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귀환 무신의 백수 생활

5화: 전입신고보다 어려운 전산망
"인증서 비밀번호가 세 번 틀렸습니다. 전산 담당자에게 문의하십시오."
모니터 한가운데 떠오른 붉은색 경고 창을 보며 강한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경테를 살짝 올려 고쳐 쓴 그의 손가락 끝이 키보드 자판 위에서 잘게 떨리고 있었다.
무림을 제패할 당시 십대고수의 혈도를 순식간에 찍어 누르던 손가락이었다. 찰나의 기운 조절로 거대한 암석을 흔적도 없이 가루로 만들던 무의 정수가 그 손끝에 담겨 있었다.
하지만 화면 속 사각형 입력 칸은 한얼의 절륜한 내공 수양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게 무슨 공무원 전산망이 이러하단 말인가."
한얼은 헛웃음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비밀번호에 영문 대소문자와 특수문자, 숫자까지 조합하라는 규칙은 혈마교의 필살 암호문보다 난해했다. 거기에 보안 프로그램을 네 개나 새로 설치하라는 안내문은 마치 진법의 환상에 걸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한얼 씨, 아직도 로그인 못 했어요?"
박민지가 얼음이 가득 담긴 아메리카노 컵을 들고 다가왔다.
그녀는 한얼의 모니터를 힐끗 보더니 이마를 짚었다.
"비밀번호를 또 틀렸어요? 세 번 틀리면 전산 담당자한테 전화해서 초기화해야 하는데."
"박 서기님."
한얼이 자못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이 지방행정 전산망이라는 물건에 마공이라도 걸려 있는 것 아닙니까? 분명 맞게 쳤는데 자꾸 이상한 창이 떠서 앞길을 막습니다."
"마공이 아니라 보안 모듈이에요."
박민지는 커피를 책상에 내려놓고 한얼의 의자 옆으로 다가섰다.
"팝업 차단 해제 누르고 키보드 보안 프로그램부터 다시 실행하세요. 전입신고보다 현장 보고서 입력이 백 배는 쉬운 거니까 빨리 적응해야 해요."
건너편 책상에서 서류를 훑던 박석두 과장이 고개를 들었다.
"강한얼 씨! 구청 보고 시한 40분 남았다! 그거 제때 입력 못 하면 오늘 전체 야근이야!"
야근.
그 두 글자가 한얼의 귓가를 벼락처럼 때렸다.
정시 퇴근이야말로 그가 무림의 피비린내 나는 권좌를 버리고 지구로 돌아온 유일한 이유였다. 마교의 교주가 쳐들어온다는 소식보다 야근이라는 단어가 백 배는 더 끔찍하게 다가왔다.
"입력하겠습니다. 당장 끝내겠습니다."
한얼은 박민지가 짚어주는 순서대로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발급 일자, 물품 분류, 배출 장소, 현장 정황.
칸을 채워 나갈 때마다 식은땀이 흘렀다. 자판을 누르는 강도를 조금이라도 조절하지 못하면 플라스틱 키보드가 박살 날 것 같아 내공을 극도로 억제해야 했다. 전산망 조작을 마치고 나자 전신에 진땀이 배어났다.
"잘하셨어요."
박민지가 화면의 입력 완료 버튼을 대신 눌러주며 말했다.
"그런데 어제 그 대형 폐기물 스티커 말이에요. 수동 발급 양식 이력을 좀 조회해 봤거든요."
한얼은 안경을 고쳐 쓰며 고개를 돌렸다.
"단서가 나왔습니까?"
"네. 바코드 배열이랑 위조 양식을 전산망으로 역추적해 봤어요."
박민지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모니터를 가리켰다.
"동작구 북쪽 경계 상가 구역이에요. 재개발을 앞두고 공가가 많은 곳인데 최근 한 달 동안 불법 투기 신고가 이상할 정도로 몰린 지역이에요."
