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대공과의 이혼은 거절합니다

54화: 떠날 수 있는 자리
북쪽 문성으로 떠났던 호위대의 전령이 대공성으로 돌아온 것은 해가 서쪽 산등성이를 붉게 물들이며 넘어가던 무렵이었다.
집무실의 두꺼운 문이 거칠게 열리고 아르웬이 들어섰다. 그의 털 망토 위에는 북풍에 얼어붙은 눈발과 함께 잿빛 가루가 엉겨 붙어 있었다.
"전하. 북쪽 문성 긴급 물자 수레가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카시안은 집무실 창가에서 돌아서며 아르웬의 망토 끝을 살폈다.
"수레의 약초와 곡물은 온전한가."
"예. 대공비 전하의 지시대로 열병 약초와 설백 뿌리는 담요 사이에 겹겹이 보호되어 얼지 않았습니다. 성문 안 진료소와 민가에 즉시 배분되기 시작했습니다. 기침하던 아이들에게도 따뜻한 탕약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카시안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아르웬의 표정은 완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가슴 안쪽에서 밀랍을 두껍게 먹인 가죽 주머니를 꺼내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대공비 전하의 당부대로 병사들의 살갗이 직접 닿지 않도록 구리 집게로 채취한 시료입니다. 성문 동쪽 돌틈에서 긁어낸 검은 서리입니다."
카시안이 가죽 주머니의 매듭을 풀었다. 주머니 입구가 벌어지자마자 서늘한 냉기가 집무실의 온기를 가르며 번져 나갔다.
안에는 거친 입자의 검은 결정들이 들어 있었다. 얼음이라기보다는 그을린 숯가루가 얼어붙은 듯한 형상이었다. 가까이 손을 가져가자 찌르는 듯한 한기와 함께 손끝 감각이 희미해지는 둔탁한 저림이 올라왔다.
로젤리가 돋보기와 작은 촛대를 들고 다가와 시료를 비추었다.
"단순한 얼음이 아닙니다. 결정 틈새에 은빛 가루가 섞여 있습니다."
로젤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시료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몹시 희미하지만... 대공성 서쪽 탑의 촛대와 황궁 샹들리에에서 맡았던 것과 같은 계열의 단 향이 뱁니다. 북부의 혹한 때문에 굳어 있었을 뿐 온기가 닿으면 피어오르는 구조입니다."
"문성의 돌틈까지 같은 손길이 닿아 있었다는 뜻이군."
카시안의 목소리가 바닥 모를 깊이로 가라앉았다. 그의 손등 위로 검은 비늘의 윤곽이 꿈틀거리며 솟아올랐으나 그는 주먹을 굳게 쥐어 이를 억눌렀다.
"문성에 머물던 황태후궁 확인표의 출처는 확인했나."
아르웬이 품에서 붉은 봉인이 찍힌 보고서 한 장을 펼쳤다.
"문성 수문장에게 확인표를 전달한 자는 황태후궁 사절단의 공식 수행원이 아니었습니다. 황도와 북부를 잇는 민간 상단의 전령을 통해 전달된 비공식 지령이었습니다. 서기관실의 하부 표식이 찍혀 있었으나 사절단 대표인 이벨린의 정식 결재인은 빠져 있었습니다."
"사절단조차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뒤에서 은밀히 움직인 통로였군."
회랑 한쪽에서 기록을 지켜보던 마르바 라운이 침을 삼키며 나섰다.
"전하. 황태후궁의 공식 명령과 별개로 움직이는 하부 전달선이 존재한다면 이는 사절단 내부의 분열이거나 황도 내부의 또 다른 세력이 개입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정황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라."
카시안이 낮게 잘라 말했다.
"황태후궁 확인표는 정식 외교 사절의 결재를 거치지 않은 비공식 경로로 반입되었으며 문성의 검은 서리에서는 미량의 은빛 가루와 단 향이 검출되었다고 적어라. 그 어떤 문장도 에리나의 뜻으로 왜곡하지 못하게 해라."
로젤리의 펜촉이 사각거리며 종이 위를 빠르게 달렸다.
아르웬과 전령들이 물러난 뒤 집무실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카시안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북쪽 회복동의 창문에 옅은 주황빛 등불이 걸려 있었다.
