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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천재 발명가는 은퇴하고 싶다5화

조선의 천재 발명가는 은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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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평상에 차 향이 머물다

사흘째 되는 아침에도 소은은 낚싯대를 들고 나갈 생각이었다.

전날 저녁에 손질해 둔 낚싯줄은 매듭 하나까지 말끔했다. 공방 문을 조용히 닫고 냇가 바위에 앉기만 하면 됐다. 약초차를 들고 오겠다는 사람의 약속 따위는 잊어도 될 만큼 물안개는 희었다.

그때 사립문이 두 번 두드려졌다.

“장인께서 계십니까?”

설향의 목소리였다.

소은은 낚싯대를 들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문밖에는 설향과 만복이 서 있었다. 만복은 작은 나무 상자를 품에 안았고 설향은 젖지 않은 보자기 하나와 얇은 장부를 들고 있었다.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인삼이 다 나았습니까?”

“다 나았다는 말은 아직 못 합니다. 다만 상하던 것이 멎었습니다.”

설향은 상자를 열었다. 사흘 전 가장 먼저 물러졌던 인삼의 단면은 누런 기운이 더 번지지 않았다. 나머지 뿌리는 삼베 위에서 제 빛을 찾고 있었다.

소은은 인삼을 집어 들고 코에 가까이 댔다. 텁텁한 단내 대신 흙과 쌉싸래한 향이 났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곧장 칭찬하지는 않았다.

“숯은 만져 봤습니까?”

“어제 낮에 눅눅해진 상자 하나를 꺼내 볕에 말렸습니다. 비가 그친 뒤에는 낮은 관에서 바람이 덜 나서 격자를 열어 보았습니다. 왕겨 두 줌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래서요?”

“제가 치웠습니다. 관 안쪽은 마른 막대로 살짝 긁었고요. 그 뒤에는 촛불 연기가 높은 관으로 빠졌습니다.”

소은은 그제야 설향의 손을 보았다. 손끝에 얇은 흙이 남아 있었고 손등에는 숯가루가 묻어 있었다. 토굴 앞에서 한 번 배운 일을 그대로 해 본 손이었다.

“말로만 들으면 안 됩니다. 가 봅시다.”

언덕의 토굴에는 차가운 흙 냄새 대신 마른 나무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낮은 관 앞 격자는 깨끗했고 숯 상자는 벽에서 손바닥만큼 떨어져 있었다. 설향은 선반 맨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는 바람이 세서 상자를 한 칸 옮겼습니다. 뿌리 끝이 마르는 것이 보여서요.”

“잘 옮겼습니다. 다만 관 앞이 비면 공기가 바로 올라갑니다. 빈 자리에 마른 솔잎 자루를 두세요.”

설향은 곧바로 장부에 적었다. 소은은 그 모습이 못마땅한 듯 보다가 관의 소리를 들었다. 바람은 얇고 일정했다. 사람이 가르친 일을 사람이 이어 하는 소리는 물레방아보다 조용했지만 훨씬 든든했다.

만복이 인삼 상자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약초꾼들이 오늘은 웃었습니다. 겨울에 줄 값이 남겠다고요. 아씨가 밤마다 굴을 살핀 보람이 있었습니다.”

설향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관아에서는 웃지 않았습니다.”

소은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살림을 맡은 이가 원래 곳간으로 인삼을 도로 옮기라 했습니다. 관아 밖 굴에 둔 물건은 장부에 올리기 어렵다며요. 저는 아직 더 지켜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내일까지 답을 내라 했습니다. 못 옮기겠다면 제가 이 인삼을 맡아 팔 방법을 찾으라더군요.”

만복이 이를 악물었다.

“상한 인삼 값은 우리한테 물리고 멀쩡한 인삼은 관아 이름으로 가져가겠다는 말입니다.”

소은은 토굴 벽을 바라봤다. 관아 안 벽을 뚫지 않으려 굳이 이곳을 골랐다. 그런데 관아 밖에 두었으니 이제는 장부가 문제였다. 벼슬아치의 손은 늘 문을 하나 닫으면 다른 틈으로 들어왔다.

