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잔 주방장의 은밀한 무공

3화: 까다로운 밥상
점심 손님들이 빠져나간 청운객잔의 홀은 가라앉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진도겸은 행주로 도마를 결대로 닦아내며 주방 바닥을 훑었다. 화로 주변의 재는 아침에 보았던 작은 발자국을 지운 뒤에도 묘한 서늘함을 품고 있었다. 그 흔적이 누구의 것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객잔을 노리는 눈초리가 한둘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했다.
탁.
주방 나무 문이 거칠게 열리며 서연화가 들어섰다. 그녀의 손에는 붉은 먹줄이 어지럽게 그어진 낡은 장부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도겸 씨."
연화는 주방 탁자에 장부를 내려놓으며 도겸을 쏘아보았다. 평소보다 한층 날카롭게 벼려진 눈빛이었다.
"예, 객주님."
"오늘 저녁에 아주 귀찮고 위험한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어요."
연화는 손가락 끝으로 장부의 특정 줄을 톡톡 두드렸다.
"북로 상단의 배도현 행수예요. 우리 객잔에 쌀과 기름을 대주는 가장 큰 거래처 책임자이기도 하죠. 그런데 이 양반 성미가 아주 고약하기로 북서 관문 전체에서 으뜸이에요."
도겸은 묵묵히 연화가 가리킨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먹줄 옆으로 빽빽하게 적힌 메모들이 눈에 들어왔다.
'음식이 조금만 기름지면 헛구역질을 하며 밥상을 뒤엎음.'
'국물이 맑으면 맹물 같다며 욕설을 퍼붓고 거래 대금을 깎음.'
'지난봄 주방장이 올린 백숙을 집어던져 주방장 손등에 화상을 입힘.'
장부에 적힌 글자만 보아도 손님의 괄괄하고 까다로운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보시다시피 지난 주방장들도 이 배 행수의 비위를 맞추지 못해 줄줄이 짐을 쌌어요. 지난달에도 탕이 텁텁하다며 우리 객잔 곡물 납품가를 일방적으로 두 푼이나 올려 버렸죠."
연화는 팔짱을 끼며 도겸의 얼굴을 살폈다.
"오늘 저녁 배 행수가 상단 호위들을 이끌고 2층 별실에 묵을 예정이에요. 만약 오늘 저녁상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음 달부터 우리 객잔에 들어오는 모든 식자재 공급을 끊어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더군요. 그렇게 되면 청운객잔은 문을 닫아야 해요."
도겸은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손님을 제게 맡기시겠다는 뜻입니까?"
"그래요."
연화의 입꼬리가 쌀쌀맞게 올라갔다.
"어제 표사의 칼을 막아내고 주방 바닥의 미세한 흠집까지 짚어내던 그 놀라운 눈썰미가 진짜인지 아니면 그저 운 좋은 사기꾼인지 오늘 밤이면 명백히 드러나겠죠. 만약 배 행수가 만족하고 돌아간다면 도겸 씨를 청운객잔의 진짜 주방장으로 인정하겠어요. 하지만 밥상이 엎어지는 날에는 그쪽도 오늘 밤으로 이곳을 떠나야 할 겁니다."
연화의 말은 명백한 시험이었다. 도겸의 정체와 저의를 의심하면서도 객잔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그를 벼랑 끝으로 밀어 넣은 셈이었다.
도겸은 장부를 덮어 연화에게 건넸다.
"알겠습니다. 준비해 두겠습니다."
"…겁도 안 나나 보군요?"
"겁을 낸다고 솥 안의 물이 맑아지지는 않으니까요."
연화는 도겸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가 짧게 혀를 차며 돌아섰다.
"호언장담치고는 제법 그럴듯하네요. 결과로 보여줘요."
연화가 홀로 나가자 장작을 안고 숨죽이고 있던 마루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아이의 얼굴은 잔뜩 질려 있었다.
"도겸 아저씨, 배 행수 진짜 무서운 사람이에요! 저번에 왔을 때는 자기가 가져온 술잔에 먼지가 앉았다고 심부름꾼 형 뺨을 후려쳤단 말이에요. 객주 누나도 그 사람 앞에서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해요."
"마루야."
"예?"
"창고에 가서 연근 세 뿌리와 말린 표고버섯 그리고 기름기 적은 오리고기 반 마리를 가져와라."
마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리요? 오리고기는 기름이 많아서 배 행수가 제일 싫어하는 고기인데요? 닭도 아니고 오리를 내놓으면 진짜로 칼부림 날 텐데요!"
