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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부장님은 반찬가게를 엽니다1화

회귀한 부장님은 반찬가게를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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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은솔동의 아침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에 눈동자가 뒤집혔다.

손끝부터 굳어지는 감각이 얼음물처럼 혈관을 타고 솟구쳤다.

탁자 위에는 다음 분기 실적 보고서와 텅 빈 커피 캔 세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조명이 꺼진 대기업 식품 계열사 부장실의 서늘한 정적. 스무 해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온 길의 끝이 고작 혼자 남은 사무실 바닥이라는 사실이 억울해서 숨이 가빴다.

'이번 분기만 넘기면 된다.'

그 말을 몇 천 번이나 반복했던가.

마지막 순간 떠오른 것은 끊임없이 미뤄둔 휴가도 승진 발표 때의 환호도 아니었다.

텅 빈 장례식장의 영정 사진 앞에서도 일 때문에 전화를 받던 아내의 허망한 눈빛과 자신을 기다리다 지쳐 혼자 방 불을 끄던 여섯 살 딸의 노란 머리핀이었다.

"하진아…… 예나야……."

소리 없는 비명이 헐떡이는 목구멍 안쪽에서 부서졌다. 시야가 캄캄하게 닫히며 묵직한 어둠 속으로 낙하했다. 그대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다.


"아빠, 아직도 자?"

귓가를 간지럽히는 맑고 작은 목소리에 강도윤은 번쩍 눈을 떴다.

서늘한 사무실 카펫이 아니었다. 손바닥에 닿는 촉감은 약간 뻣뻣한 모판 장판지였다. 코끝에는 구수한 된장찌개 끓는 냄새와 약간의 눅눅한 솜이불 냄새가 섞여 풍겼다.

도윤은 벌떡 상체를 일으키려다 머리통이 띵하게 울려 손으로 현관 신발장을 짚었다.

"어……?"

손끝에 잡힌 것은 낡은 목재 신발장의 둥근 모서리였다. 그 위에는 은색 열쇠고리와 2006년 3월이라 적힌 조그만 탁상 달력이 올려져 있었다. 달력 동그라미 속에 적힌 글씨는 자신의 친필이었다. '식품사업부 1팀 아침 회의 08:30'.

도윤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뺨을 짚었다. 매끄럽고 팽팽했다. 2026년 과로와 스트레스로 깊게 파였던 눈가의 주름도 듬성듬성 솟아 있던 흰머리의 까칠함도 없었다.

신발장 거울 속에 비쳐 보이는 모습은 서른다섯 살의 강도윤이었다. 주름 하나 없이 단정한 셔츠 차림. 다만 눈가에는 새벽까지 제출할 기획서를 검토하느라 쌓인 얕은 피로만 맴돌고 있었다.

"내가…… 살아 있는 건가?"

도윤은 신발장 모서리를 꽉 잡았다. 차가운 나무 감각이 피부를 통과해 뼈마디까지 똑똑히 전달되었다. 꿈이 아니었다. 환각도 아니었다.

2006년 3월. 스무 해 전의 그 봄날, 서울 서북권 은솔동의 작은 빌라 2층, 신혼 때 장만했던 집 현관으로 그가 돌아와 있었다.

"여보? 아직 안 나갔어요? 8시 다 되어 가는데."

주방 쪽에서 낯익고 그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윤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2026년 사망 직전에는 서먹해진 주말부부로 지내다 끝내 서로의 마음을 닫아버렸던 아내. 서하진이었다.

도윤은 홀린 듯 신발장을 떠나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그마한 싱크대 앞에는 연푸른색 앞치마를 둘러맨 하진이 서 있었다. 곱게 묶어 내린 머리채 아래로 하얀 목덜미가 보였다. 그녀는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된장찌개의 거품을 숟가락으로 살포시 걷어내고 있었다.

"오늘 아침 일찍 출근한다더니 왜 현관에 그러고 서 있어요? 얼굴이 왜 이렇게 파리해요?"

하진이 고개를 돌리며 도윤을 바라보았다. 서른세 살의 하진. 눈빛은 단정하고 손끝은 부지런했다. 전생의 기억 속에서 고단한 삶에 치여 점점 웃음을 잃어가던 아내의 얼굴에 아직 선명한 생기가 남아 있었다.

도윤은 목구멍이 턱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진을 향해 걸어가는 두 발이 마치 솜더미를 밟듯 푹푹 꺼지는 것 같았다.

"하진아……."

"왜 그래요, 진짜? 어디 아파요?"

하진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도윤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따뜻했다. 서늘한 이마 위에 닿은 하진의 손바닥에서는 아침마다 그녀가 끓여 내던 멸치 육수 냄새와 약간의 세제 향이 났다. 그 소박하고 진실된 온기에 도윤의 눈시울이 순간 뜨겁게 달아올랐다.

