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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연 독식하는 천재 서생2화

기연 독식하는 천재 서생

기연 독식하는 천재 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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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천년설삼의 위치

서고의 낡은 뒷문을 밀자 살을 에는 듯한 초겨울 밤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백운휘는 옷깃을 여미고 숨소리를 낮추었다. 서고지기 노인은 화로 옆에서 깊은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고 꺼져가는 잿더미 위로는 희미한 잿빛 연기만 맴돌았다.

품속에 갈무리한 고서의 차가운 감촉이 가슴팍을 묵직하게 눌렀다. 비록 제목조차 긁혀 지워진 낡은 책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가문 전체의 보물보다 무거웠다.

'순찰은 넷. 교대 시간은 반 식경 뒤다.'

운휘는 세가 외곽 담장을 따라 길게 드리운 고목의 그늘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저 멀리 본가에서 뒷산으로 이어지는 정규 등산로 쪽에서 붉은 횃불 서너 개가 어지럽게 일렁였다. 묵직한 가죽 장화가 얼어붙은 흙을 짓밟는 소리와 서슬 퍼런 무사들의 헛기침이 밤공기를 갈랐다. 가문의 실권을 쥔 큰아버지 백도경의 직속 무사들이었다.

백소연이 낮에 전해 준 경고는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산짐승 경계라더니 헛소문이 분명하군."

어둠 속에서 무사 하나가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그러게 말입니다. 산짐승 하나 잡자고 본가의 일류 무사들까지 차출해 이 꼭두새벽에 산자락을 지키게 한단 말입니까?"

"입 닥쳐라. 장로원에서 직접 내린 함구령이다. 며칠 전부터 북쪽 암벽 부근에서 기이한 냉기가 치솟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영물이나 귀한 영초가 개화할 징조일지도 모른다더군."

"영초요? 만약 그렇다면 직계 도련님들께 먼저 기회가 가겠군요."

"당연하지. 태진 도련님이 이번 연말 비무에서 두각을 드러내야 하니까. 우리 같은 놈들은 쥐새끼 한 마리도 얼씬 못 하게 막으면 그만이다."

운휘는 차가운 돌담에 등을 기댄 채 입꼬리를 옅게 비틀었다.

무인들의 육감은 날카로웠다. 비록 고서의 암호를 풀지 못해 진실을 알지는 못해도 영약이 뿜어내는 비범한 기운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냄새를 맡은 것이었다.

시간이 지체되면 가문의 장로들이나 백태진 같은 직계들이 뒷산 전체를 봉쇄하고 샅샅이 뒤질 터였다. 그렇게 되면 단전도 없는 방계 서생에게 돌아올 기회 따위는 영영 사라진다.

'기연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운휘는 소리 없이 방향을 틀었다.

정상적인 등산로는 이미 삼엄한 감시망에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세가의 오래된 군량 장부에서 찾아낸 잊힌 길이 있었다.

백 년 전 백리세가가 처음 터를 잡을 당시 계곡의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팠다가 큰 산사태로 묻혀 버린 옛 배수로였다.

운휘는 가파른 비탈을 기어올라 무성하게 얽힌 가시덤불 앞에 멈춰 섰다. 겉보기에는 거대한 바위와 잡목이 뒤엉킨 막다른 절벽 같았다.

그러나 덤불 아래쪽 흙을 조심스럽게 걷어내자 사람 하나가 간신히 기어 들어갈 만한 어두운 석혈이 드러났다.

동굴 입구에서는 비릿한 물이끼 냄새와 함께 오한이 들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운휘는 소매에서 얇은 수건을 꺼내 입과 코를 가린 뒤 웅크린 자세로 수로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무릎과 팔꿈치가 얼어붙은 진흙 바닥에 닿을 때마다 뼛속까지 시린 냉기가 파고들었다. 내력이 없는 서생의 몸으로는 몇 걸음 옮기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손가락 끝의 감각이 무뎌졌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십수 년 동안 서고의 어둠 속에서 멸시를 견뎌 온 인내였다. 이 정도의 추위로 물러설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수로의 끝에 다다라 무너진 바위 틈을 빠져나오자 시야가 단숨에 트였다.

머리 위로는 깎아지른 듯한 북쪽 암벽이 거대한 장벽처럼 솟아 있었고 차가운 보름달이 은빛 광채를 쏟아내고 있었다.

