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실물 장부로 문파 재건함

5화: 비어 있던 보관 번호
수로 서고의 습기는 종이보다 먼저 사람의 손끝을 눅눅하게 만들었다.
건하는 선반 아래에서 건져 낸 003-2 장부 조각을 넓은 나무판 위에 펼쳤다. 물을 먹은 종이 가장자리는 솜처럼 일어났고 먹줄은 절반쯤 풀려 있었다. 억지로 펴면 남은 글자도 떨어질 상태였다.
서고지기는 문가에서 두 손을 모은 채 그것을 보았다.
"더는 못 합니다. 왕실 사자가 빠져나간 날에 장부까지 말리면 기록청에서 제 장부를 뒤질 겁니다."
"그래서 서고지기 혼자 말리는 게 아닙니다."
건하는 빈 필사지 세 장과 마른 흡지 한 장을 꺼냈다. 원장 봉인은 서문린의 품에 있었고 이관대장 원본은 선반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서고지기는 대장에 남은 글자를 읽으십시오. 소탁은 젖은 종이에서 보이는 글자만 옮겨 적어. 보이지 않는 글자는 비워 둬라. 제가 둘을 대조하겠습니다."
한소탁이 종이 앞에 앉았다. 붓을 든 손이 잠깐 멈췄다.
"사형. 번진 먹을 제가 잘못 읽으면요?"
"잘못 읽은 글자는 네가 본 글자가 아니게 된다. 모르면 점 하나도 쓰지 마. 빈칸은 나중에 다시 볼 수 있지만 지어 낸 글자는 남는다."
소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종이에 물품명 칸의 테두리부터 옮겼다. 건하는 창으로 들어온 빛을 손등으로 가려 종이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젖은 먹이 빛을 머금자 번짐 아래 세 글자가 떠올랐다.
무명 약낭.
그 아래에는 가루 성분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
청각초. 마수 진정향. 마지막 약재명은 물에 먹혀 반 획만 보였다.
서문린이 눈매를 좁혔다.
"뒤뜰 마수가 회색 천 조각에 반응한 것과 이어지나?"
"아직은 가설입니다. 청각초는 목을 마르게 하고 짐승의 후각을 거칠게 만듭니다. 진정향과 섞으면 진정시키는 냄새가 아니라 특정 냄새를 좇다가도 가까워지면 피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건하는 수문 아래에서 본 마수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놈은 천 조각이 흔들릴 때 달려들었고 바람이 반대로 불자 귀를 눕히고 물러났다.
"같은 가루가 천 조각에 묻었는지는 확인해야 합니다. 다만 약낭이 마수를 치료하기 위한 물건이었다면 굳이 뒤뜰 통로에 흩뿌릴 이유는 없습니다."
서문린은 섣불리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장부 조각의 아래쪽을 가리켰다.
"그건 읽히나?"
한소탁이 몸을 더 낮췄다. 젖은 종이에는 보관 이동 칸이 세 줄 남아 있었다. 첫 줄에는 남문 계단이라는 습득 장소가 보였다. 둘째 줄에는 을열 17번이 보였다. 마지막 줄은 종이가 얇게 벗겨져 있었지만 앞부분만은 읽혔다.
을열 18번 앞 임시 대기.
그 뒤에 있어야 할 최종 보관 번호 칸은 통째로 뜯겨 있었다.
"젖어서 찢어진 게 아닙니다."
건하가 말했다.
"마른 종이를 얇게 벗긴 뒤 물에 적셨습니다. 결이 안쪽으로 말려 있어요."
서고지기가 대장을 더듬으며 말했다.
"여기도 같은 날에 003-2를 옮긴 기록이 있소. 확인자 칸은 비어 있고 보관 이동 사유에는 ‘임시 대기’만 적혀 있소이다."
"최종 보관 번호는요?"
"대장 가장자리가 뜯겼소. 여긴 원래 작은 꼬리표를 붙였다 떼는 자리라..."
건하는 대답 대신 그 뜯긴 자리를 보았다. 작은 꼬리표를 떼었다면 풀칠 자국이 남아야 했다. 하지만 종이에는 풀 자국 대신 젖은 손가락으로 문질러 먹을 흐린 자국이 있었다.