도윤은 참지 못하고 하진의 어깨를 와락 감싸 안았다.

"앗, 여보! 뜨거운 뚝배기 앞에 두고 뭐 하는 거예요?"

하진이 당황해서 도윤의 등판을 툭 쳤지만 도윤은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하진의 정수리에서 풍기는 샴푸 향기, 얇은 와이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아내의 숨소리 하나하나가 너무나 가슴을 파고들었다.

전생에서 그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아내를 안아주지 않았다. 주말에도 노트북을 켜놓고 실적 장부를 뒤적였고 아내가 "요즘 동네 시장 쪽에 작은 반찬 가게 자리가 나왔대"라고 수줍게 말을 꺼냈을 때도 "지금 내 승진이 걸린 시기인데 무슨 소리냐"며 단칼에 잘라버렸었다.

그 결과 하진은 자신의 꿈을 가슴속 깊이 묻은 채 시들어갔고 도윤은 대기업 부장이 되었지만 집안에는 서늘한 냉기만 가득했었다.

"미안해…… 미안하다, 하진아."

"갑자기 뭐가 미안해요? 진짜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상사한테 찌들어서 그래요?"

하진이 도윤의 가슴팍을 부드럽게 밀어내며 얼굴을 살폈다. 도윤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자 하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보, 울어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말을 해야 알지."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무슨 소리예요. 어제 밤에도 같이 자놓고서."

하진은 타박하듯 말했지만 도윤의 뺨에 번진 눈물을 앞치마 모서리로 살살 닦아주었다. 그녀의 손길은 다정했고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때 안방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빠…… 엄마…… 왜 시끄러워?"

분홍색 곰돌이 잠옷을 입은 여섯 살 예나가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 노란 머리핀을 한쪽 머리에 꽂은 예나는 까치집이 된 머리를 긁적이며 도윤을 바라보았다.

앞니 하나가 빠져 틈이 뻥 뚫린 조그만 입 모양.

도윤의 목에서 억눌린 헐떡임이 새어 나왔다. 전생에서 도윤이 과로로 병원에 실려 가고 집을 비우는 동안 아빠의 얼굴보다 아빠의 부재에 더 익숙해져 버렸던 딸. 끝내 멀리 유학을 떠나버리고 서먹한 남처럼 변해버렸던 예나가 지금 눈앞에 서 있었다.

"예나야……!"

도윤은 주방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양팔을 넓게 벌리자 예나가 꼬물거리는 발걸음으로 도윤에게 다가왔다.

"아빠, 오늘 일찍 가? 예나 유치원 갈 때 아빠 없어?"

예나의 조그만 손이 도윤의 와이셔츠 깃을 잡았다. 앙증맞은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미열. 도윤은 예나를 품 안에 끌어안았다. 조그만 몸집이 가슴에 딱 들어맞았다.

"안 가. 안 일찍 가. 오늘은 예나하고 같이 있을 거야."

"진짜? 아빠 거짓말쟁이잖아. 지난주에도 공원 가기로 해놓고 회사 갔잖아."

예나가 샐쭉한 표정으로 빠진 앞니 사이로 혀를 낼름거렸다.

그 소박한 지적 하나가 도윤의 가슴을 송곳처럼 찔렀다. 전생의 자신은 정말로 거짓말쟁이였다. '다음 분기만 넘기면', '이번 프로젝트만 끝나면'이라는 말로 가족과의 약속을 수백 번도 넘게 깼던 나쁜 가장이었다.

"이번엔 거짓말 아니야. 아빠가 예나 유치원까지 손잡고 걸어갈 거야."

"우와! 진짜지? 엄마, 아빠가 오늘 나 유치원 바래다준대!"

예나가 신이 나서 방방 뛰며 하진을 바라보았다. 하진은 의아하면서도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여보, 진짜 괜찮아요? 8시 반에 본사 아침 회의 있다면서요? 부장님이 노발대발하는 거 아니에요?"

하진의 말에 도윤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2006년 3월의 그 아침 회의. 식품사업부 엄 부장이 신제품 유통 라인 점검을 이유로 팀원들을 잡잡 잡잡 쥐어짜던 날이었다. 전생의 도윤은 그 회의에 늦지 않으려고 아침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현관을 뛰어쳐나갔었다. 예나가 "아빠, 잘 가" 하고 인사하는 소리조차 뒤로 한 채.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도윤은 식탁 위에 놓인 따뜻한 밥공기와 된장찌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예나와 국자를 들고 자신을 염려스럽게 바라보는 하진을 보았다.

스무 해 동안 수많은 승진과 실적 달성을 이뤘지만 그 끝에 남았던 것은 혼자 남은 장례식장과 외로운 죽음뿐이었다. 이미 한번 죽어본 그에게 대기업 부장의 눈치나 실적 압박 따위는 더 이상 삶의 최우선 순위가 될 수 없었다.

