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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서의 오탈자를 고치는 여자2화

예언서의 오탈자를 고치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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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살아 돌아온 왕자

세린은 왕립 서고 지하 로비의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댄 채 손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잉크는 소매 끝으로 여러 번 문질러 닦았다. 그런데도 오른손 둘째 손가락에는 양피지에 펜촉을 댔을 때의 뜨거움이 남아 있었다. 손가락을 구부릴 때마다 글자 하나가 피부 아래에 박힌 것처럼 욱신거렸다.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다.

이벨라. 늘 세린의 이름을 낮게 불러 주던 사람. 비가 오는 날이면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감싸 주던 손.

그 손은 기억났다. 손등 위의 작은 흉터도 기억났다. 하지만 세린을 바라보던 눈매와 입가의 미소는 아무리 더듬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거기에는 누군가 깨끗한 칼로 도려낸 듯 흰 공백만 남아 있었다.

세린은 숨을 삼켰다.

주머니 속 붉은 구리 펜촉이 손바닥에 닿자 세린은 흠칫하며 주머니 덮개를 여몄다. 이곳을 떠나야 했다. 봉인실의 문이 열려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는 책임을 물을 것이다. 원본 예언서의 글자를 건드렸다는 사실까지 드러난다면 필경사 견습생에게 남는 길은 없었다.

그때 서고 정문이 바깥쪽에서 거칠게 밀려 열렸다.

찬 비바람이 로비의 촛불을 한꺼번에 흔들었다. 젖은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남자가 문턱을 붙잡고 안으로 들어왔다. 물이 아니라 피가 망토 끝에서 떨어졌다.

남자는 더 버티지 못하고 벽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망토의 후드가 흘러내리며 빗물에 젖은 검은 머리와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뺨 아래에서 금빛 눈이 세린을 정확히 겨눴다.

저주받은 둘째 왕자 아르덴 레오니스.

세린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왕자님께서… 살아 계셨군요."

아르덴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 말은 내가 죽었다고 믿었다는 뜻인가."

낮은 목소리는 피를 많이 흘린 사람답지 않게 또렷했다. 세린은 대답 대신 그의 젖은 망토 아래를 보았다. 왼쪽 옆구리에서 검붉은 피가 번져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광장에서 집행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있었지. 칼도 내려왔고 구경꾼들도 충분히 많았다."

아르덴은 문틀에서 손을 떼었다. 손바닥에 묻은 피가 검게 보였다.

"그런데 칼날이 목에 닿기 직전 문장이 끊겼다. 누군가가 내 죽음에 손을 댄 모양이더군."

세린의 심장이 턱 하고 내려앉았다.

아르덴은 그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피로 물든 입가에 냉소가 스쳤다.

"침묵의 서고 쪽 문이 열려 있었나?"

"그곳은 제가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거짓말은 입 안에서 지나치게 단단했다. 세린은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내 목이 잘리는 순간에 누군가 그 문 근처에 있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는 한 걸음 다가오다가 몸을 굳혔다. 옆구리에서 새 피가 흘렀다. 세린은 망설였다. 왕자를 살린 사람이 자신이라면 그를 숨기는 것은 더 깊은 죄가 될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두고 볼 수도 없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아르덴은 움직이지 않았다.

"명령인가?"

"상처를 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쓰러지시면 저도 곤란합니다."

세린의 말이 끝나자 아르덴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 웃음이라기보다는 경계가 한 겹 얇아진 표정이었다.

"필경사다운 이유군."

세린은 로비 안쪽의 보존실 앞 빈 열람실로 그를 이끌었다. 사용하지 않는 열람실은 낡은 지도 상자와 수선 대기 중인 책들로 가득했다. 창문도 없는 방이라 불을 켜지 않으면 밖에서 사람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문을 잠근 세린은 벽장 아래 약상자를 끌어냈다. 손이 떨려 뚜껑을 두 번이나 놓쳤다.

"망토를 벗으셔야 합니다."

"내 신분을 알아보고도 혼자 있는 방으로 데려온 담력은 있군."

"피가 계속 나고 있습니다."

"그건 나도 안다."

