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재생하는 국선변호인

1화: 보이지 않는 증인
서울서부구치소 접견실의 공기는 언제나 축축하고 차가웠다.
유리창 너머로 빗줄기가 끊임없이 줄을 그었다. 초겨울 비는 건물의 오래된 콘크리트 벽면을 타고 내리며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를 냈다.
한도윤은 마주 앉은 청년의 서류를 펼쳤다.
'윤재민, 24세. 야간 배달 대행 기사.'
죄명은 강도살인.
이틀 전 마포구의 한 상가 건물 지하 주차장에서 프리랜서 IT 개발자 곽민우를 흉기로 찔러 살해하고 현장에서 도주한 혐의였다.
경찰이 작성한 수사 기록은 일사천리로 작성되어 있었다. 사건 발생 시각 인근 출입 기록, 피해자의 옷에서 발견된 배달 기사의 지문 그리고 피의자 윤재민이 직접 서명한 자백 조서.
"윤재민 씨."
도윤이 묵직한 서류철에서 눈을 떼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서울서부 공공변호센터에서 파견된 국선전담변호사 한도윤입니다."
재민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수의 차림의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고 두 손은 쇠고랑에 묶인 채 불안하게 손톱 주변 살점을 짓이기고 있었다.
"변호사면 뭐 합니까."
재민의 목소리는 갈갈이 찢긴 것처럼 갈라져 있었다.
"어차피 다 똑같잖아요. 경찰도 검사도 형사소송법이 어쩌니 하면서 내 말은 한마디도 안 들었는데. 변호사님도 그냥 자백하고 형량이나 줄이자고 하러 온 거 아닙니까?"
"자백 조서에 서명하셨더군요."
도윤은 비난 대신 건조한 사실만을 짚었다.
"조서 내용을 읽어봤습니다. 흉기를 미리 준비했고 금품을 빼앗으려다 반항하자 찔렀다고 적혀 있네요. 피의자 신문 조사에서 이 내용에 전부 동의하셨습니까?"
"동의는 무슨 놈의 동의입니까!"
재민이 왈칵 소리를 지르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차가운 아크릴 가림막에 그의 거친 호흡이 하얗게 김을 내뿜었다.
"밤새 잠도 안 재우고 형사 셋이 둘러싸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지문도 나왔고 시시티비도 다 찍혔다면서 지금 인정 안 하면 무기징역 받는다고 했습니다! 소희…… 내 여동생 혼자 집에 있는데 자백하면 집행유예로 나가게 해준다고 해서 그냥 도장 찍은 겁니다!"
재민의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억울함과 공포 그리고 자기 손으로 서명해 버린 자백 조서에 대한 절망이 범벅되어 있었다.
도윤은 그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억울한 죄인들의 눈은 항상 비슷했다. 거대한 사법 시스템이라는 톱니바퀴에 짓눌려 스스로 톱니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눈이었다.
"윤재민 씨. 경찰 말과 달리 자백만으로 집행유예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강도살인은 최하 징역 10년 이상입니다."
재민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셔나갔다.
"네? 하, 하지만 형사들이 분명……."
"거짓말입니다.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흔한 유도 수사죠."
도윤은 서류 가방에서 국선변호인 선임 위임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선택하셔야 합니다. 경찰이 써준 소설대로 감옥에 가실 건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진실을 말하고 싸우실 건지."
"진실을 말하면…… 믿어줍니까?"
재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도 안 믿어줬습니다. 난 칼을 가져간 적도 없고 찌른 적도 없어요. 주차장에서 싸운 건 맞지만 내가 도망칠 때까지 그 사람은 멀쩡히 서 있었습니다!"
도윤은 볼펜을 위임장 아래쪽에 놓으며 말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단, 제가 서류를 검토하고 현장을 확인하는 동안 절대로 저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재민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볼펜을 잡았다. 서명란에 이름을 적어 내리는 손가락 마디에 하얗게 힘이 들어갔다.
"다 적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도윤은 위임장을 거두기 위해 손을 뻗었다.
테이블 중앙에서 도윤의 손가락이 재민의 손목 끝자락과 스쳤다. 피부와 피부가 직접 닿는 순간이었다.
촥—!
뇌리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이명이 도윤의 고막을 때렸다. 시야가 순간적으로 검게 물들었다가 이내 거친 잡음과 함께 낯선 풍경으로 빠르게 덮여 씌워졌다.
도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구치소 접견실이 아니었다.
어둡고 습한 지하 주차장이었다. 천장의 형광등이 치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불안하게 펄럭였다. 빗물이 주차장 바닥의 패인 홈을 따라 검게 흘러들고 있었다.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재민의 시선이었다.
