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 의원은 야근 중

1화: 밤비 속의 손님
차가운 늦가을 밤비가 청하성 뒷골목의 낡은 지붕을 두드렸다.
약탕관 아래에서 타오르는 숯불 소리만이 허름한 의원 안을 묵묵히 채우고 있었다. 씁쓸하면서도 미약하게 단 향이 감도는 약향이 공기 중에 낮게 깔렸다.
강우진은 손가락 끝에 묻은 붉은 잉크를 베포로 닦아 내며 탁자 위에 놓인 약재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보혈초 서 냥, 감초 세 냥, 황기 다섯 냥…….'
숫자 아래 적힌 외상 대금의 액수는 은전 열두 냥이었다.
낮에 찾아왔던 백운 약방의 직소리 나는 늙은 관리가 남기고 간 독촉장이 여전히 찻잔 옆에 펄럭이고 있었다. 열흘 안에 대금을 치르지 않으면 더 이상 약재를 대어 주지 않겠다는 최후통첩이었다.
"은전 열두 냥이라……."
우진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반년 전 사부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내상과 비틀린 독기로 세상을 떠나며 넘겨준 것은 낡아 쓰러져 가는 청하의원과 이 빚더미뿐이었다.
당시 사부는 숨을 거두기 직전 거칠어진 우진의 손을 꼭 잡고 두 가지 유언을 남겼다.
첫째는 품 안에 들고 있던 오래된 청동 침통을 절대로 타인에게 넘기지 말라는 것이었다.
둘째는 해가 지고 난 뒤 해시부터 인시 사이에 문을 두드리는 자가 있다면 아무리 신분이 수상하거나 처지가 비참하더라도 돌려보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의원은 병을 고치는 사람이지 환자의 죄나 얼굴을 따지는 장사꾼이 아니다. 해 뜨기 전 찾아오는 자는 목숨이 오가는 자뿐이니 절대로 거절하지 마라."
사부의 목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아련하게 맴도는 듯했다.
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원 뒷문으로 걸어갔다. 빗물이 스며들어 축축하게 젖은 나무 문틀 위에는 말린 회향초 잎을 땋아 만든 검은 매듭이 걸려 있었다.
해시(亥時)를 알리는 성내 타종 소리가 멀리서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야간 진료, 즉 야진(夜診)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강호의 낮이 명분과 은혜 혹은 드러난 칼날로 움직인다면 밤의 강호는 핏빛 비밀과 은밀한 거래로 움직였다. 신분을 묻지 않고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 대신 형편에 맞는 대가를 받는 야간 진료소.
우진은 회향초 매듭을 정돈한 뒤 다시 약탕관 앞으로 돌아와 탕약을 저었다. 약기운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골목길의 빗소리는 더욱 거칠어졌다.
그때였다.
쿵, 쿵, 쿵.
약속이나 한 듯 단호하면서도 둔탁한 소리가 의원 뒷문을 세 번 두드렸다.
우진의 손길이 순간 멈췄다. 탕약을 젓던 대나무 숟가락 끝에서 맑은 약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사부가 세상을 떠난 지 반년 만에 찾아온 첫 번째 야간 환자였다.
우진은 탕약 불을 약하게 조절한 뒤 벽에 걸린 등불을 들고 뒷문으로 다가갔다. 그는 문고리를 잡기 전 나직하게 물었다.
"누구십니까."
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축축하게 젖은 옷자락이 흙바닥을 긁는 소리와 거칠고 불안정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우진은 빗장을 천천히 질러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차가운 밤바람과 함께 진한 쇠비린내 그리고 코를 찌르는 알싸한 악취가 안으로 들이쳤다.
"……!"
문자루를 잡고 서 있던 검은 복면의 여인이 우진의 발치 앞으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검은 비단 옷은 빗물과 검붉은 피에 젖어 묵직하게 늘어져 있었고 그녀의 왼쪽 쇄골 아래쪽에서는 여전히 핏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우진은 주저없이 여인의 어깨를 감싸 안아 의원 안으로 끌어들였다. 빗물이 바닥재를 적셨지만 개의치 않았다. 뒷문을 신속하게 잠근 우진은 여인을 의원 중앙의 평상 위에 눕혔다.
등불 빛 아래 드러난 여인의 상태는 심각했다.
복면 너머로 보이는 이마와 눈가는 창백하다 못해 푸른빛을 띠고 있었고 입술은 검붉게 말라붙어 있었다.
"상처 때문만이 아니군."
우진은 여인의 복면을 살짝 걷어 냈다. 차가운 땀방울이 맺힌 턱선 아래로 검은 핏줄이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우진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여인의 오른쪽 손목을 잡아챘다.
사부에게 전수받은 의술, 삼문청맥법(三門淸脈法)을 펼칠 때였다.