아르덴은 마른 대꾸를 하면서도 망토 끈을 풀었다. 젖은 천 아래의 흰 셔츠는 옆구리부터 붉게 물들어 있었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칼끝이 살을 길게 긁고 지나갔는지 피가 좀처럼 멎지 않았다.

세린은 깨끗한 천에 소독액을 적셨다.

"아프실 겁니다."

"처형대에 있던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세린은 천을 상처에 댔다. 아르덴의 어깨가 순간 굳었다. 비명은 없었다. 대신 그의 손이 의자 팔걸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가까이서 보니 왼쪽 쇄골에서 목까지 번진 검은 문장이 보였다. 가느다란 글씨들이 핏줄처럼 피부를 타고 올라가 있었다. 아까 봉인실에서 본 검은 번짐과 닮은 색이었다.

세린은 붕대를 감다가 손을 멈췄다.

문장의 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왜 멈췄지?"

"저주 문장이… 아프십니까?"

아르덴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금빛 눈동자가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에는 찬 얼음 같지. 오늘은 목을 태웠다. 칼이 내려올 때 가장 뜨거웠고 그 다음에는 누군가 잉크를 긁어내는 것처럼 따가웠다."

세린의 손끝이 다시 떨렸다. 그 순간 원본 예언서가 흔들린 광경이 눈앞에 떠올랐다. 붉은 잉크가 파란 봉인 잉크에 스며들던 순간. 어머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던 순간.

그녀는 급히 붕대 매듭을 지었다.

"처형대에서는 어떻게 빠져나오셨습니까?"

아르덴은 그녀가 화제를 바꾸는 것을 알면서도 답했다.

"칼날이 비껴 간 뒤 집행관이 먼저 얼어붙었다. 목의 문장이 사라졌다고 소리친 자도 있었고 내가 이미 죽었다고 믿는 자도 있었지. 그 틈에 제 발로 일어났다."

"혼자서요?"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빨리 움직인다."

그의 대답에는 자랑보다 피로가 묻어 있었다. 세린은 약상자를 정리하다가 망토 안쪽에 달린 왕실 문장을 보았다. 검은 사자와 은빛 왕관. 이 남자는 몇 시간 전까지 수많은 사람 앞에서 죽어야 했던 왕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낡은 의자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세린은 문득 어머니의 목소리를 기억하려 했다. 위험한 사람을 보면 멀리하라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틀린 글자를 그대로 두지 말라는 말이었을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공백이 세린의 가슴을 차갑게 훑고 지나갔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세린! 아직 안 갔어?"

로웬의 목소리였다.

세린은 숨을 죽인 채 아르덴을 보았다. 아르덴은 즉시 일어서려 했지만 상처 쪽에서 피가 다시 배어 나왔다. 그녀는 손으로 그를 막고 낡은 책장 뒤편을 가리켰다.

"저쪽에 계세요. 소리 내지 마세요."

"왕자에게 숨으라고 하는 건 처음이군."

"처음이신 일이 많으실 겁니다. 오늘 밤은요."

아르덴은 잠시 세린을 보더니 말없이 책장 뒤 어둠으로 들어갔다. 세린은 피가 묻은 천을 약상자 맨 아래에 밀어 넣고 문을 열었다.

로웬은 젖은 앞머리를 이마에 붙인 채 서 있었다. 평소보다 얼굴빛이 훨씬 나빴다.

"왜 문을 잠갔어?"

"수선할 책에 곰팡이가 번졌어. 약 냄새가 심해서요."

로웬의 코끝이 움직였다. 그는 약 냄새보다 먼저 피 냄새를 맡은 듯했다. 시선이 세린의 소매 끝에 멈췄다.

"광장이 난리야. 왕자님 시신이 없대. 집행관 하나는 기절했고 구경하던 사람들이 서로 밟고 도망쳤다더라."

세린은 손가락을 꽉 쥐었다.

"그런데 왜 서고까지 소문이…"

"소문이 아니라 수색이야. 푸른 봉인 망토 입은 자들이 지하 입구를 묻고 다녀. 근위대가 아니라 예언청 사람들이야. 그자들은 사람을 찾는 눈이 아니었어. 뭔가를 확인하러 온 얼굴이었지."

