.
리비아가 숨을 들이켰다.
"이건… 황실 의료조합의 봉쇄 문양이에요! 전 점주님이 살아계실 때도 저 문양이 찍힌 계약서에는 절대 서명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이린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약제비 심사를 할 때 가장 많이 보는 거짓말이 뭔지 아십니까?"
그녀는 카이엘의 푸른 눈을 똑바로 건너다보았다.
"정당한 치료비처럼 보이는 수수료 청구서 아래에 환자의 포기 각서를 숨겨 두는 겁니다. 이 계약서는 당신을 고치는 서류가 아니라 당신이 죽거나 실패했을 때 대공가의 의료 권리를 전부 황실에 넘기도록 짜인 압류 각서예요."
카이엘의 어깨가 단단히 굳었다. 장갑 안쪽의 서리가 움찔거리며 피어올랐다.
"황실 약사들이 짓는 미소 뒤에 저런 조항이 숨어 있었단 뜻인가."
"그리고 저를 위한 조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린은 7조 문장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제가 당신을 고치지 못하면 제 어머니의 병원비 상계권이 파기되는 구조예요. 환자를 인질로 잡고 약사를 협박하는 계약서에는 서명할 수 없습니다."
"그럼 이대로 맥이 얼도록 두겠다는 건가!"
시종이 참지 못하고 고성을 질렀다.
이린은 시종을 돌아보지도 않고 조제대 위 서리쑥과 흰계피를 다시 집어 들었다.
"아니요. 11분 안에 계약서를 고치고 당신을 한 번 더 안착시킬 겁니다."
"시간은 8분 남았다!"
"충분합니다. 리비아 씨, 아까 끓여 둔 무향 홍차의 따뜻한 물을 찻잔 두 개에 나누어 담아 주세요. 이번엔 흰계피를 가루 내지 말고 은실 뿌리의 즙액만 단 1방울 떨어뜨릴 겁니다."
리비아는 순간 머뭇거렸다. 이린이 전 점주가 쓰던 감정용 램프와 약재 도구를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이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서리로 변해 떨어지는 모습을 보자 리비아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은실 뿌리 즙액은 마력을 급격하게 증폭시켜요! 자칫하면 맥이 완전히 터질 수도 있어요!"
"달여서 쓰면 그렇습니다."
이린은 찻잔 받침 위에 서리쑥 잎을 깔고 그 위에 은실 뿌리를 짓이긴 즙액 1방울을 떨구었다. 잎사귀가 즙액을 흡수하며 은빛 섬유질로 변했다.
"하지만 서리쑥의 차가운 정유 성분이 즙액의 열기를 가두고 따뜻한 홍차가 그 껍질을 천천히 녹이게 만들면 피 속에서 마력이 급격히 터지지 않고 차례대로 풀어집니다. 단가만 낮추고 위험을 키우는 시럽보다는 이쪽이 안전해요."
이린은 찻잔을 들고 카이엘 앞으로 다가갔다.
"마시기 전에 조건부터 바꿉니다."
"내게 조건을 제시하는 약사는 네가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살아남은 약사는 없었다."
"살아남지 못한 건 그 약사들이 황실의 돈이나 당신의 권력에 묶였기 때문이겠죠. 저는 어머니의 병원비를 갚아야 하고 그러려면 환자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린은 펜을 들어 계약서 하단의 숨겨진 독소 조항 4조와 7조 위로 굵게 빗금을 그었다. 조제용 깃펜 끝에서 푸른 마력 선이 그어지며 양피지가 가볍게 타올랐다.
독소 조항 삭감 처리.
정산 창이 붉은 문자를 띄웠다.
경고: 계약서 임의 수정은 시스템 오류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오류가 아니라 정산입니다."
이린은 정산 창을 향해 단호하게 중얼거린 뒤 새 조항 두 개를 적어 내려갔다.
수정 조항 1: 전담 약사는 환자의 완전한 알 권리를 보장하며 환자의 동의가 없는 성분 불명의 처방을 전면 거부할 권리를 갖는다.
수정 조항 2: 환자는 약사의 정당한 처방 지시를 이행해야 하며 약사는 독단적 의료 행위로 인한 손해를 환자에게 전가하지 않는다. 계약 기간은 90일로 하되 임시 서명 시 1개월분 병원비 상계권을 우선 발동한다.
카이엘은 빗금이 그어진 양피지와 이린이 새로 쓴 문장을 번갈아 보았다.
"환자의 동의 없는 처방을 거부한다라."
"황실 약사들이 준 시럽을 마시고 맥이 얼어붙었던 건 당신도 원인 성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주주의 동의 없는 투자는 배임이고 환자의 동의 없는 처방은 독약입니다."
카이엘의 입꼬리가 아주 희미하게 올라갔다. 냉소였지만 그 속에는 이린을 향한 깊은 흥미가 담겨 있었다.
"너는 참 이상한 약사로군. 목숨을 구걸해야 할 처지에 내 권리를 먼저 챙겨 주다니."
"당신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내 노동의 대가도 투명해지니까요."
이린은 수정된 계약서와 2차 차를 동시에 내밀었다.
"잔을 들고 마십시오. 3분이 남았습니다."
카이엘은 잠시 이린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펜을 오래 쥐어 약간 굳은살이 배인 손, 떨리지 않는 눈빛 그리고 환자의 맥박을 확인하던 냉정한 감각.
그는 검은 장갑을 낀 손을 올려 찻잔을 잡았다. 서리쑥 잎 위에서 맴돌던 은실 뿌리의 향이 따뜻한 홍차 김을 타고 그의 숨통으로 들어갔다.