삼문청맥법은 피부의 표맥(表脈), 기혈이 흐르는 기맥(氣脈) 그리고 생명의 근원인 심맥(心脈)의 세 층을 나누어 진단하는 고도의 진맥법이었다.
우진의 세 손가락이 여인의 요촌척(寸關尺) 맥도 위에 안착했다.
첫 번째 손가락 끝으로 피부 표면의 기운을 읽었다. 쇄골 아래의 자상은 자비 없는 단검에 당한 상처였다. 뼈를 비껴갔으나 근육을 깊게 찢발겨 놓아 출혈이 극심했다.
그러나 두 번째 손가락을 눌러 기맥의 층에 다다르자 우진의 눈동자가 차갑게 흔들렸다.
'이건……?'
여인의 혈관 속에는 단순한 내공의 충돌이나 일반적인 독약이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검은 실타래처럼 가늘고 끈질긴 독기(毒氣)가 혈류를 따라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독기는 혈액을 검게 오염시키며 여인의 정순한 내공을 조금씩 갉아먹는 중이었다.
셋째 손가락으로 심맥을 짚었다. 검은 실 같은 독기는 이미 심장으로 들어가는 관문을 향해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둔다면 해가 뜨기 전에 심맥이 터져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단순한 뱀독이나 당문(唐門)의 독이 아니야. 내공의 흐름을 타고 들어가는 금기(禁忌)의 독이다."
우진의 머릿속에 반년 전 세상을 떠난 사부의 마지막 맥상이 스쳐 지나갔다.
사부가 숨을 거둘 때 손목에서 느껴졌던 그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끈질긴 검은 실의 감촉. 바로 이 맥상과 완벽하게 닮아 있었다.
우진은 입술을 침착하게 깨물었다. 당황할 시간이 없었다. 질문은 환자를 살려 낸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우진은 품 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사부가 남겨 준 유품, 묵직하고 고풍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청동 침통이었다.
침통의 뚜껑을 열자 촛불 아래 둔탁한 광채를 발하는 긴 은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진은 침통에서 가늘고 긴 삼촌침 세 개를 뽑아들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우진은 여인의 상의 깃을 살짝 헤집어 쇄골 부근과 가슴 위의 주요 혈도를 드러냈다.
그의 손가락이 미세한 떨림도 없이 여인의 정혈(頂穴)과 척택(尺澤) 그리고 단중(膻中) 주변의 억맥혈을 향해 거침없이 내려앉았다.
손끝에서 맑은 내공이 은침을 타고 미세하게 흘러들어 갔다.
우진의 무공 수준은 보잘것없는 입문 단계에 불과했지만 기혈의 흐름을 읽고 조율하는 침술의 정밀함만큼은 사부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이어받고 있었다.
은침이 혈도 깊숙이 박히자 여인의 몸이 발작하듯 튀어 올랐다.
"윽……!"
여인의 목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우진은 시술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침을 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돌리며 여인의 독기가 심맥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기혈의 물길을 역으로 비틀어 닫았다.
검은 실 같은 독기가 은침이 만들어 낸 기혈의 벽에 가로막혀 갈 곳을 잃고 쇄골 부근의 상처 쪽으로 뭉쳐들기 시작했다.
피부 위로 거무튀튀한 피가 배어 나왔다.
"일단 독의 진행은 묶었다."
우진은 숨을 가쁘게 내쉬며 이마의 땀을 소매로 닦았다. 완전한 해독은 불가능했다. 독의 뿌리가 이미 기혈 깊숙이 박혀 있었기에 침술로 할 수 있는 것은 독기를 특정 부위에 묶어 두고 발작을 지연시키는 것뿐이었다.
독기를 억누른 우진은 곧바로 실과 바늘을 들었다.
소주로 바늘과 손을 소독한 뒤 여인의 쇄골 아래 찢어진 살점을 신속하게 봉합했다. 상처 부위에 지혈 가루와 마분약(麻分藥)을 두껍게 바르고 깨끗한 지포로 단단히 감아매었다.
모든 처치가 끝났을 때 약탕관의 탕약은 알맞게 달여져 있었다.
우진은 탕약을 사발에 받아 와 여인의 입가에 조금씩 흘려 넣었다. 약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여인의 거친 숨소리가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의원 안에는 다시 빗소리만이 잦아들었다.
우진은 평상 옆 의자에 앉아 탕약 사발을 내려놓으며 여인을 관찰했다.
복면을 완전히 벗겨 낸 여인의 얼굴은 쇄골의 흉터와 어우러져 차갑고 날선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굵고 곧은 눈썹과 굳게 다문 입술은 그녀가 수많은 사선을 넘어온 무인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때 평상 위에 누워 있던 여인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스악!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여인의 손이 우진의 목덜미를 향해 쏘아져 왔다.