미래의 기억이 목덜미를 서늘하게 훑었다. 이런 식의 빈칸은 나중에 늘 청연문 사람의 실수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기억을 들이밀 수는 없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아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오늘의 종이에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흔적이었다.
"서고지기. 방금 읽은 대장 문구와 뜯긴 위치를 입회 기록에 남겨 주십시오. 003-2 원장은 여기 두고 사본만 가져가겠습니다."
"사본으로 뭘 하겠다는 겁니까?"
"18번 앞이 어디였는지 확인하겠습니다."
귀물각으로 돌아왔을 때도 천명패의 글줄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급 송출 진행 중]
[왕실 신표 반환 절차 분쟁]
건하는 글줄 아래로 손을 내렸다. 결론을 먼저 파는 사람은 새 증거가 나와도 제목을 버리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다음 자막이었다.
을열 17번과 18번은 귀물각 안쪽 벽을 따라 나란히 붙어 있었다. 17번 앞에는 오래된 나무가루와 먼지만 쌓여 있었다. 18번 앞 바닥은 누군가 젖은 천으로 훑은 듯 다른 곳보다 검었다.
서문린이 열쇠대장을 펼쳤다.
"17번은 오늘 아침 소탁이 열었다. 18번은 개봉 기록이 없다."
"바깥 자물쇠를 열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건하는 18번 문짝 아래에 종이를 밀어 넣었다. 종이 끝이 안쪽에서 걸렸다. 문을 조금 들어 올리자 가느다란 푸른 실밥 하나가 떨어졌다.
한소탁이 숨을 삼켰다.
"그 끈입니다. 남문 노파가 가져온 약낭 끈이 저 색이었어요."
"어떻게 기억하지?"
서문린이 물었다.
소탁은 잠시 실밥을 보았다. 이번에는 사과부터 꺼내지 않았다.
"노파가 손이 떨려서 매듭을 묶지 못했습니다. 제가 끈을 세 번 감아 묶었어요. 끝이 짧아서 남는 실이 이렇게 풀렸습니다."
건하는 실밥을 기름종이 위에 올렸다.
"직접 본 일로 적어라. 약낭 끈은 푸른 실이었다. 네가 세 번 감아 묶었다. 18번 문짝 아래에서 같은 색 실 한 올을 발견했다. 같은 물건이라고 쓰지는 마."
"예."
소탁의 붓끝이 종이 위를 움직였다. 글자는 아직 작고 가늘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건하는 뒤뜰 보관 통로로 향했다. 18번 보관함 뒤쪽 벽은 통로의 낮은 문고리와 맞닿아 있었다. 바깥에서는 열쇠가 있어야 열리는 구조였지만 안쪽 문고리를 밀면 보관함 뒤의 얇은 판이 벌어졌다.
문고리 안쪽 먼지에는 길게 쓸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틈에도 푸른 실밥이 하나 끼어 있었다. 그리고 통로 바닥의 물때 위에는 네모난 물건을 잠시 내려놓았던 자국이 있었다.
서문린이 낮게 말했다.
"18번을 안에서 열었다. 약낭을 앞에 세워 두고 뒤쪽으로 물건을 넘겼다는 말이군."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누가 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사자가 통로를 썼다는 한소탁의 말은 있다."
"사자가 약낭을 옮겼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 둘을 한 줄로 적으면 저쪽이 한 번에 무너뜨릴 겁니다."
서문린의 시선이 건하에게 돌아왔다. 날카로운 눈빛은 그대로였다. 다만 검집을 쥔 손은 풀려 있었다.
건하는 열쇠대장의 한 줄을 가리켰다. 을열 17번의 개봉 기록 다음에는 확인 번호를 적는 칸이 있었다. 날짜와 시각은 남았는데 번호만 깔끔하게 비어 있었다. 그 다음 줄은 18번이 아니라 다른 보관함 기록으로 이어졌다.
"약낭 원장에서는 최종 번호가 뜯겼습니다. 열쇠대장에서는 17번 다음의 확인 번호가 비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통로에는 18번 안쪽을 연 흔적이 남았습니다."