차 한 모금이 목을 넘어가는 순간 카이엘의 가슴 안쪽에서 쩡 하는 소리가 울렸다. 얼음 호수에 균열이 가듯 차가운 마력의 덩어리가 얇게 부서지는 소리였다.
"윽!"
카이엘이 찻잔을 쥔 채 몸을 숙였다. 시종들이 놀라 검을 잡으려 했으나 이린이 손을 들어 막았다.
"건드리지 마세요! 피 속에 갇혀 있던 차가운 노폐물이 빠져나오는 과정입니다!"
카이엘의 호흡이 거칠게 이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숨을 쉴 때마다 입가에서 나오던 하얀 서리 김이 투명한 수증기로 변했다. 장갑 끝까지 번졌던 흰 금이 점차 옅어지며 단단하게 굳었던 관절이 부드럽게 풀렸다.
카이엘은 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동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푸르스름한 정맥 마비 흔적이 사라져 있었다.
"…피가 움직인다."
그의 목소리에서 긁히는 소리가 사라지고 본래의 낮고 깊은 울림이 돌아왔다.
임시 처방 2차 로그 완료.
증상: 빙결성 혈류 정지 2단계 안착.
결과: 발작 완전 진정 48시간 확보.
정산 창이 맑은 옥빛으로 바뀌며 팝업을 띄웠다.
백은 약방 영업권 반납 보류 신청 승인.
Ledger-Gate-1F-Apothecary 원장 동결 해제.
리비아의 손에서 약재 도구가 툭 떨어졌다.
"영업권 반납이… 멈췄어요! 약방 문에 붙어 있던 붉은 봉인이 사라졌어요!"
리비아는 약방 문 쪽을 바라보며 눈을 넓게 떴다. 자정이면 쫓겨날 줄 알았던 약방이 여전히 온기를 품은 채 눈보라를 막아서고 있었다.
카이엘은 찻잔을 내려놓고 조제대 위의 수정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90일이다."
"예?"
"네가 요구한 90일 임시 계약. 승인하겠다."
카이엘은 검은 장갑을 벗었다. 얼음꽃 문양이 수놓아진 손등 위로 푸른 마력이 솟아오르더니 양피지 하단에 깊은 인장을 남겼다.
이린 역시 조제 펜 끝으로 자신의 이름을 정갈하게 적었다.
서이린.
두 사람의 이름이 계약서 위에서 금빛 문양으로 얽혀 들자 공중에 떠 있던 정산 창이 거대한 빛의 장부 형태로 펼쳐졌다.
전담 약사 임시 계약 성립.
계약자: 카이엘 루브렌 / 서이린.
보상 확정: 현실 병원비 1개월분 선상계 발동.
상계 대상: 도원종합병원 한미라 환자 차기 투약 보증금 및 미납 치료비 18,640,000원 중 1개월 확정분.
이린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현금 뭉치가 손에 쥐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달 어머니의 목을 죄어 오던 삭감 고지서의 한 줄이 마침내 지워졌다는 확신이 온몸을 감쌌다.
"이걸로 1개월은 버틸 수 있어."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 이린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손가락 가장자리가 유리처럼 투명해지며 벽 뒤의 약재장이 겹쳐 보였다.
"약사님? 손이…!"
리비아가 놀라며 외쳤다.
카이엘도 눈을 가늘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흩어지고 있군. 이게 네가 말한 사정인가?"
"체류 제한 시간이 다 된 겁니다."
이린은 투명해져 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루 12시간. 탑의 세계에 머무를 수 있는 시한이 끝나 가고 있었다.
"48시간 동안은 발작이 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서리쑥과 홍차의 기운이 떨어지면 다시 차가운 기운이 모일 테니 차를 매일 같은 시간에 한 잔씩 복용하세요."
"어디로 가는 건가?"
카이엘이 이린의 소매 끝을 잡으려 했으나 그의 손가락은 공중을 그대로 통과했다.
"제 현실로 돌아갑니다."
이린은 찌릿한 시공간의 진동을 느끼며 카이엘과 리비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48시간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동안 찻집의 상담 기록 대장을 정리해 두세요. 당신의 저주와 이 약방의 장부에 얽힌 다른 청구서들을 찾아내야 하니까요."
약방의 풍경이 물에 젖은 수묵화처럼 흐려졌다. 눈발 소리가 멀어지고 대신 사무실 형광등의 미세한 위잉 소리와 서울 거리의 경적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이린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아르켄 제국의 백은 약방 조제대가 아니었다. 서울의 야근 사무실, 책상 위에 놓인 흰 상자와 켜진 모니터 앞이었다.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린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병원 원무과 애플리케이션에 접속해 한미라의 미납금 항목을 열었다.
화면 상단에 붉은색으로 떠 있던 18,640,000원의 미납금 수치가 실시간으로 갱신되고 있었다.
[보상 상계 완료] 도원종합병원 한미라 환자 1개월분 치료비 및 차기 발주 보증금 정산 완료. (잔여 미납금: 0원 / 차기 투약 정상 진행)
상계 출처: 탑 보상 특별정산 원장 Ledger-Gate-1F-Apothecary
이린의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올랐다.
꿈이 아니었다. 환각도, 해고자의 미련도 아니었다. 저 낯선 세계의 계약서에 적은 서명이 정말로 어머니의 목숨을 이어 주고 있었다.
그때 이린의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윤도겸: 이린아, 원무과 시스템 이상하다. 한미라 어머니 미납금이 전액 처리 완료로 바뀌었어. 대체 무슨 일이야?
이린은 모니터 옆에 남은 잔상, 옅은 서리 향과 무향 홍차의 냄새를 맡으며 조용히 화면을 그어 내렸다.
이제 진짜 정산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