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48화: 멸망의 역사적 증거
[LOCATION: EARTH-FINAL - UNDERGROUND RETURN VAULT ACCESS]
[TIME: NIGHT / BIOLOGICAL PULSE TRACING]
지상 본성 코어의 가공 공간 아래로 수직 침하하는 원형 통로는 어둡고 아득했다.
검은 금속벽을 따라 이어진 가느다란 고대 배관에서 수천 년 묵은 푸른 냉각 가스가 불규칙한 소음을 뿜으며 흘러나왔다. 발키리 프레임의 부스터를 미세하게 부화시키며 내려가는 이안의 시선 끝에 수백 미터 지하 깊은 곳에서 느리게 맥박 치는 사파이어빛 불빛이 잡혔다.
쿵.
쿵.
그것은 전송 캡슐 수신정의 기계적 구동음이나 나노 입자의 잔여 마찰음이 아니었다. 명확하게 체온과 피를 품은 생명체의 규칙적인 심장 박동이었다.
"이안, 벽면의 마도 회로 반응이 이 통로 바닥으로 갈수록 밀집되고 있어요."
리아가 지팡이 끝에 푸른 마도 빛을 밝힌 채 공중에 떠서 조용히 하강했다. 그녀의 지팡이 주위를 감싸는 푸른 입자들이 통로 벽의 고대 절연막과 접촉하며 연신 하얀 불꽃을 일으켰다.
"보증 기준 연도가 수천만 년 전이에요. 그런데 이 지하 구역만 물리적 시간이 다르게 흐른 것처럼 시스템이 완벽하게 살아 있어요."
A-09는 이안의 발키리 프레임 등 장갑에 꼭 달라붙어 하강하며 가슴의 접속 단말을 세게 움켜쥐었다. 단말에서 흘러나오는 사파이어빛 파동이 맥박의 주파수와 정확히 일치하며 펄스 모양으로 튀어 올랐다.
"울림이 가까워지고 있어요. 세라프 님의 메인 프레임에서 들었던 소리와도 닮았지만 훨씬 더 아프고 묵직해요."
"오르페우스는 방주 출항 직전 이곳에 비상 귀환 캡슐을 남겼다고 했다. 마지막 승무원의 생체 응답이 남아 있다는 건 누군가 캡슐을 안에서 잠그고 오늘날까지 견뎌 왔다는 뜻이지."
이안의 전술 센서가 정면 하방 200미터 지점에서 거대한 육중한 중장갑 격벽을 감지했다.
[WARNING: RESTRICTED ARCHIVAL ZONE]
[RELICT DEFENSE TURRETS ACTIVATING]
벽면의 검은 절연판이 좌우로 갈라지며 오래된 충격파 포탑 네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위상 오염에 물든 기계는 아니었으나 오랫동안 외부 진입자를 엄격히 차단해 온 자동 보안 체계였다. 포구 끝에서 청백색 플라즈마 전하가 이온화된 불꽃을 뿌리며 모여들었다.
"비켜라. 우리는 보조 항법 권한을 확인하러 왔다."
이안이 대검의 날을 비스듬히 세우고 스루 추진을 밟았다. 청백색 플라즈마 포탄 세 발이 직선으로 쏟아져 내렸다.
[LOCATION: EARTH-FINAL - RETURN CAPSULE CHAMBER 00]
[TIME: NIGHT / BIOLOGICAL SEAL UNLOCKING]
콰아앙!
플라즈마 탄환이 발키리 프레임의 흉부 충격 흡수판을 때리며 찢어지는 파편 불꽃을 일으켰다. 이안은 충격을 무릎으로 흡수하며 대검을 가로로 회전시켰다. 퀀텀 절단 휠이 푸른 호선을 그리며 오른쪽 포탑 두 개의 포신을 깔끔하게 잘라냈다.
남은 포탑 두 개가 다시 전하를 충전하려 하자 리아가 지팡이를 공중에 세게 꽂았다.
"마도 결계, 정전기 포박!"
지팡이 끝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마력 고리가 공간을 휘감았다. 포탑의 감응 회로가 마력의 고전압 파동에 마비되며 연기를 불꽃과 함께 뿜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안이 발키리 프레임의 대검을 중앙 격벽 패널 틈새에 찔러 넣었다.
치리리릭!