“내 공방으로 인삼을 들고 오려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설향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부탁 하나를 드리러 왔습니다.”

그녀는 보자기를 풀었다. 말린 대추와 생강 그리고 향이 짙은 잎사귀가 차례로 나왔다. 마지막으로 낡았지만 깨끗한 작은 화로가 드러났다.

“저를 공방의 정식 조수로 두어 주십시오.”

소은은 한참 말이 없었다.

“관기인 사람이 공방에 있으면 조용하겠습니까?”

“조용하게 하겠습니다. 관아에서 받은 일은 공방으로 끌고 오지 않겠습니다. 토굴 관리는 만복과 약초꾼들이 익히게 할 겁니다. 저는 여기서 약초를 다듬고 손님을 대접하겠습니다.”

“관아에서 당신을 그냥 둘까요?”

“그 일은 제가 답하겠습니다. 장인께서 관아를 상대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손님이 왜 필요합니까? 손님은 일이 늘어난다는 뜻입니다.”

“장인께 손님이 아예 없는 날에도 밥은 드셔야 하지 않습니까?”

소은의 눈썹이 움직였다.

설향은 다시 말을 이었다.

“대금도 공짜로 받지 않겠습니다. 약초꾼들이 주는 인삼 값에서 제 몫을 떼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약초차를 팔아 제 밥값을 벌고 공방에서 쓰는 약재는 제가 마련하겠습니다. 장인께서는 쇠를 다루시고 저는 불과 물을 다루겠습니다.”

그 말은 불쌍한 처지를 내세운 부탁이 아니었다. 자기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한 줄씩 세어 내놓는 거래였다. 토굴의 관을 살핀 손과 숯 상자를 말린 손이 그 말 뒤에 있었다.

소은은 마당 쪽을 바라봤다. 낚싯대는 문기둥에 기대어 있었다. 설향을 돌려보내면 오늘은 조용히 낚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일도 그럴 수 있을지는 몰랐다. 관아가 토굴을 못마땅해하는 이상 설향 혼자 막아 설 수는 없었다.

“조건이 있습니다.”

설향의 눈빛이 곧게 섰다.

“말씀하십시오.”

“관아 주문은 안 받습니다. 누구든 내 장치를 빌려 달라 하면 거절합니다. 그리고 내가 가르친 것은 먼저 자기 손으로 고칩니다. 고장 날 때마다 나를 부르면 공방 문을 닫겠습니다.”

“받겠습니다.”

“너무 빨리 받는군요.”

“장인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보았습니다.”

소은은 대답하지 못했다. 설향은 보자기에서 작은 솥을 꺼내 평상 옆 화로에 올렸다. 냇물 한 바가지를 붓고 생강을 얇게 저몄다. 대추는 칼등으로 눌러 갈라 넣었다.

“차 한 잔 드신 뒤에도 마음이 같으면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차 한 잔으로 사람을 붙들 셈입니까?”

“붙드는 건 아닙니다. 속이 차가운 분께 따뜻한 것을 권하는 겁니다.”

불이 붙자 생강 향이 쇠 냄새를 밀어냈다. 소은은 망치 자루를 내려다보다가 결국 평상 끝에 앉았다.

차가 끓는 냄새는 이상하게도 사립문 밖까지 멀리 갔다.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박 노인이었다. 그는 양수기 고정목에 쓸 나무 조각을 들고 와서 마당 가장자리에 섰다.

“방해라면 그냥 가겠네. 관이 조금 울길래 말이야.”

소은은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울었습니까?”

“꿀렁거리지는 않았고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네. 고정목을 뒤로 당기고 물길에 낀 낙엽을 걷었더니 멎었어. 그래도 이 나무가 닳은 것 같아 가져왔지.”

소은은 나무 조각을 받아 들었다. 끝이 반 손가락만큼 닳아 있었다. 박 노인은 이미 장치를 멈추고 원인을 살핀 뒤 필요한 부분만 들고 온 셈이었다.

“잘하셨습니다. 이건 갈아 끼우면 됩니다.”

설향이 찻잔 대신 작은 사기 종지를 내밀었다.