한얼의 손이 자연스럽게 바지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주머니 안쪽에 둔 검은 게이트핵 파편이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파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이 북서쪽 상가 방향을 향해 가늘게 당겨지는 게 느껴졌다.
박민지가 찾아낸 전산망 기록의 위치와 파편이 반응하는 방향이 정확히 일치했다.
"그 동네는 폐건물이 많아서 민간인 출입이 적어요."
박민지가 서류 봉투를 챙기며 말을 이었다.
"과장님이 오늘 오후에 우리 둘더러 북쪽 경계 구역 현장 실태 조사 다녀오라고 하셨어요. 수동 스티커가 더 돌아다니는지 확인해야 하거든요."
"알겠습니다."
한얼은 주머니 속 파편을 지긋이 쥐었다.
"현장 조사는 좋습니다. 컴퓨터 앞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합니다."
같은 시각, 신성 길드 서울 본부 관제실.
이설아는 어두운 조명 아래서 세 개의 대형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화면에는 주민센터 앞 게이트 발생 당시의 CCTV 영상과 어제 먹자골목 입구의 영상이 초단위로 분할되어 재생되고 있었다.
"팀장님, 그 신입 공무원 건 말입니다."
뒤에 서 있던 보조 헌터가 서류를 내밀었다.
"관리국 공식 발표대로 자연 붕괴 및 민간인 협조로 처리하고 보고서 마감할까요?"
"아니."
이설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마우스를 조작하자 CCTV 영상이 0.1초 단위로 정지했다.
"이 동선을 봐."
이설아가 화면 하나를 가리켰다.
"게이트가 열린 직후 강한얼의 이동 경로야. 일반인은 당황하면 넓은 도로로 뛰거나 제자리에 굳어버려. 하지만 이 사람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변압기 상자 뒤로 숨었어."
화면 속 한얼은 노란 학원 버스 뒤편의 완벽한 사각지대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골목 사건도 마찬가지야."
이설아가 두 번째 모니터를 틀었다.
"CCTV 12대의 각도를 대조해 봤어. 강한얼이 축대 뒤로 물러난 위치는 3번 카메라와 7번 카메라가 동시에 놓치는 유일한 지점이야. 0.5미터만 옆으로 비켜섰어도 카메라에 잡혔을 텐데 정확히 사각지대 한가운데 섰어."
보조 헌터가 침을 삼켰다.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우연이 세 번 반복되면 계산된 행동이지."
이설아는 모니터 속 한얼의 얼굴을 확대했다. 뿔테 안경을 쓰고 순진한 표정으로 서류를 챙기는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 어설픔 뒤에 숨겨진 서늘한 정적이 보였다.
버스 문이 뜯겨 나간 금속 변형 각도.
마수 사체의 목이 매끄럽게 꺾인 지점.
그리고 모든 사건이 끝난 뒤 현장에 가장 먼저 남겨진 공무원 이름표.
"강한얼이라는 사람, 카메라 각도를 전부 알고 있어."
이설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장 위에 경량 헌터 코트를 걸치는 그녀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오늘 동작구 주민센터 직원들이 북쪽 경계 상가 구역으로 출동한다고 했지?"
"네, 대형 폐기물 수동 스티커 관련 현장 점검이라고 합니다."
"비공식으로 따라붙는다. 차 준비해."
이설아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이번에는 사각지대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직접 확인할 생각이었다.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내리쬐는 동작구 북쪽 경계 상가 구역.
이곳은 재개발이 지연되면서 오랫동안 방치된 붉은 벽돌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이었다. 깨진 창문과 빛바랜 간판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여기 정말 을씨년스럽네요."
박민지가 태블릿 PC를 들고 사진을 찍으며 중얼거렸다.
"골목마다 버려진 가구랑 쓰레기 더미가 가득해요. 스티커도 안 붙은 것들이 태반이고요."
"사람의 발길이 끊기면 기운이 흉해지는 법입니다."