암벽 밑자락에는 성인 두 명이 나란히 걸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널찍하고 웅장한 동굴 입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동굴 앞에는 흙을 파헤친 자국과 함께 오래된 무인들의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심지어 동굴 안쪽에서는 은은한 벽옥빛 광채가 흘러나와 보는 이의 눈을 유혹하고 있었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기연의 입구를 찾았다는 흥분에 겨워 단숨에 안으로 뛰어들 만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운휘는 단 한 걸음도 내딛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무림천기록의 두 번째 경고가 날카롭게 경종을 울렸다.

―입구의 발자국을 믿지 말 것.

운휘는 옷자락을 털며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는 소매 속에서 준비해 온 얇은 동전 하나를 꺼내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허공을 향해 튕겼다.

챙.

맑은 쇳소리가 적막한 밤공기를 갈랐다.

동전은 웅장한 동굴 입구를 향해 날아가다가 기이하게도 입구 오른쪽으로 십여 장 떨어진 메마른 바위벽 쪽으로 곡선을 그리며 휘어져 떨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기류가 바위벽 틈새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증거였다.

운휘는 이번에는 작은 먹통을 꺼냈다. 붓끝에 먹물을 듬뿍 묻힌 뒤 허공을 향해 털어냈다.

검은 먹물 방울들이 공중으로 흩어지며 바람의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빛을 내뿜는 거대한 동굴 입구 쪽으로 날아간 먹물 방울들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소용돌이치는 역풍에 휘말리며 거친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바닥에는 흙더미에 파묻힌 백골과 부러진 칼자루의 잔해가 얼핏 모습을 드러냈다.

반면 동전이 떨어졌던 좁고 메마른 바위 틈새 쪽으로 날아간 먹물 방울들은 부드러운 나선형 곡선을 그리며 틈새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가짜다.'

운휘는 차갑게 읊조렸다.

빛을 내뿜는 거대한 동굴은 과거 기연의 주인이 불청객을 몰살하기 위해 설치해 둔 잔혹한 살진(殺陣)이었다. 발자국과 보석빛 광채에 속아 발을 들이는 순간 천장의 만근 거석이 무너져 내리거나 예리한 암기 세례를 피할 수 없게 설계되어 있었다.

진짜 길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만큼 좁고 험악한 절벽 틈새 뒤에 숨겨져 있었다.

운휘는 지체 없이 바위 틈새로 다가갔다. 어른 주먹 두 개가 겨우 들어갈 법한 좁은 균열이었지만 돌출된 바위 몇 개를 천기록에 적힌 방위대로 짚어 누르자 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암벽 일부분이 옆으로 회전하며 숨겨진 통로를 열어주었다.

운휘는 틈새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통로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믿을 수 없을 만큼 웅장한 지하 석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벽면과 천장은 온통 푸른빛을 머금은 만년빙으로 뒤덮여 있었고 바닥에는 백소연이 보여주었던 것과 똑같은 푸른빛의 한설토가 눈처럼 덮여 있었다.

입김을 뿜을 때마다 허공에서 하얀 서리꽃이 피어올랐다. 단순히 추운 수준이 아니었다. 살갗이 찢어지고 뼈마디가 얼어붙는 듯한 지독한 음한지기(陰寒之氣)가 동굴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동굴 내부는 끝없는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수십 갈래로 갈라진 얼음 기둥들이 달빛과 인광을 난반사하며 사방에 수백 개의 허상을 뿜어냈다.

한 걸음만 잘못 내디뎌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얼음 구덩이로 떨어지거나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는 얼음 미로에 갇힐 판이었다.

'만류귀종의 진.'

고대 고수가 자신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 천지자연의 음기를 빌려 완성한 환진(幻陣)이었다.

무공을 익힌 절정고수라 할지라도 억지로 기운을 쓰며 돌파하려 들면 진법에 깃든 한기가 역류하여 온몸의 주화입마를 부를 터였다. 힘으로 부술 수 있는 진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백운휘는 애초에 무공이 없는 서생이었다.

그에게 무기는 내력이 아니라 고서의 암호를 풀어낸 명석한 두뇌였다.

