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최후의 헌터 쇼퍼: B급이 구매한 S급 보상

4화: 에테르 항균 내복
강현우는 폐지하역장 게이트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박준호와 헤어졌다.
준호는 무거운 가죽 자루를 등에 메고 협회 정산 창구로 향했다. 현우는 오늘 안으로 처리가 되면 계좌로 보내 달라는 말을 다시 당부했다.
"정산이 늦어도 내일 오전까지는 넣을게요. 가죽값 절반이면 관리비는 해결될 겁니다."
"기록 남는 대로 보내 주세요. 현금이 급하다고 빚처럼 받기는 싫어요."
"현우 씨는 참 이상하게 깔끔하네요."
"깔끔한 게 아니라 가난한 겁니다. 빌릴 여유가 없어서요."
준호가 멋쩍게 웃었다. 현우도 손을 들어 보인 뒤 골목으로 빠졌다.
걸음을 옮기자 발바닥에 남은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그러나 마음속 숫자는 전혀 풀리지 않았다.
217 HP.
오늘 던전에서 얻은 포인트는 충분해 보였지만 다음 등급까지 필요한 누적 구매량은 893 HP였다. 게다가 포인트는 통장으로 옮길 수 없었다. 관리비 고지서는 하루 뒤면 납부 기한을 넘겼다.
현우는 지하철 손잡이를 잡은 채 상점 창을 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꺼진 휴대폰 화면이었지만 현우의 눈앞에는 목록이 떠 있었다.
[골드 회원 사전 심사 추천 목록]
[생활 방호 의류]
[에테르 항균 내복]
[사전 심사 특가: 180 HP]
"이름부터 너무 현실적인데."
상세 설명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착용자의 체온과 마력막에 맞춰 섬유 배열을 조정합니다.]
[저온, 독성 먼지, 던전 미생물을 1차 차단합니다.]
[외부 충격은 피부에 도달하기 전 에테르막으로 분산합니다.]
[골드 회원 사전 심사 점수에 반영됩니다. 회원 등급 상승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180 HP를 써도 골드 회원이 바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생활용품 하나를 더 샀다는 기록만 남을 뿐이었다.
내복이 관리비를 내 주지는 않는다. 그래도 다음 게이트에서 추위와 독기를 막아 준다면 포인트를 더 벌 기회는 생긴다. 커터칼은 살을 가르는 데 강했지만 물에 젖은 철판 위에서 한 번 미끄러지면 현우도 준호도 죽을 수 있었다.
217 HP에서 180 HP를 빼면 37 HP가 남는다. 다음 E급 던전에서 빈손으로 나오면 다시 아무것도 사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가진 장비는 흠집 난 대여 검과 커터칼 하나였다. 검은 반납해야 했고 커터칼은 가까이 붙어야만 쓸 수 있었다.
현우는 한숨을 삼켰다.
"생활비는 생활용품으로 버는 거지."
구매 버튼을 눌렀다.
[180 HP를 사용합니다.]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유 포인트: 37 HP]
[구매자 반경 1미터 내의 낙하 위험물을 치워 주세요.]
현우는 지하철 안을 둘러봤다. 승객들의 발밑에는 사람과 가방이 가득했다.
"여기서 떨어뜨리면 뉴스에 나오겠는데."
그는 배송을 보류하고 집에 도착한 뒤 주문을 재개했다.
원룸에 들어온 현우는 바닥의 물건부터 치웠다. 빈 생수병과 던전용 장갑을 벽 쪽으로 밀어 붙이고 방 한가운데를 비웠다.
배송 재개 버튼을 누르자 허공에 검은 균열이 열렸다.
이번에는 길쭉한 상자가 떨어졌다. 회색 포장지에는 글자도 상표도 없었다. 상자를 뜯자 짙은 회색 내복 한 벌과 작은 안내 카드가 나왔다.
[세탁기를 사용하지 마십시오. 착용 중 오염은 섬유가 분해합니다.]