한얼이 옆에서 차분하게 답했다.
그의 눈은 바닥의 흙먼지와 벽면의 작은 균열들을 훑고 있었다.
바지 주머니 속 게이트핵 파편이 이전보다 훨씬 더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쇠 비린내와 함께 썩은 마력이 은밀하게 흘러나오는 구역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얼 씨, 저쪽 골목 끝 가구 더미 좀 확인해 봐요."
박민지가 손가락으로 좁은 틈새를 가리켰다.
한얼은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장롱과 부서진 소파가 엉켜 있는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자 공기의 온도가 뚝 떨어졌다.
장롱 뒤편의 시멘트 벽면에 손가락 굵기만 한 검은 균열이 그어져 있었다.
자연 게이트가 아니었다. 인위적으로 공간을 찢어 놓은 듯한 흔적이었다. 균열 틈새로 검은 실 형태의 마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붉은 눈을 한 소형 마수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쥐와 늑대를 섞어 놓은 듯한 형상이었는데 박민지의 발소리를 듣고 털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음, 가구 배출 상태가 아주 안 좋네요."
박민지가 한얼의 뒤를 따라 골목 안으로 발을 디디려 했다.
마수가 박민지의 목덜미를 향해 튀어 오르기 직전이었다.
한얼은 반응하지 않는 척 자연스럽게 박민지의 앞을 가로막았다.
"박 서기님, 저쪽 길가 표지판 각도가 이상합니다. 전산망 제출용 사진은 저쪽에서 찍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예? 표지판이요?"
박민지가 고개를 돌려 길가를 바라보는 찰나였다.
한얼은 오른손을 등 뒤로 돌려 손가락 하나를 튕겼다.
지잉.
파공음조차 나지 않는 미세한 내공의 실이 한얼의 손끝에서 쏘아져 나갔다.
점혈기.
기운의 바늘은 허공을 날던 마수의 미간과 벽면의 검은 균열을 동시에 관통했다.
퍽.
마수는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 장롱 뒤편으로 떨어졌다. 벽면의 검은 균열 역시 혈도가 짚인 것처럼 순식간에 메워지며 마력이 소멸했다.
모든 것이 박민지가 고개를 돌린 1초 사이에 끝났다.
"잘 나오는데요? 표지판 사진도 찍었어요."
박민지가 태블릿을 내리며 다시 한얼을 보았다.
"방금 장롱 뒤에서 무슨 소리 안 났어요?"
"바람에 낡은 목재가 깨진 소리입니다."
한얼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안경을 올려 썼다.
"조사가 끝났으면 일찍 복귀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곳 공기가 몸에 안 좋습니다."
"그러게요. 기분이 좀 찜찜하네요."
박민지가 돌아서서 골목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한얼은 장롱 뒤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뒤를 따랐다.
그러나 골목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한얼의 발걸음이 멈췄다.
대로변 끝에 검은색 고급 SUV 한 대가 조용히 멈춰 서 있었다.
차문이 열리고 이설아가 내렸다.
그녀는 경량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똑바로 한얼을 향해 걸어왔다. 차가운 눈동자가 한얼의 얼굴과 그가 방금 나온 골목 안쪽을 번갈아 훑었다.
"강한얼 씨."
이설아가 한얼의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런 으슥한 재개발 구역까지 민원 조사를 나오셨네요."
박민지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어? 신성 길드의 이설아 팀장님 아니세요? 여기는 무슨 일로..."
"근처 던전 순찰 중에 익숙한 얼굴이 보여서요."
이설아는 박민지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시선을 한얼에게 고정했다.
"강한얼 씨가 계신 곳은 항상 특이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단순한 의심을 넘어 서 있었다. CCTV 사각지대 데이터와 현장 위치를 대조하고 온 추적자의 확신이 담겨 있었다.
한얼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도 정시 퇴근의 꿈은 무참히 깨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