“어르신도 드십시오. 생강을 조금 넣었습니다.”

박 노인은 종지를 두 손으로 받았다. 한 모금 마신 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약인가 차인가?”

“맛있으면 차고 쓰면 약입니다.”

“그럼 이건 차로구먼.”

박 노인이 웃자 마당 밖에서 기다리던 농부 둘도 슬그머니 들어왔다. 양수기 순번을 정하러 왔다는 말은 핑계에 가까웠다. 찻물 냄새를 맡고 온 얼굴들이었다.

소은은 손을 내저었다.

“한 사람씩만 마시고 갑니다. 여기는 주막이 아닙니다.”

“그럼 묵은 주막 음식이 아니겠군요.”

설향은 아침에 불린 메밀가루를 꺼냈다. 작은 솥 하나를 더 걸고 나무 주걱으로 천천히 저었다. 묵물이 투명해질 때까지 불을 낮추는 손길이 익숙했다.

“차만 드시면 속이 쓰릴 수 있습니다. 묵도 조금 드시지요.”

“언제 그걸 준비했습니까?”

“공방에 머물 수 있을지 모르니 점심값부터 준비했습니다.”

소은은 더 할 말을 잃었다. 설향은 네모난 나무 틀에 묵물을 부었다. 찬물에 식힌 뒤 칼로 한입 크기만큼 썰어 간장과 들깨를 얹었다.

평상 위에는 따뜻한 차와 차가운 메밀묵이 놓였다. 박 노인은 물길 이야기를 하고 농부들은 각자 밭의 순번을 확인했다. 누구도 소은에게 새 양수기를 만들어 달라 하지 않았다. 고장 난 고정목 하나를 들고 왔고 자기들끼리 정한 물 쓰는 순서를 다시 맞췄다.

소은은 그 광경을 보다가 손에 쥔 나무 조각을 천천히 대패질했다. 공방이 시끄러워지는 것은 싫었다. 그런데 이 소리는 상의원의 밤처럼 사람을 짓누르지 않았다. 물을 고친 사람이 쉬어 가는 소리였다.

돌쇠가 숨을 헐떡이며 사립문 안으로 뛰어든 것은 묵 접시가 절반쯤 비었을 때였다.

“장인어른! 큰일입니다.”

소은의 얼굴이 굳었다.

“장인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읍내에서 관아 하인 둘이 토굴이 어디냐고 묻고 다닙니다. 약초를 누가 살렸는지도 찾고요.”

평상 위의 웃음이 멎었다.

설향은 찻주전자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손은 떨리지 않았지만 손등의 숯가루가 유난히 검게 보였다.

소은은 막 갈아 낸 고정목을 박 노인에게 건넸다.

“이건 가져가서 끼우십시오. 오늘 물길은 해 지기 전에 닫고요.”

그는 설향 쪽을 돌아봤다.

“방 한 칸은 저쪽입니다. 약초 손질과 손님 대접은 당신이 맡으십시오. 공방 표지는 아직 안 걸 겁니다. 관아 사람이 오면 당신은 약초를 다듬으러 잠시 머문 사람일 뿐입니다.”

설향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럼 남아도 됩니까?”

“차는 내일도 끓이되 손님은 당신이 고르십시오. 그리고 묵은 너무 자주 만들지 마세요. 내가 낚시할 시간이 없어집니다.”

설향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번졌다.

“알겠습니다. 장인께서 낚시할 날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해가 기울 무렵 설향은 공방 한쪽 빈 칸에 약초 보자기를 정리했다. 소은은 나무판 하나를 꺼내 들고 망설였다. 한참 뒤 그는 판자에 작은 글씨를 새겼다.

[약초 다듬는 자리]

현판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소박한 글씨였다. 그래도 설향은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소은은 새긴 자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여기도 공방입니다. 내 규칙을 지키는 동안에는요.”

설향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제 손님과 제 약초도 지키겠습니다.”

냇가 길 어귀에서 말발굽 소리가 멎었다.

소은은 새로 만든 현판을 내려다봤다. 따뜻한 차 향은 아직 마당에 남아 있었다.

그 향을 따라 누군가 공방을 찾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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