강제 개방 전압이 패널을 태우자 두꺼운 중장갑 문이 천천히 좌우로 갈라졌다.
격벽 너머는 지상 본성 코어의 웅장한 가공 공간과 달랐다. 육중한 동결 관과 유전자 보전 탱크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자그마한 구형 챔버였다.
공기 중에는 고농도의 질소 냉매 냄새와 오래된 기계 기름 냄새가 섞여 있었다. 챔버 한가운데 높이 솟은 원형 제단 위에 지름 3미터 크기의 사선형 금속 캡슐이 놓여 있었다.
[ARCADIA EMERGENCY RETURN MODULE 00]
[CHIEF ARCHIVIST STASIS UNIT]
[STATUS: CRYOGENIC LIFE SUPPORT ACTIVE (0.001% POWER)]
캡슐의 정면 전사 창문 너머로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제복의 깃에 아르카디아 깃발 장교 문양이 새겨진 여성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뺨과 손등은 희미한 서리로 덮여 있었고 가슴 중앙에는 가느다란 생체 유지 회로가 꽂혀 있었다.
쿵.
쿵.
바로 그 캡슐 안에서 심장 박동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A-09가 천천히 캡슐 앞으로 걸어갔다.
"이 사람이... 마지막까지 지상에 남았던 인류인가요?"
"아르카디아 지상 조사대 총지휘관 헬레나 상사."
이안이 캡슐 측면의 빛바랜 식별 표식을 읽어 내렸다. 그의 목소리에 짙은 서사적 무게가 실렸다.
"아르카디아 출항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지상 남아 조를 이끌며 데이터베이스를 최종 이양하고 방주 사출을 끝까지 보좌한 인물이다. 왜 방주에 타지 않고 이곳에 갇혀 있었던 거지?"
[BIOLOGICAL SEAL REQUIREMENT DETECTED]
[INPUT 1: ARCADIA SECURITY OFFICER CODE]
[INPUT 2: BASELINE HOMO ASTRA GENOME]
제단 단말이 투명한 스크린을 띄웠다. 이안은 발키리 프레임의 오른쪽 장갑을 단말에 올리고 탐사대 보안관 개인 인증 코드를 주입했다.
[SECURITY OFFICER KASIAN: VERIFIED]
이어 A-09가 떨리는 손으로 생체 단말의 사파이어빛을 패널 중앙에 가져다 대었다.
"우리가 도착했어요. 당신의 오랜 기다림을 끝내러 왔어요."
지잉!
캡슐 표면의 서리가 흩어지며 두꺼운 금속 커버가 위로 들려 올려졌다.
[LOCATION: EARTH-FINAL - ARCHIVAL MEMORY UNSEALING]
[TIME: NIGHT / HISTORICAL EVIDENCE OF THE CATACLYSM]
치이익.
고압 냉매 가스가 분출되며 동결 캡슐 내부의 생체 유지 장치가 조용히 꺼졌다. 캡슐 안의 헬레나 지휘관은 눈을 뜨지 못했다. 그녀의 육체는 수천만 년이라는 긴 세월을 냉동 상태로 견디는 과정에서 세포 수준의 기능이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 쥐여 있던 투명한 입체 기록 다이아가 제단 빛과 반응하며 공중에 거대한 입체 영상을 쏘아 올렸다.
[RECORDING DATE: PLANET EARTH - FINAL COLLAPSE DAY]
[OPERATOR: CHIEF ARCHIVIST HELENA]
화면 속에 찌그러진 하늘과 갈라진 대지가 펼쳐졌다.
공중에서는 수백 미터 크기의 붉은 결정체들이 운석처럼 떨어지고 있었고 지구의 고층 빌딩과 기계 도시들이 붉은 빛에 닿자마자 분자 단위로 녹아내리며 부서졌다.
"저게... 멸망의 날이군요."
리아가 입술을 물었다. 마도학회 고서에서도 감히 묘사하지 못한 참혹함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전쟁이나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물리 법칙 자체가 붉은 오염에 감염되어 세계를 붕괴시키는 우주적 위상 재앙이었다.
화면 속의 헬레나 지휘관이 핏기 없는 입술로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아르카디아 1호부터 4호까지의 외우주 사출을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세라프 메인 프레임은 달 궤도에서 자신의 위상 노드를 끊어내며 붉은 오염원의 일차 침습을 차단했다."