"시키는 대로 해라. 연근은 굵고 단단한 것으로 골라오고."
도겸의 목소리에는 거스를 수 없는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마루는 입을 비죽거리면서도 서둘러 뒤뜰 식자재 창고로 달려갔다.
도겸은 화로 앞에 서서 불길을 점검했다.
장부에 적힌 배 행수의 행태는 단순한 투정이 아니었다. 기름진 것을 먹으면 속이 뒤집히고 맑은 국물을 먹으면 맹물 같다며 화를 내는 증상. 그것은 오랜 세월 체내에 뭉친 화기(火氣)가 위장을 짓누르고 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내상과 편향된 식습관의 결과였다.
'상단을 이끌며 거친 바람을 맞고 무리하게 내력을 끌어다 쓴 자다. 가슴에 열이 차올라 목이 마르지만 위장은 차갑게 굳어 기름을 받지 못하는 상태지.'
이런 환자에게 기름진 고기를 주면 화기가 폭발하고 밍밍한 풀뿌리만 내놓으면 혀가 거부한다.
열을 내리면서도 차가운 위장을 보하고 기름기를 완벽히 제거한 깊은 감칠맛이 필요했다.
잠시 후 마루가 숨을 헐떡이며 재료를 안고 돌아왔다.
"가져왔어요! 진짜 이거로 괜찮겠어요?"
"충분하다."
도겸은 널찍한 식칼을 집어 들었다.
스걱. 스걱. 스걱.
칼날이 도마 위를 가볍게 스치며 연근이 얇고 일정한 두께로 썰려 나갔다. 연근의 떫은 성질을 빼내기 위해 도겸은 쌀뜨물에 식초를 세 방울 떨어뜨린 뒤 썬 연근을 가볍게 담갔다.
이어 오리고기의 껍질과 두터운 피하지방을 칼끝으로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발라내었다. 오직 결이 곱고 붉은 살코기만을 추려내어 끓는 물에 찻잎과 함께 잠깐 데쳐냈다. 누린내와 잡기름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마루야, 화로에 장작 세 토막을 넣고 바람을 불어라."
"예!"
마루가 풀무를 힘차게 당기자 화로 안에서 푸른빛이 감도는 강한 불길이 솟구쳤다.
'식도팔결 제2결, 화후조절.'
도겸은 무쇠솥에 맑은 샘물을 붓고 데쳐낸 오리고기와 저민 생강, 통후추 몇 알을 넣었다.
센 불(무화)이 솥을 감싸자 솥 안의 물이 용틀임하듯 끓어올랐다. 도겸은 국자를 쥐고 물결의 소용돌이를 따라 떠오르는 미세한 거품을 쉼 없이 걷어냈다. 그의 손놀림은 마치 보이지 않는 검으로 공기를 베어내듯 유려했다.
고기의 육즙이 국물에 완전히 풀려나오는 찰나 도겸이 나지막하게 외쳤다.
"불을 줄여라. 잿더미로 불씨만 덮어."
마루가 재빨리 재를 덮어 불길을 낮추었다. 은은한 불(문화)이 솥바닥을 데우기 시작하자 맹렬하던 끓음이 잦아들며 맑은 기포가 방울방울 솟아올랐다.
도겸은 쌀뜨물에 담가두었던 연근과 불린 표고버섯을 솥에 넣었다.
연근의 서늘하고 맑은 기운이 오리 육수의 진한 맛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솥뚜껑 틈으로 흘러나오는 향은 고기 냄새 특유의 무거움이 전혀 없었다. 마치 깊은 산속 맑은 시냇물에 가을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청량하고 구수한 향기였다.
마루는 솥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고 침을 꼴깍 삼켰다.
"우와… 아저씨, 고기 냄새가 하나도 안 나고 엄청 달콤해요."
"음식의 불은 태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재료가 가진 본래의 숨결을 깨워 하나로 엮는 호흡이지."
도겸은 솥을 지켜보며 문득 밖을 내다보았다. 붉은 노을이 객잔 마당을 물들이고 있었다.
마루가 장작을 정리하다가 문득 생각난 듯 속삭였다.
"도겸 아저씨, 아까 창고에 가다 보니까 뒷골목 담벼락 밑에 낯선 아저씨 둘이 서성거리더라고요. 옷차림도 이상하고 주방 쪽 창문을 자꾸 쳐다보던데요."