에리나는 그곳에서 창밖의 성에를 바라보며 자신이 내릴 선택의 무게를 견디고 있을 터였다. 삼 일이라는 시간은 황태후궁의 압박이기도 했지만 에리나 자신에게도 가혹한 결단의 시간이었다.
카시안은 책상 서랍 깊은 곳에서 두꺼운 양피지 뭉치를 꺼냈다.
"에커리."
대기하고 있던 가문 법률관 에커리 몬르디아가 조용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예, 전하."
"문서를 작성한다."
카시안은 양피지 위에 가주의 권능을 상징하는 인장을 올려놓았다.
"북부 남쪽 경계의 별장과 부속 온실 그리고 그곳에 딸린 약초원 전체를 발레리우스 대공가의 가문 재산에서 완전히 분리한다. 소유권은 에리나 베르딘의 단독 명의로 귀속시키며 대공가의 어떠한 부채나 의무도 이에 저당 잡힐 수 없도록 북부 상법 특례 신탁으로 묶어라."
에커리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전하. 그것은 당초 혼인 계약서에 명시되었던 이혼 위자료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규모입니다. 더욱이 완전한 독립 신탁으로 묶어 버리면 베르딘 백작가뿐 아니라 황실 법정조차 그 자산에 손을 댈 수 없게 됩니다. 만약 대공비 전하께서 정말로 떠나시겠다고 결정하시면..."
"떠나게 하기 위한 문서다."
카시안의 대답은 담담했으나 그 안에 담긴 의지는 바위처럼 단단했다.
"전하!"
"궁지에 몰려 갈 곳이 없어 내 곁에 머무는 것은 선택이 아니다. 베르딘 백작의 빚에 쫓기고 황실의 위협에 떨며 어쩔 수 없이 내 품에 숨는 것은 내가 바란 것이 아니다."
카시안은 에커리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녀가 언제든 이 성의 문을 열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자기 힘으로 온실을 가꾸고 약초를 기르며 살아갈 수 있는 완전한 땅이 손에 쥐어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떠나는 것도, 남는 것도 온전한 그녀의 선택이 된다."
에커리는 숨을 들이켰다.
그는 카시안이 대공비를 얼마나 깊이 갈망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밤마다 괴물로 변해 가던 그를 인간으로 붙들어 준 유일한 빛이었고 생전 처음으로 곁에 두고 싶어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손으로 그녀가 완벽하게 자립할 수 있는 날개를 달아 주고 있었다.
"전하... 이 문서를 건네시면 대공비 전하께서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떠나실 수도 있습니다. 대공가에 빚진 것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니까요."
"그렇다면 그것이 에리나의 뜻이다."
카시안은 망설임 없이 인장을 쥐었다.
푸른 밀랍이 양피지 모서리에 떨어졌고 발레리우스 가문의 인장이 깊게 찍혔다.
"에리나가 내 곁에 남는다면 그것은 구걸이나 속박 때문이 아니어야 한다. 오직 그녀 자신이 원해서여야 한다. 서명해라."
에커리는 떨리는 손으로 가문 법률관의 부서명을 마쳤다. 잉크가 마르는 동안 집무실 안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로젤리. 이 서류와 문성 정찰 보고서를 회복동으로 가져간다."
카시안은 서류를 챙겨 들고 집무실을 나섰다.
북쪽 회복동 앞 회랑은 차가운 정취로 가득 차 있었다.
카시안은 문 앞 세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는 손을 뻗어 문을 바로 열지 않았다. 에리나가 남긴 세 가지 규칙을 그는 한 치도 어길 생각이 없었다.
똑. 똑. 똑.
세 번의 규칙적인 노크 소리가 차가운 회랑에 울려 퍼졌다.
카시안은 숨을 고르며 문 안쪽의 기척을 기다렸다.
안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옷자락 소리와 함께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미나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문틈으로 흘러나왔다.
"대공비 전하께서 문 앞 탁자에 서류를 놓으시라 하셨습니다."
"알겠다."