그녀의 뒤편으로 거대한 기계 탑 세 개가 붉은 화염에 싸이는 광경이 잡혔다.
"그러나 지상의 수호 노드 세 곳이 침습 파동을 직접 가슴으로 받아냈다. 그들은 본성 코어와 귀환 캡슐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수신 회로를 스스로 닫고 격리 모드로 전환했다. 그 영향으로 노드의 감응 코드가 비틀렸다."
이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오르페우스가 말했던 거부 상태의 수호 노드 세 개다."
"누군가가 이 캡슐을 연다면 그것은 외우주로 떠난 아르카디아의 후손이거나 지구의 새로운 생명일 것이다. 지상 수호 노드 세 곳은 오염된 것이 아니다. 방주와 본성 코어를 지키다 스스로 고립의 감옥에 갇힌 것이다."
헬레나 지휘관의 영상이 손을 뻗어 입체 기록 다이아를 화면 앞으로 밀었다.
"이 다이아 안에 담긴 역사적 증거와 보조 항법 권한을 가지고 가라. 비틀린 노드 세 곳을 찾아가 이 권한으로 제어 회로를 정화해야만 지상과 달의 세라프가 완전히 하나로 연결된다. 인류가 멸망한 진짜 증거는 파괴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지키려 했던 마지막 선택이다."
치리리릭.
영상이 천천히 옅어지며 다이아의 빛이 이안의 흉부 신들의 관 문양과 A-09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LOCATION: EARTH-FINAL - PLANETARY CORE SURFACE RETURN]
[TIME: NIGHT / SURGICAL TARGETING DETECTED]
[SECONDARY NAVIGATION AUTHORITY: ACQUIRED]
[SURFACE DEFENSE NODES: THREE REACTIVE SIGNALS DETECTED]
이안의 발키리 프레임 내부 스크린에 청백색 항법 코드가 빽빽하게 갱신되었다.
보조 항법 권한. 그것은 단순한 암호문이 아니었다. 멸망의 순간에도 본성 코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지상 지휘부의 마지막 전술 권한이었다.
동결 캡슐 안의 헬레나 지휘관은 마지막 생체 신호를 가볍게 떨더니 조용히 평탄한 직선을 그렸다. 수천만 년 동안 캡슐을 지키던 생체 맥박이 마침내 안식을 찾은 것이었다.
A-09가 캡슐 덮개를 조심스럽게 다시 덮어 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 당신이 남겨 준 증거 덕분에 왜 그분들이 전송을 거부했는지 알게 되었어요."
그때 챔버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쿠구구구구!
지상 천장 너머에서 묵직한 마찰음과 함께 붉은 경보등이 수신정 벽면을 타고 내려왔다.
오르페우스의 형상이 챔버 중앙에 잔여 빛과 함께 출현했다.
"경고. 귀환 캡슐의 보조 항법 권한이 각성함에 따라 지상 수호 노드 3곳에서 반작용 포격 조준이 개시되었습니다."
리아가 지팡이를 다시 쥐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노드들이 이 권한의 각성을 외부 적의 침입으로 오인한 건가요?"
"아니, 고립된 수호 노드들이 마침내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열쇠를 알아본 거다."
이안이 발키리 프레임의 대검을 등에 꽂고 전술 장갑을 고쳐 쥐었다.
"지상 노드 세 곳의 위치는?"
"첫 번째 노드는 붉은 성채 최상층의 철갑 산맥, 두 번째는 정령의 숲 심층부 세계수 뿌리, 세 번째는 고대 지하도시의 아르콘 반응로 축선에 위치합니다."
오르페우스가 대륙 지도의 세 점을 청백색 빛으로 찍어 올렸다.
이안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우리가 걸어온 대륙 전체를 다시 거슬러 올라가며 갇혀 있던 노드들을 해방시켜야 했다. 그것만이 달에 봉인된 세라프의 위상 핵을 완전 정화하고 멸망의 재앙을 멈출 유일한 길이었다.
"올라간다. 지상으로."
이안이 나직하게 명령하자 리아의 지팡이가 푸른 바람을 일으켰고 A-09가 그의 곁에 굳건히 섰다. 멸망의 역사적 증거를 짊어진 세 사람의 발걸음이 다시 지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