"회의 좀 늦어도 돼. 전철 한 대 놓친다고 세상 안 무너져."

도윤은 단호하게 말했다.

"어머, 당신 진짜 오늘 이상하네. 회사 일로 스트레스가 너무 심한가 봐요."

하진은 걱정하면서도 도윤의 앞에 숟가락을 놓아주었다.

"일단 앉아서 밥부터 먹어요. 속 빈 채로 나가면 더 피곤해요."

식탁에 앉은 도윤은 숟가락을 들어 된장찌개 국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멸치와 다시마를 넣어 깊게 우려낸 육수 밑국물에 두부와 호박이 듬뿍 들어간 하진표 된장찌개. 조미료를 과하게 쓰지 않아 담백하면서도 입안 가득 감기는 감칠맛이 따뜻하게 창자를 적셨다. 전생에 그토록 그리워했던 집밥의 맛이었다.

도윤은 밥 한 공기를 싹싹 비워냈다. 숟가락질을 하는 내내 하진은 예나에게 계란말이를 찢어 올려주었고 예나는 오물오물 씹으며 아빠의 셔츠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매일 아침 당연하게 존재했으나 전생의 도윤이 스스로 차버렸던 소중한 시간. 그 시간이 2006년의 아침 햇살과 함께 주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도윤은 겉옷을 챙겨 들었다.

하진이 가방을 챙겨주며 보온병 하나를 건넸다.

"당신 요새 목 자주 쉬니까 따뜻한 둥굴레차 타놨어요. 가면서 마셔요."

"고마워, 하진아."

도윤은 보온병의 묵직한 온기를 느끼며 하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늘 저녁엔 일찍 올게. 저녁 같이 먹자."

"예? 저녁이요? 당신 보통 야근하고 10 시 넘어서 오잖아요."

"이제 안 그래. 일주일에 적어도 세 번은 무조건 집에서 저녁 먹을 거야. 약속해."

하진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도윤을 보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말이라도 고마워요. 근데 너무 무리하진 마요. 회사 일이 우선이지."

'아니야, 회사 일이 우선이 아니야.'

도윤은 마음속으로 굳게 외쳤다. 아내의 착한 양보와 희생에 더 이상 기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빠! 가자!"

노란 가방을 멘 예나가 신발을 신고 현관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도윤은 예나의 손을 꼭 잡고 빌라 문을 열고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2006년 봄의 차가우면서도 상큼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은솔동 낡은 골목길에는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내리쬐고 있었다. 멀리 은솔시장 입구 쪽에서는 상인들이 셔터를 올리는 소리와 채소 트럭이 짐을 내리는 소리가 활기차게 들려왔다.

"아빠, 오늘은 왜 손 안 놓아?"

골목길을 걸으며 예나가 고개를 빼꼼 쳐다보며 물었다.

"응? 예나 손 잡고 싶어서."

"히히. 아빠 손 엄청 따뜻하다."

예나가 도윤의 손을 쥐어짜듯 힘을 주었다. 조그만 손가락의 감촉이 도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골목길 너머로 은솔시장의 낡은 간판들이 보였다. 상철 외삼촌이 운영하는 반찬 가게 '상철찬'의 빛바랜 천막도 멀리서 어렴풋이 보였다. 전생에 하진이 끝내 열지 못했던 반찬 가게 그리고 훗날 대형 마트와 악덕 납품업자 사이에서 쓰러져가던 은솔시장의 모습이 도윤의 미래 기억 속에서 교차했다.

'승진 코스를 버리더라도 이 가족의 저녁을 지키겠어.'

도윤은 결연한 눈빛으로 주머니 속 휴대폰을 꽉 쥐었다.

휴대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식품팀 엄 부장'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회의 시간이 가까워지자 상사가 독촉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도윤은 전철역으로 달려가는 대신 예나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걸으며 전화기의 거절 버튼을 눌렀다.

"아빠, 전화 안 받아?"

"응, 지금은 예나 유치원 가는 게 더 중요하니까."

예나가 환하게 웃으며 도윤의 손을 끌었다.

유치원 정문 앞에 다다르자 예나는 선생님을 향해 달려가다 말고 돌아서서 도윤을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

"아빠! 저녁에 꼭 와야 돼! 안 오면 거짓말쟁이야!"

"응, 꼭 갈게. 약속해."

도윤은 손을 들어 예나에게 화답했다.

유치원 문이 닫히고 혼자 남은 아침 거리. 도윤은 휴대폰을 꺼내 하진에게 짧은 문자를 찍어 보냈다.

[오늘 저녁 7시까지 집으로 갈게. 예나랑 같이 맛있는 거 먹자.]

문자 전송 버튼을 누른 도윤의 눈가에 은은한 따스함이 퍼졌다. 2006년 봄, 돌아온 그의 첫 번째 걸음이 은솔동의 아침 햇살 속에서 비로소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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