도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너를 보았느냐?"
"아니요, 제가 얼른 장작 더미 뒤로 숨어서 못 봤을 거예요."
"잘했다. 해가 지면 뒷마당 쪽으로는 나가지 마라."
도겸은 가슴속의 경계를 한 층 더 끌어올렸다.
그때 홀 쪽에서 거칠고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2층 계단을 쿵쿵 울리며 올라갔다.
"객주! 내 자리는 준비되어 있겠지? 오늘도 시금털털한 잡탕 따위를 내놓으면 당장 내일 아침 쌀 수레를 돌려세울 테니 그리 알아라!"
천둥 같은 호통 소리. 배도현 행수가 도착한 것이었다.
도겸은 무쇠솥의 뚜껑을 열었다.
맑고 투명한 백옥빛 국물 속에서 얇게 저민 연근과 부드럽게 익은 오리고기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도겸은 탕을 하얀 사기그릇에 정갈하게 담고 쟁반 위에 올렸다.
"가자. 손님이 기다리신다."
2층 별실의 문을 열자 묵직한 긴장감이 도겸의 얼굴을 때렸다.
방 한가운데에는 비단 장삼을 걸친 육중한 체구의 사내, 배도현 행수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양옆에는 칼자루에 손을 얹은 상단 호위무사 둘이 서슬 퍼런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방구석에 서 있던 서연화는 도겸이 들어서자 창백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네놈이 새로 왔다는 주방장이냐?"
배 행수가 도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젊은 놈이 손끝에 기름때나 묻히고 다니는 꼴이 영 미덥지 못하군. 그래, 내게 뭘 내놓겠다고 이 난리야?"
도겸은 말없이 다가가 상 위에 사기그릇을 내려놓았다.
맑은 국물 위로 띄워진 연근과 표고버섯 그리고 붉은 오리고기가 드러났다.
그릇을 본 배 행수의 눈썹이 무섭게 치켜올라갔다.
"이런 되먹지 못한 놈을 보았나!"
쾅!
배 행수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찻잔이 덜컹거리며 차가 튀었다.
"내가 기름진 고기를 먹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리고기를 내와? 게다가 국물은 맹물처럼 멀겋기 짝이 없구나! 감히 이 시골 객잔 주방장 놈이 날 조롱하려는 게냐!"
호위무사들이 일제히 칼을 반쯤 뽑아 올리며 차가운 쇠소리를 냈다. 연화가 사색이 되어 앞으로 나서려 했다.
"배 행수님, 노여움을 푸십시오! 제가 다시 주방에 일러…"
"가만히 계십시오, 객주님."
도겸이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연화의 말을 막아섰다. 도겸은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배 행수의 부릅뜬 눈을 직시했다.
"행수님. 지난 수개월 동안 밤마다 가슴이 답답하여 잠을 설치셨을 겁니다. 목구멍은 타는 듯이 마른데 물을 마시면 배가 차갑게 굳어 통증이 일고 조금만 기름진 음식을 보아도 신물이 올라오지 않으셨습니까?"
배 행수의 호통이 목구멍에서 뚝 멎었다. 그의 눈에 경악이 스쳐 지나갔다.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아느냐?"
"미간에 맺힌 붉은 열꽃과 갈라진 입술 그리고 가쁘게 몰아쉬는 숨결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행수님의 가슴속에는 억눌린 열기가 가득하지만 위장은 차갑게 식어 있습니다."
도겸은 숟가락을 배 행수의 손앞에 밀어놓았다.
"이 탕은 기름을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걷어낸 오리고기 살점과 가슴의 열을 내리는 연근을 은은한 불로 다려낸 청탕연압(淸湯蓮鴨)입니다. 저를 베어 객잔의 거래를 끊으시든 밥상을 엎으시든 상관없습니다. 다만 국물 한 모금은 넘겨보신 후에 결정하십시오."
배 행수는 도겸의 흔들림 없는 태도에 기가 질린 듯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방 안을 맴도는 서늘하면서도 깊고 구수한 국물 향이 배 행수의 메마른 코끝을 자극했다. 묘하게도 그 향기를 맡자 타는 듯하던 목구멍의 갈증이 가시는 듯했다.
배 행수는 침을 삼키며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투명한 국물을 한 술 떠 입안에 넣었다.
순간 배 행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 이건…!'