운휘는 얼음 벽면에 맺힌 물방울의 낙하 속도와 천장의 종유석에 찍힌 점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세가의 장부에서 수없이 보아왔던 북두칠성의 방위점과 무림천기록 첫 장의 성도(星圖)가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겹쳐졌다.

"탐랑(貪狼)에서 시작해 거문(巨門)을 거치고 파군(破軍)에서 꺾인다."

운휘는 먹통에서 꺼낸 붓으로 자신의 발자국이 닿을 얼음 바닥 세 군데에 검은 먹점을 찍었다.

기이하게도 먹물이 얼음 표면에 닿는 순간 맹렬하게 휘몰아치던 한기의 소용돌이가 한순간 멈칫하며 흩어졌다. 어지럽게 시야를 가리던 수백 개의 얼음 허상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동굴 가장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좁은 은빛 통로 하나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진법의 눈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었다.

진식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길을 유도해 내는 서생의 혜안이었다.

운휘는 떨리는 다리를 다잡으며 통로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길의 끝에 도달했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거대한 천연 빙동 한가운데, 맑고 투명한 만년빙석으로 이루어진 천연의 제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제단 위에는 푸른빛을 띤 한설토가 둥글게 쌓여 있었고 그 중심에서 눈부시도록 찬란한 순백의 광채를 뿜어내는 영약 한 뿌리가 영롱하게 피어나 있었다.

천년설삼이었다.

어린아이의 팔뚝만큼 굵고 단단한 몸통은 사람의 완벽한 형상을 띠고 있었으며 실타래처럼 뻗은 가느다란 뿌리마다 영롱한 은빛 이슬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삼의 주변으로는 눈에 보일 정도로 짙은 순백의 영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동굴 전체에 은은하고 맑은 향기를 퍼뜨리고 있었다.

그 향기를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얼어붙었던 오장육부가 깨어나고 머릿속이 번개가 친 듯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찾았다.'

운휘의 가슴이 거세게 고동쳤다.

열여섯 해 동안 단전이 없다는 이유로 버림받고 손가락질당하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백태진의 오만한 비웃음도, 장로들의 싸늘한 시선도, 서고의 퀴퀴한 먼지 속에서 홀로 삼켜야 했던 서러움도 모두 이 순간을 위한 거름에 불과했다.

눈앞에 있는 것은 단순한 영약이 아니었다.

자신의 뒤틀린 운명을 뿌리째 뒤흔들고 천하를 손아귀에 쥘 수 있는 첫 번째 열쇠였다.

하지만 운휘는 섣불리 손을 뻗어 설삼을 움켜쥐지 않았다.

설삼을 감싸고 있는 순백의 냉기는 눈으로 보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지독했다. 보통의 무인이 욕심에 눈이 멀어 손을 댔다가는 만년한기가 순식간에 경맥을 타고 들어와 오장육부를 얼려 터뜨릴 터였다.

무림천기록의 마지막 구절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찬 기운을 억지로 막지 말 것.

―단전이 비어 있는 자, 천지의 음기를 온전히 담아 새로운 길을 열리라.

운휘의 입가에 깊은 미소가 걸렸다.

보통의 무인들은 이미 체내에 자신만의 내력을 쌓아두었기에 설삼의 맹렬한 한기와 충돌하여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백운휘는 태어날 때부터 단전이 막혀 내력을 한 줌도 품지 못한 백지상태였다.

충돌할 내력이 없으니 거스를 기운도 없었다.

오히려 순수한 만년의 영기가 몸속의 굳어버린 혈도를 깨부수고 새로운 단전의 기틀을 세우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그릇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세상의 눈에는 쓸모없는 불구의 몸이었으나 지고한 기연 앞에서는 천하제일의 축복받은 체질이었던 셈이다.

천장의 얼음 틈새로 비쳐 드는 달빛이 가장 높은 곳에 도달했다.

보름달의 정기가 설삼의 잎사귀 위로 쏟아져 내리며 은빛 이슬이 영롱하게 차올랐다.

달이 기울기 전, 바로 지금이 진법의 눈이 가장 온순해지고 영약의 약성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백운휘는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천기록에 적힌 호흡의 원리를 가슴에 새겼다.

그의 하얗고 곧은 손가락이 천년설삼의 순백색 줄기를 향해 조용히 뻗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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