그는 세 장의 종이를 나란히 놓았다.
"이건 하나의 필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더 쉽게 지울 수 없어요. 서로 다른 기록이 같은 길을 가리킵니다."
서문린이 장부판을 내려다봤다.
"누군가 약낭으로 마수를 흔들어 통로를 비우고 그 사이에 18번을 안에서 열었다. 청동 신표 조각은 그 뒤에 들어왔을 수 있다."
"그 순서도 아직 확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003-2가 여기까지 왔고 그 끝이 지워졌다는 건 확실합니다."
"확실한 것만 말하는군."
"확실하지 않은 말을 쓰면 청연문 장부가 저들 방송과 다를 게 없어집니다."
서문린은 통로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위 둘이 귀물각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왕실 물건이 있다는 소문이 난 뒤부터 지나가는 제자들도 문가를 한 번씩 훑고 갔다.
"문을 닫겠다. 오늘 들어오는 자는 전부 막아."
수위가 움직이려 하자 건하가 먼저 말했다.
"잠깐만요."
서문린의 눈빛이 다시 차가워졌다.
"도둑을 잡을 기회를 막자는 건가?"
"문을 걸어 잠그면 하급 송출은 청연문이 장부를 감췄다고 쓸 겁니다. 저들은 이미 원장을 열람하고도 거부라고 썼습니다. 문을 닫는 순간에는 증거가 아니라 제목을 먼저 보낼 겁니다."
"그럼 이 통로를 내버려 두라는 말인가?"
"아닙니다. 드나드는 모든 사람을 남기면 됩니다."
건하는 귀물각 책상에서 가는 나무 꼬리표 묶음을 가져왔다. 그는 꼬리표 첫 장에 번호를 적었다.
임시 이동표 하나.
물품명. 이동 시각. 운반자. 확인자. 목적지.
"오늘 해 질 때까지 귀물각에서 움직이는 물건마다 이 표를 묶겠습니다. 보관함은 소탁과 수위가 함께 열고 닫습니다. 뒤뜰 통로를 지나는 사람은 이름과 용무를 남기게 하십시오. 공개된 절차라면 숨긴다는 말을 듣지 않으면서도 새 빈칸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한소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확인자를 맡아도 됩니까?"
서문린은 대답하지 않고 그가 쓴 필사지를 살폈다. 읽히지 않는 칸은 비워 두었고 보이는 글자 옆에는 ‘젖어 판독 불완전’이라고 적혀 있었다.
"네가 본 것은 네가 적어라. 대신 혼자 판단하지 마."
그녀는 건하에게 시선을 옮겼다.
"유건하. 오늘 해 질 때까지 귀물각 장부와 출입 흔적을 조사해라. 밖으로 물건을 내보내거나 누군가를 붙잡을 때는 내게 먼저 알린다. 네가 찾은 빈칸 하나가 문파를 지킬 수도 있지만 잘못 짚으면 우리 목을 조일 수도 있다."
"예. 절차부터 남기겠습니다."
허락이라는 말은 없었다. 그래도 서문린은 열쇠대장과 임시 이동표를 그에게 내주었다.
그때 천명패가 차갑게 빛났다.
[하급 공략방 현장 취재 예고]
[청연문 귀물각, 분실물 관리 부실 의혹]
한소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손에 든 꼬리표를 구길 듯 움켜쥐었다.
건하는 003-2 사본의 마지막 줄을 다시 펼쳤다. 신고자란 옆에는 처음에는 얼룩으로 보였던 짧은 메모가 남아 있었다.
짐승이 먼저 피함.
남문 계단에서 약낭을 주운 노파는 그것을 단순한 분실물로 내놓지 않았던 것이다.
건하는 꼬리표 묶음을 소탁에게 건넸다.
"귀물각은 네가 지켜. 들어오는 사람과 움직이는 물건을 전부 적어."
"사형은요?"
"남문으로 간다. 방송이 오기 전에 약낭을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라 약낭을 주운 사람부터 찾아야 해."
약낭의 주인이 누구인지 몰라도 짐승이 먼저 피했다는 사람은 이미 누군가의 냄새를 보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