재민의 두 손에는 배달용 헬멧이 쥐어져 있었고 그의 손은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바닥에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곽민우였다.
곽민우의 복부에서 붉은 피가 검은 시멘트 바닥으로 빠르게 번져 나가고 있었다. 곽민우는 거친 숨을 내쉬며 도윤, 아니 재민의 바지단에 손을 뻗었다.
"컥…… 쿨럭!"
곽민우의 입술 사이로 핏덩이가 튀었다. 그의 눈동자는 재민을 보고 있지 않았다. 재민의 머리 너머, 주차장 천장 구석을 향해 있었다.
"카메라……."
곽민우가 피투성이가 된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키며 헐떡였다.
"카메라를…… 보라……."
그 소리는 억울한 피해자의 마지막 유언이자 요청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곽민우의 시선 너머 주차장 사각지대인 대형 콘크리트 기둥 뒤편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움직였다.
재민은 그쪽을 보지 못했지만 공명 현상으로 시야 전체의 잔상을 포착하는 도윤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짙은 회색 패딩에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
그 손이 기둥 뒤로 슥 물러나더니 주차장 구석에 시동을 켜둔 채 대기하고 있던 회색 밴 차량의 브레이크등이 주황빛으로 짧게 두 번 번쩍였다.
칼을 쥔 것은 재민이 아니었다.
재민은 바닥의 피를 보고 핏기가 싹 가신 채 헬멧을 떨어뜨릴 뻔하며 뒤로 걸음질 쳤다.
"어, 어떡해…… 난 아니야! 난 안 그랬어!"
재민이 비명을 지르며 오토바이가 서 있는 출구 쪽으로 정신없이 달려나갔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였다.
그리고 곽민우의 손이 바닥으로 차갑게 떨어졌다.
90초.
정확히 90초가 지나자 환영처럼 켜졌던 공간이 순식간에 암전되었다.
"흡……!"
도윤은 억눌린 숨을 토해내며 눈을 떠올렸다.
구치소 접견실의 차가운 조명이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관자놀이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편두통이 밀려왔다.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턱밑으로 떨어졌다.
'첫 번째 기억 감정…….'
도윤은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자신의 능력이 발동한 뒤 치러야 하는 대가가 온몸의 감각을 따라 밀려들었다. 뇌 속의 방 한 칸이 꺼지듯 도윤의 개인적인 기억 조각 하나가 빠르게 흐려져 사라졌다.
어린 시절 시골 할머니 집 평상에 앉아 마시던 구수한 보리차의 냄새.
그 냄새가 무엇이었는지 어떤 느낌이었는지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잡히지 않았다. 무채색의 단어만 남고 감각의 기억이 영구히 지워진 것이다.
도윤은 입술을 깨물며 통증을 참아냈다. 대가는 비쌌지만 얻어낸 단서는 명확했다.
윤재민은 진범이 아니다. 현장에는 제3자가 존재했고 피해자는 죽기 직전 '카메라'를 지목했다.
"변호사님?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너무 하얗게 질리셨는데……."
재민이 불안한 눈빛으로 도윤을 바라보았다.
도윤은 호흡을 가다듬고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리고 서류철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윤재민 씨."
"네, 네?"
"현장에서 도망칠 때 피해자 곽민우 씨가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뭐라고 했습니까?"
재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 그게 무슨……."
"곽민우 씨가 쓰러진 채 당신 바짓가랑이를 잡고 분명히 입을 떼었습니다. 천장을 가리키면서요."
재민의 입이 턱 벌어졌다.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던 재민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도윤을 주시했다.
"어, 어떻게 아십니까? 경찰에는 전혀 말 안 했습니다! 형사들이 믿어주지도 않을 것 같았고 내가 무서워서 도망친 거 들키면 바로 범인으로 몰릴까 봐 아무한테도 안 했는데……!"
"정확히 뭐라고 했습니까?"
"카, 카메라를 보라고 했습니다. 천장에 달린 카메라를 보라고……."
재민의 목소리에 비로소 진실의 무게가 실렸다.
"하지만 경찰은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현장 수사 보고서에 지하 주차장 CCTV는 일주일 전부터 고장 나서 꺼져 있었다고 적혀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 말을 아예 들어주지도 않았습니다."
도윤은 경찰의 수사 보고서를 다시 넘겼다.
[마포구 OO빌딩 지하 2층 주차장 CCTV: 전력 제어기 결함으로 인한 일시 작동 중단 상태 확인됨.]