혓바닥에 닿는 순간 기름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극도의 깔끔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맹물 같은 밋밋함이 아니었다. 오리고기의 뼈와 살에서 우러나온 묵직하고 깊은 감칠맛이 연근의 은은한 단맛과 어우러져 입안 전체를 폭포수처럼 휘감았다.
꿀꺽.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기적이 일어났다.
가슴팍을 짓누르던 답답한 열기가 마치 시원한 가을 소나기를 맞은 듯 순식간에 씻겨 내려갔다. 뒤이어 차갑게 얼어붙었던 아랫배에 은은하고 따스한 온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후우우…"
배 행수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깊고 편안한 날숨이 터져 나왔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그의 어깨가 스르르 풀렸다.
"행수님, 괜찮으십니까?"
호위무사가 놀라 묻자 배 행수는 손을 내저어 그를 물렸다.
그리고는 체면도 잊은 채 숟가락을 멈추지 않고 국물을 퍼먹기 시작했다.
후루룩. 후루룩.
아삭하게 씹히는 연근과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오리고기가 혀를 즐겁게 했다. 배 행수는 그릇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들이켰다.
탁.
빈 사기그릇이 상 위에 내려놓였다. 배 행수의 이마에는 맑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붉게 상기되었던 얼굴에는 화색이 완연했다.
"…십 년 만이다."
배 행수가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십 년 동안 온갖 명의와 유명 객잔의 요리를 찾아다녔지만 내 속을 이렇게 편안하게 만들어준 음식은 처음이다. 자네… 대체 어디서 요리를 배운 건가?"
도겸은 고개를 숙였다.
"사부님께 밥 짓는 법을 배웠을 뿐입니다."
배 행수는 껄껄거리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사부라! 대단한 분을 모셨군 그래! 객주, 이보시오 서 객주!"
숨을 죽이고 있던 연화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예, 행수님."
"내년까지 우리 상단이 청운객잔에 공급하는 식자재 가격을 전부 한 푼씩 깎아주겠소! 이런 주방장을 두고도 객잔이 망하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연화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도겸과 배 행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행수님!"
"대신 내가 올 때마다 이 청탕연압을 반드시 준비해 둬야 할 것이오!"
배 행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호위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밤이 깊어 객잔의 불이 하나둘 꺼졌다.
도겸은 주방으로 돌아와 사용한 솥과 식기들을 정리했다.
끼익.
주방 문이 열리고 서연화가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따뜻한 차가 담긴 찻잔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도겸 씨."
연화는 찻잔 하나를 도겸에게 건넸다. 낮의 날카롭고 쌀쌀맞던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쑥스러움과 고마움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차 한잔해요."
"감사합니다."
도겸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켜자 연화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솔직히 말하면 도겸 씨를 쫓아낼 구실을 찾으려고 일부러 그런 억지 시험을 맡긴 거였는데 도겸 씨 덕분에 객잔의 숨통이 트였어요."
"주방장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겸손해하지 않아도 돼요. 그런 음식은 단순한 손재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아요."
연화는 도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도겸 씨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왜 이런 외진 객잔의 주방에 들어온 거죠?"
도겸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지막하게 답했다.
"검을 쥐고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보다 불을 지피고 밥을 짓는 일이 더 가치 있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뿐입니다."
연화는 그의 마른 손등에 새겨진 오래된 칼상처를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이 예의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내일부터는 주방 일에 일절 참견하지 않겠어요. 도겸 씨를 청운객잔의 정식 주방장으로 전적으로 믿을게요."
연화가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을 나간 뒤 도겸은 손님들이 2층에서 마시고 남긴 주안상 술병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상단 일행이 마시던 청주 호리병을 들어 올리던 도겸의 손끝이 멈칫했다.
병 주둥이 끝에서 풍겨오는 미세한 냄새.
맑은 쌀 향기 뒤편으로 가늘게 숨어 있는 씁쓸하고 낯선 약초의 잔향이 도겸의 코끝을 스쳤다.
'이건… 주막에서 흔히 쓰는 술의 냄새가 아니다.'
도겸이 미간을 찌푸리며 호리병을 들여다보던 바로 그 순간 뒤뜰 창문 너머에서 바스락거리는 나뭇가지 밟는 소리가 들렸다.
도겸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장작 더미 곁에서 마루가 불안한 눈빛으로 서성이고 있었고 객잔 담장 너머의 어둠 속에서는 은밀한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도겸의 눈동자가 깊고 차갑게 가라앉았다.
평온해 보였던 청운객잔의 밤에 또 다른 어둠의 파도가 밀려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