로웬은 말을 멈췄다. 다시 세린의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

"너 괜찮아?"

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움직임에도 주머니 속 펜촉이 다리에 닿았다.

"괜찮아. 다만 봉인실 쪽 문이 열려 있던 게 이상했어."

로웬의 눈이 커졌다.

"네가 거길 봤어?"

"밖에서만. 안으로 들어가진 않았어."

그것도 거짓이었다. 세린은 목이 조여 오는 듯했지만 끝까지 로웬을 바라보았다.

로웬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낮게 욕설을 삼키고 복도 끝을 돌아보았다.

"마렐라 님이 돌아오기 전까지 여긴 내가 잠가 둘게. 수색대가 들어오면 보존실에 침수 피해가 났다고 버텨 보지 뭐. 너는…"

그는 문틈 너머의 어둠을 한 번 살폈다. 피 냄새를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로웬은 모르는 척 한숨만 내쉬었다.

"너는 여기서 나가지 마. 오늘은 이상한 일이 너무 많아."

문이 닫힌 뒤에야 세린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책장 뒤에서 아르덴이 나왔다. 그가 손에 쥔 것은 방금 전 세린이 떨어뜨린 붉은 실밥 하나였다. 아르덴의 시선은 실밥이 아니라 그녀의 소매 끝에 희미하게 남은 잉크 자국으로 향했다.

"친구는 너를 믿는군."

"로웬은 좋은 사람입니다."

"좋은 사람이라서 거짓말을 알아도 묻지 않는 건가?"

세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르덴은 의자에 기대며 젖은 셔츠의 목깃을 천천히 풀었다. 검은 문장이 쇄골에서 목울대까지 선명하게 드러났다. 처음에는 글자가 얽힌 흉터처럼 보였다. 그러나 세린의 눈에는 그 가장자리에서 검은 번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위로 은빛 빛이 가느다랗게 떠올랐다.

세린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보이는 것은 몇 글자뿐이었다.

[저주받은 둘째 왕자 아르덴은 필경사의 손으로…]

그 뒤는 검은 번짐에 잠겨 있었다. 은빛으로 떠오르는 글자도 없었다. 고칠 수 있는 오류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무엇이 보이나?"

아르덴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세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원본 예언서의 일을 말하면 그는 자신을 믿을까. 아니면 자신을 예언청의 공범으로 여길까. 무엇보다 그 사실을 입 밖에 내는 순간 어머니의 미소를 잃은 대가가 헛된 일이 될지도 몰랐다.

"검은 문장이 더 번졌습니다."

아르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

"하지만 처형장으로 이어진 문장과는 다릅니다."

그는 침묵했다. 세린은 더 말할 수 없었다.

아르덴은 한참 뒤에야 목깃을 여몄다.

"내가 지금 들은 말을 믿어야 할 이유는 없겠지. 너도 마찬가지일 테고."

세린은 고개를 들었다.

"왕자님도 저를 믿지 않으시잖아요."

"그러니 거래를 하자. 오늘 밤 네가 본 것과 내가 겪은 일을 각자 감춘다. 대신 저 문장이 무엇인지 알아낼 때까지 상대를 섭정이나 예언청에 넘기지 않는다."

"제가 거절하면요?"

아르덴은 피가 묻은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금빛 눈에 처음으로 피로가 아닌 선명한 의지가 비쳤다.

"그럼 네 선택대로 해. 나는 누군가가 쓴 문장 때문에 다시 처형대에 오르지 않을 방법을 찾을 뿐이다."

그 말은 부탁도 명령도 아니었다.

세린은 자신의 주머니를 꼭 눌렀다. 안쪽에서 붉은 구리 펜촉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어머니의 얼굴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르덴의 피도 이미 바닥에 떨어졌다.

그럼에도 이 왕자가 살아 있는 것은 분명했다.

"알겠습니다."

세린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저도 알아보겠습니다. 다만 제가 말할 수 없는 것은 묻지 말아 주세요."

아르덴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그의 목에 번진 검은 문장이 한 번 꿈틀거렸다.

세린의 눈앞에서 은빛 글자 끝이 천천히 아래를 향했다.

마치 다음 문장이 그녀의 잉크 묻은 손가락을 가리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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