경찰 기록은 명확했다. CCTV는 꺼져 있었고 현장에서 발견된 것은 재민의 지문뿐이었다.
하지만 도윤이 본 기억 속 피해자는 분명히 CCTV를 지목했다. 그리고 콘크리트 기둥 뒤의 가죽 장갑과 회색 밴.
'CCTV가 정말 꺼져 있었을까? 아니면 누군가 꺼진 것처럼 위장했거나 특정 시간대의 기록만 지운 것인가.'
기억은 법정에 제출할 수 있는 증거가 아니다. "제가 환영을 봤는데 윤재민 씨는 무죄입니다"라고 판사에게 말하는 순간 도윤은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정신병원에 갇힐 것이다.
기억은 오직 수사의 방향을 잡는 단서일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90초의 진실을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법적 물증과 논리로 번역해야 한다.
"윤재민 씨."
도윤이 서류철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장 실질심사 때까지 구속을 막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검찰이 자백 조서를 들고 나올 테니까요."
"그럼…… 저는 그냥 구속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도윤의 눈빛이 단단하게 빛났다.
"경찰이 꺼져 있다고 주장한 그 카메라의 전력 기록과 메타데이터를 샅샅이 파헤칠 겁니다. 당신이 칼을 쥐지 않았다는 증거를 반드시 법정에 세우겠습니다."
서울서부지방법원 종합민원실 복도.
구속영장 청구서가 접수되는 형사 신청과 앞은 영장 실질심사를 준비하는 검사와 수사관들로 분주했다.
도윤이 복도를 지나가던 중 차가운 무채색 정장 차림의 여성이 서류 봉투를 든 채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서울서부지검 형사3부 서윤아 검사였다.
단정하게 잘라낸 짧은 단발머리에 날카로운 눈매. 서윤아는 사건의 허점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검사로 유명했다.
"한도윤 변호사님."
윤아가 먼저 걸음을 멈추고 도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서리 내린 짚처럼 차갑고 명확했다.
"윤재민 피의자 접견 다녀오시는 길인가요?"
"네, 서 검사님. 방금 접견을 마쳤습니다."
윤아는 손에 든 영장 청구서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시간 낭비하지 마시죠. 피의자의 지문이 피해자의 상의에서 명확히 검출됐고 피의자가 직접 작성한 자백 조서까지 제출됐습니다. 오늘 오후 영장 실질심사에서 구속영장은 발부될 겁니다."
"그 자백 조서, 강압에 의해 작성됐습니다."
도윤이 바로 맞받아쳤다.
"피의자는 36시간 동안 수면을 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집행유예로 풀어주겠다는 경찰의 거짓 유도에 속아 도장을 찍었습니다. 조서의 임의성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윤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피의자들의 흔한 변명입니다. 현장에 있었던 것도 인정했고 지문도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피의자는 사건 직후 현장에서 도주했습니다."
"현장에서 도주한 것과 사람을 살해한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도윤이 윤아를 똑바로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경찰 수사 보고서에 지하 주차장 CCTV가 고장으로 전면 중단됐다고 되어 있더군요. 그 고장 보고서, 전력 제어 로그까지 직접 확인하신 겁니까?"
윤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찰나의 경계심이 스쳐 지나갔다.
"수사팀의 공식 감정 보고서입니다. 검찰은 수사기관의 공식 절차를 신뢰합니다."
"공식 절차라는 이름 뒤에 숨은 오류일 수도 있습니다."
도윤은 물러서지 않았다.
"피해자 곽민우 씨가 숨지기 직전 현장의 카메라를 지목했습니다. CCTV 전력이 정말로 끊겨 있었는지 아니면 누군가 수동으로 전원을 차단했는지 검찰 조율 기록을 요구하겠습니다."
윤아는 건조하게 실소를 흘렸다.
"한 변호사님. 변호인의 의욕은 높이 사지만 법정은 변호사의 '감'이나 피고인의 주장을 들어주는 곳이 아닙니다. 엄격한 증거의 승부죠."
"맞습니다. 증거의 승부죠."
도윤이 서류 가방을 고쳐 쥐며 나직하게 답했다.
"그렇기 때문에 검찰이 제출한 자백 조서가 얼마나 허술한 증거인지 영장 심문에서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윤아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지나쳐 걸어갔다. 구두굽 소리가 차가운 복도 바닥에 또박또박 울렸다.
도윤은 윤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싸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90초의 기억. 그 기억이 가리키는 보이지 않는 증인을 찾아내기 위해 도윤은 빗속의 도시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