카시안은 문을 억지로 열지 않고 문 앞 작은 원목 탁자 위에 문성 정찰 보고서와 방금 작성한 재정 분리 문서를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문성으로 간 수레는 무사히 도착했다. 약초와 담요는 상하지 않았고 주민들에게 빠짐없이 나누어졌다. 성문 돌틈의 검은 서리 시료를 가져왔으니 네가 볼 수 있을 때 확인해라."
문 안쪽에서 작게 안도의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카시안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또 하나의 문서를 두었다. 네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남쪽 별장과 온실은 이제 완전한 네 것이다. 베르딘 백작도, 황실도, 심지어 나조차도 그곳을 빼앗거나 간섭할 수 없다."
문 너머에서 긴 침묵이 흘렀다.
미나가 문을 아주 조금 열어 탁자 위의 서류를 안으로 조심스럽게 가져갔다. 문틈 사이로 마른 약초 향과 함께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에리나의 단정한 그림자가 언뜻 비쳤다.
에리나는 무릎 위에 놓인 양피지를 내려다보았다.
문성 주민들이 약초를 받고 열을 내리고 있다는 따뜻한 보고 아래 카시안의 친필 서명이 담긴 재정 신탁 문서가 놓여 있었다.
어디에도 대공가의 조건은 적혀 있지 않았다.
언제까지 머물러야 한다거나 대공가의 안녕을 위해 능력을 써야 한다는 단 한 줄의 단서 조항도 붙어 있지 않았다.
처음 계약을 맺을 때 그녀는 그가 괴물처럼 자신을 가두고 이용하려 할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언제든 도망칠 수 있는 문을 만들기 위해 계약서를 쓰고 거처를 요구했었다.
그런데 지금 카시안은 그녀가 요구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완전한 독립의 길을 제 손으로 닦아 건네주고 있었다.
속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온전한 한 사람으로 존중하기 위해서.
에리나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게 조여 오며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이 차올랐다.
"대공님."
에리나의 맑은 목소리가 문틈을 넘어 회랑에 닿았다.
"듣고 있다."
카시안은 문턱을 넘지 않은 채 담담히 답했다.
"왜 이런 문서를 보냈어요?"
"네가 두려워하지 않고 선택하게 하기 위해서다."
카시안의 목소리는 고요하고 다정했다.
"내 곁에 남는 것이 너를 옭아매는 덫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떠나더라도 너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온전히 너로서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일 네 입으로 나올 말이 진정한 너의 말이 될 테니까."
에리나는 문서를 품에 가만히 끌어안았다. 차가운 양피지 위에서 카시안이 남긴 묵직한 온기가 전해지는 듯했다.
"삼 일의 마지막 날 아침..."
에리나는 떨리는 숨을 천천히 내쉬며 말했다.
"제가 이 문을 직접 열게요."
"기다리겠다."
카시안은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때 회랑 끝 보존실 방향에서 둔탁한 진동과 함께 검은 봉인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황태후궁의 명령서가 반응하고 있었다.
붉은빛이 번뜩이며 양피지 표면에 새로운 글자들이 타오르듯 새겨졌다.
대공비 재산 분할 징후 감지. 파기 절차 준비.
마르바 라운이 경악하며 문구를 읽었다.
"황태후궁이 대공가의 자산 신탁 움직임을 감지했습니다! 대공비 전하의 이탈을 기정사실로 보고 파기 절차를 강제로 앞당기려 합니다!"
카시안은 서늘한 눈빛으로 요동치는 명령서를 내려다보았다.
"로젤리, 답신을 써라."
그는 명령서 위에 차가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말했다.
"대공가의 재정 정리는 가문의 정당한 통치 권한이며 황태후궁의 간섭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에리나 발레리우스는 아직 단 한마디도 파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카시안은 손을 뻗어 명령서가 든 보존함을 단단히 덮었다.
"내일 아침까지 그 어떤 칙서도 이 회랑을 넘지 못한다."
어둠이 대공성 북쪽 회복동을 완전히 감싸 안았다.
창가에 선 에리나는 건조실에서 가져온 마른 약초 잎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손끝에서 피어오른 아주 미세한 녹색 빛이 마른 잎의 결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제 삼 일의 마지막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열어야 할 문은 더 이상 도망치기 위한 구멍이 아니었다.
자신의 삶과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람들을 온전히 마주하기 위한 진정한 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