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잔 점소이의 무공 훔쳐보기

1화: 찻잔 위의 잔상
하북 관도로 이어지는 황톳길은 여름비가 쏟아지면 순식간에 깊은 진흙 구덩이로 변했다.
청연객잔의 낡은 처마 밑으로 굵은 빗줄기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긴 가운데 삐걱거리는 들창 틈으로 붉은 초롱 불빛만이 간신히 진흙 길목을 밝혔다.
"연적아! 저쪽 동쪽 구석에 물 샌다! 됫박 하나 더 받쳐 놔라!"
주방 안쪽에서 가마솥 뚜껑을 닫는 둔탁한 쇠 소리와 함께 칼칼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벌써 받쳐 뒀어요, 하린 누님. 빗물이 너무 차서 벌써 세 통째 비우는 중입니다."
점소이 연적은 마른걸레로 젖은 탁자를 훔쳐내며 허리를 폈다.
열아홉의 나이답지 않게 손놀림에 군더더기가 없고 날렵했다. 거친 삼베옷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팔뚝에는 숱한 잔심부름으로 다져진 잔근육이 단단히 잡혀 있었다.
그의 목덜미 아래에는 닳고 닳은 거친 노끈에 꿴 반쪽짜리 비취 옥패가 달랑거렸다.
어릴 적 객잔 문간에 버려졌을 때부터 목에 걸려 있던 유일한 내력이었다. 연적 스스로도 이것이 어디서 온 물건인지 알지 못했다.
"비가 이렇게 하늘이 뚫린 것처럼 퍼부으니 오늘 손님은 다 틀렸네. 장부 맞추기도 민망하겠어."
주방 무명천을 젖히고 나온 서하린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질그릇을 탁자에 툭 내려놓았다.
진한 육수에 무와 고기를 듬뿍 넣고 끓여 낸 쇠고기 장국이었다. 그녀의 단정한 이마에는 숯불 열기로 맺힌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먹고 해. 마른 장작개비처럼 곯아가지고 쟁반이나 제대로 들겠니?"
"누님 국밥 냄새 맡고 굶을 놈이 하북 천지에 어디 있겠습니까."
연적이 놋숟가락을 들며 싱긋 웃자 하린은 혀를 차면서도 국그릇을 연적 쪽으로 바짝 밀어주었다.
카운터 구석에서는 객잔주 장백수가 돋보기를 코끝에 걸친 채 묵직하게 주판알을 튕기고 있었다.
오른쪽 다리가 불편해 늘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노인이었지만 주판알을 튕기는 메마른 손가락만큼은 바람처럼 빠르고 일정했다.
탁.
장백수가 주판알을 가볍게 털어내며 덧창 밖을 내다보았다.
"바람이 심상치 않구나. 관도 쪽 다리가 끊겼을 게다. 오늘 밤은 문 일찍 걸어 잠그고 쉬는 게 낫겠어."
"그럼 제가 입구 문빗장 지르고 오겠습니다."
연적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가볍게 몸을 일으키던 찰나였다.
쿵! 콰르릉!
거센 돌풍과 함께 객잔의 육중한 판자문이 부서질 듯 활짝 젖혀졌다.
비바람이 홀 안으로 사납게 들이닥치며 탁자 위의 촛불들이 일제히 춤을 추듯 흔들렸다. 문턱 너머로 축축한 밤공기와 함께 짙은 피비린내가 밀려들었다.
"……!"
문가에 우뚝 선 인영은 삿갓을 깊게 눌러쓴 노인이었다.
해어진 도포는 빗물과 흙탕물로 엉망이었고 왼쪽 옆구리를 쥔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핏물이 빗물과 섞여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어둠 속에서도 삿갓 밑으로 번뜩이는 노인의 눈빛은 궁지에 몰린 맹수처럼 살벌했다.
하린이 숨을 들이키며 은근슬쩍 허리춤에 찬 식도의 자루를 쥐었다.