의식을 되찾자마자 본능적으로 살기를 드러낸 것이었다. 손가락 끝에는 단검 대신 차가운 내공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우진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덤덤한 눈빛으로 여인의 손목을 살짝 올려다보았다.
여인의 손가락이 우진의 목물대를 불과 한 촌 남겨 두고 멈춰 섰다.
심맥을 억누른 침 때문에 내공을 급격하게 끌어올리자 극심한 통증이 밀려온 탓이었다. 여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쇄골 부근을 손으로 짚었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우진은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침으로 기맥을 꼬아 독기를 묶어 놓았습니다. 강제로 내공을 운용하면 묶어 둔 독기가 한꺼번에 터져 나와 심장이 파열될 테니까요."
여인은 핏기 없는 눈으로 우진을 노려보았다. 경계심과 의혹이 짙게 깔린 경직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놈은…… 누구냐. 여긴 어디지."
"청하성 뒷골목의 청하의원입니다. 저는 의원인 강우진이라고 합니다."
우진은 의자 뒤로 몸을 기대며 건조하게 응대했다.
"손님께서는 비를 타고 문을 두드렸고 독에 타들어 가는 몸으로 내 발치에 쓰러졌습니다. 저는 사부의 유언에 따라 손님을 치료했을 뿐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몸을 살폈다. 쇄골 아래의 자상은 정갈하게 꿰매져 있었고 온몸을 태우던 지독한 열감과 통증도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무엇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젊은 의원의 눈빛에는 아무런 욕망이나 사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
여인은 조용히 숨을 고르며 우진의 목을 향했던 손을 거두었다.
"……독을 알아챘나."
"알아채는 것과 해독하는 것은 다릅니다. 몸 안에 흐르는 검은 독기는 단순한 물건이 아닙니다. 지금은 억눌러 놓았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침법과 희귀한 약재가 더 필요합니다."
우진은 손가락으로 의원의 허름한 천장을 가리켰다.
"어쨌든 목숨은 건졌으니 이제 진료비를 계산할 때입니다."
여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진료비?"
"네. 저는 가난한 의원입니다. 낮에는 약재상에게 외상 대금을 독촉받고 밤에는 탕약을 달이죠. 보시다시피 의원 꼴이 이렇습니다. 은전 세 냥 혹은 그에 상응하는 지혈초나 보혈 약재를 주십시오."
여인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품 안을 어루만졌다.
소지품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도망치는 과정에서 모든 자금과 소지품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없다."
여인은 짧게 뱉었다.
"돈도 약재도 없다."
"그렇습니까."
우진은 예상했다는 듯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야진의 규칙상 돈이나 약재가 없다면 노동이나 정보로도 진료비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굳이 무림의 비밀을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납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면 됩니다."
여인은 우진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환자의 정체를 묻지 않고 돈이 없다고 하자 자연스럽게 다른 대가를 요구하는 태도. 거칠고 험악한 강호에서 보기 드문 눈빛이었다.
여인은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정보라면 하나 있다."
"듣겠습니다."
여인은 낮고 스산한 음성으로 말시울을 뗐다.
"사흘 뒤 해시. 청하성 동문 밖 삼거리에서 청하 표국의 수레가 습격당할 것이다."
우진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청하 표국은 청하성에서 가장 규모가 큰 표국 중 하나였으며 수많은 세가와 상단의 물자를 수송하는 강호의 주요 축이었다. 그런 표국의 수레가 습격당한다는 소식은 단순한 저잣거리 소문이 아니었다.
"그 수레에 무엇이 들어 있기에 습격한다는 겁니까?"
"거기까지는 진료비 범위를 넘어선다."
여인은 서늘하게 말을 잘랐다.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였다.
우진은 낯선 정보의 무게를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 정도 정보라면 은전 세 냥의 가치는 충분하군요. 진료비는 그것으로 받겠습니다."
우진은 책상으로 걸어가 작은 장부를 꺼냈다. 사부가 남긴 암호 기호로 환자의 증상과 받은 진료비를 기록하는 야진 전용 장부였다.
우진은 붓을 들어 장부에 적었다.
'늦가을 해시. 자상 및 검은 독기 중독. 억맥침 시술. 진료비: 청하 표국 습격 예고.'
글씨를 다 적고 뒤를 돌았을 때 평상 위는 이미 비어 있었다.
여인은 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창문을 통해 밤비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닫힌 창문 사이로 찬바람이 들이쳐 촛불을 흔들었다.
우진은 비어 있는 평상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손님이 남기고 간 검은 실 같은 독기의 잔향과 사흘 뒤 벌어질 표국 습격이라는 짧은 비밀 한 줄.
"청하 표국이라……."
우진은 사부의 청동 침통을 품 안에 깊이 집어넣었다.
가난한 의원의 작고 조용한 야근에 마침내 강호의 어두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비는 밤이 깊어질수록 더욱 거세게 청하의원의 지붕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