장백수의 주판알을 튕기던 손도 미세하게 굳었다. 객잔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팽팽해졌다.
강호의 피비린내를 몰고 온 불청객. 객잔을 운영하는 이들이라면 가장 꺼리는 손님의 유형이었다.
그러나 연적은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그는 옆에 개어 두었던 뽀송뽀송한 마른 수건 한 장과 따뜻한 차 주전자를 쟁반에 받쳐 들고 걸어 나갔다.
"어서 오십시오, 어르신. 빗길이 험합니다. 비바람 덜 치는 안쪽 구석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연적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맑고 공손했다.
살기를 뿜어내던 노인의 눈썹이 흠칫 꿈틀했다. 피 흘리는 괴한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고 마른 수건부터 내미는 점소이라니.
노인은 피 섞인 마른기침을 삼키며 쉰 목소리로 답했다.
"……술은 필요 없다. 끓는 물 한 주전자와 가장 거친 조차(粗茶) 한 항아리만 내와라."
"예, 차게 식은 몸 녹이실 수 있게 뜨겁게 우려 올리겠습니다."
연적은 노인을 가장 깊숙하고 바람이 들지 않는 모퉁이 탁자로 안내했다.
노인이 털썩 주저앉자 의자 다리가 삐걱 비명을 질렀다. 연적은 주방으로 가 방금 끓여 낸 찻물을 뚝배기 주전자에 담아 투박한 사기잔과 함께 내왔다.
가까이서 본 노인의 상태는 심각했다.
창백하게 질린 입술 사이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숨결마다 가슴팍의 기혈이 뒤틀리는지 목덜미의 굵은 핏줄이 울컥거렸다.
'내상이 아주 깊어. 찻잔을 쥘 힘조차 간당간당해 보이는데.'
연적은 손님의 기색을 살피는 점소이 특유의 눈썰미로 노인의 호흡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때였다.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뚝배기 찻잔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엄지와 중지로 찻잔 테두리를 가볍게 집고 검지 끝으로 찻잔 바닥을 톡, 톡, 톡 세 번 두드렸다.
그 작은 동작과 함께 노인의 호흡이 기이한 박자로 바뀌었다.
깊게 들이마신다.
잠시 숨을 멈춘다.
가늘고 길게 뿜어낸다.
탁자 바닥으로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과 함께 노인의 거친 숨결이 순식간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던 뜨거운 김이 노인의 입가로 빨려 들어가듯 흩어졌다.
그 순간 연적의 가슴팍이 화끈 달아올랐다.
옷섶 안의 반쪽짜리 옥패가 불덩이처럼 뜨거워지더니 눈앞의 시야가 기묘하게 일렁였다.
'……어?'
연적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세상의 모든 흐름이 느려진 것처럼 보였다.
노인의 손목 힘줄이 수축하는 각도, 찻잔을 타고 흘러내리는 기운의 맥락, 그리고 세 번의 두드림이 만들어낸 힘의 파동이 공기 중에 투명한 푸른빛 궤적으로 남았다.
잔상이었다.
눈을 깜빡여도 사라지지 않는 선명한 빛의 선이 노인의 손목과 어깨, 흉곽을 따라 하나의 흐름으로 뚜렷하게 이어져 있었다.
'저건…… 손목을 안쪽으로 비틀어 힘을 흘려보내는 건가? 깨진 찻잔에 힘을 싣지 않고 탁자 밑바닥으로 충격을 분산시키고 있어.'
배운 적도 없는 무학의 원리가 연적의 머릿속으로 봇물 터지듯 쏟아져 들어왔다.
노인이 숨을 들이켜고 내뱉는 세 번의 박자가 연적의 폐부로 고스란히 복사되듯 각인되었다.
연적은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빈 나무 쟁반의 모서리를 엄지와 중지로 집어 들었다.
손목을 아주 미세하게 비틀며 검지로 쟁반 밑바닥을 세 번 톡톡 튕겨 보았다.
스스스.
쟁반 위로 미세한 바람결이 일며 손끝에 찌릿한 열감이 돌았다.
그때 밖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뇌성이 터졌다.
콰르르릉!
번쩍이는 번갯불과 함께 객잔 측면의 덧창이 거센 돌풍을 이기지 못하고 뜯겨 나갔다.
차가운 빗줄기가 들이치며 선반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펄펄 끓는 무쇠 주전자와 사기 찻잔 서너 개가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앗, 연적아 조심해!"
주방 입구에 서 있던 하린이 파얗게 질려 비명을 질렀다.
펄펄 끓는 물이 쏟아지면 바닥은 물론이고 근처에 서 있던 연적의 발등까지 크게 데일 판이었다.
그 찰나 연적의 몸이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머리로 판단한 것이 아니었다.
방금 눈앞에 각인되었던 노인의 푸른 궤적, 찻잔을 비틀어 쥐던 손목의 각도와 숨을 고르던 보법이 연적의 다리와 팔로 그대로 흘러나왔다.
스윽.
연적의 오른발이 젖은 바닥을 미끄러지듯 파고들었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무쇠 주전자의 손잡이를 낚아채는 대신 쟁반을 비스듬히 기울여 쏟아지는 뜨거운 물줄기를 허공에서 둥글게 받아냈다.
동시에 왼손을 번개처럼 뻗어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사기잔 세 개를 쟁반 위로 낚아챘다.
탁, 탁, 톡.
노인이 찻잔을 두드리던 세 번의 박자가 쟁반 위에서 사기잔이 안착하는 소리로 완벽하게 재현되었다.
주전자에서는 끓는 물 한 방울 튀지 않았고 떨어지던 잔 세 개는 쟁반 위에 단 한 줄기 금도 가지 않은 채 얌전히 얹혀 있었다.
정적.
홀 안에 거친 빗소리만이 맴돌았다.
하린은 입을 벌린 채 굳어 있었고 구석 탁자의 노인은 삿갓을 슬며시 들어 올리며 형형한 눈으로 연적을 응시했다.
노인의 눈동자에 형언할 수 없는 경악과 충격이 스쳐 지나갔다.
'저 녀석…… 방금 내 삼원분기식(三元分氣式)을 흉내 낸 건가? 단 한 번 스쳐 보고?'
연적은 자신의 떨리는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찻잔과 주전자를 완벽하게 받아냈지만 손목 안쪽의 근육이 찢어질 듯 뻐근했고 가슴속 호흡이 거칠게 차올랐다.
'뭐지? 방금 내 손이 왜 저절로…….'
그때 묵직하고 거친 손 하나가 연적의 어깨를 꽉 쥐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장백수였다.
장백수의 굳은살 박인 손바닥에서 서늘한 기운이 연적의 어깨를 타고 흘러들어 뻐근하던 손목의 열감을 흩어버렸다.
장백수는 연적의 눈을 매섭게 쏘아보며 낮게 읊조렸다.
"점소이는 발밑을 보고 걷는 법이다. 눈에 보이는 걸 함부로 주워 담으려 들면 제 목이 먼저 부러지는 게 강호야. 알아들었냐?"
평소의 헐렁한 객잔주가 아니었다. 뼈를 에는 듯한 차가운 경고에 연적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장부님."
노인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자 위에 은빛 엽전 세 닢을 툭 던져놓은 노인은 삿갓을 다시 깊게 눌러썼다.
"차 맛이 썩 훌륭하진 않았지만 대접은 잘 받았다."
노인은 연적을 한 번 더 의미심장하게 바라본 뒤 부서진 문틈을 지나 밤비 속으로 홀연히 걸어 나갔다.
연적은 멍하니 노인이 사라진 어둠을 응시했다.
어둠 저편, 관도 너머에서 서슬 퍼런 쇠붙이 냄새와 살벌한 기척이 빗줄기를 가르며 객잔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