"세탁비까지 아끼게 해 주는 건가."
욕실에서 옷을 갈아입자 피부에 닿는 감촉이 곧바로 달라졌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젖은 옷이 몸에 붙은 불쾌함이 사라지고 피부 표면에 얇은 공기층이 생긴 듯했다.
현우는 일부러 던전 장갑에 밴 냄새를 맡았다. 손목과 목덜미의 피 냄새가 눈에 띄게 옅어졌다. 회색 섬유에 묻은 얼룩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항균은 진짜네."
그는 대여 검집의 끝을 꺼내 내복 위에 조심스럽게 댔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당연히 칼을 찌르지는 말자."
설명을 믿어도 몸을 시험 재료로 쓸 생각은 없었다. 현우는 내복 위에 검은 후드 재킷을 걸쳤다. 겉으로는 평범했다.
다음 날 오전에도 관리비는 해결되지 않았다. 준호에게서는 감정 부서 확인이 늦어져 정산금 지급이 미뤄졌다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현우는 대여 검을 가방에 넣고 협회로 향했다. 돈을 받으려면 가야 했고 검을 반납하려면 더더욱 가야 했다.
협회 장비 반납 구역은 아침부터 사람으로 붐볐다. 현우가 접수표를 내밀자 유미란이 서류철을 들고 다가왔다. 그녀의 시선은 현우의 얼굴보다 가방 쪽에 먼저 머물렀다.
"대여 검 반납 맞죠?"
"네."
현우는 검을 반납대에 올렸다. 직원이 흠집 난 검날을 확인하는 동안 미란은 서류를 넘겼다.
"비늘등개 가죽 절단면에 대한 감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준호 씨가 가진 가죽인데 제가 왜 불려 왔습니까?"
"소유권 때문이 아니라 절단 방식 때문이에요. 보급 검으로는 만들 수 없는 단면이라서요."
"좋은 칼을 쓴 모양이죠."
"그 좋은 칼이 뭔지는 모르고요?"
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복이 피부에 붙은 부분에서 미세한 온기가 번졌다. 긴장할 때마다 마력막이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미란은 서류를 덮었다.
"준호 씨의 가죽 정산금은 감정 보류가 걸렸어요. 오늘 안에 확인이 끝나면 지급될 겁니다."
"오늘 안에는 확실합니까?"
"제가 확답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감정팀이 재료를 다시 보겠다고 해서요."
현우의 머릿속에서 관리비 고지서가 펼쳐졌다. 이제 오늘 밤까지였다.
그때 뒤쪽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 맞네."
현우가 고개를 돌리자 임태식이 장비 반납대 옆에 서 있었다. 태식의 곁에는 낯선 D급 헌터가 한 명 더 있었다. 현우보다 머리 하나가 크고 팔뚝이 굵었다. 가슴에는 붉은 방패 문양이 달려 있었다.
"폐물류센터에서 보스 부산물 들고 사라진 놈."
태식이 말했다.
유미란의 표정이 굳었다.
"임태식 씨. 신고할 내용이 있으면 정식으로 접수하세요. 여기서 소란 피우지 마시고요."
"소란은 저쪽이 피웠죠. 마수 시체가 통째로 사라졌는데 마나스톤도 없었다고요."
현우는 태식을 바라봤다.
"제가 가져갔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증거는 협회가 찾겠지. 난 네가 그때부터 이상했다고 말하는 것뿐이야."
옆에 있던 D급 헌터가 앞으로 나섰다.
"말로는 부족하지. 장비를 보여 주면 금방 끝날 일인데."
"제 장비를 협회 직원도 아닌 분에게 보여 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럼 빌린 검만이라도 내놓고 가."
"검은 방금 반납했습니다."
현우가 반납대를 가리키자 D급 헌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현우의 재킷 앞섶을 움켜쥐었다.
"사람 좋게 말할 때 내놔."
유미란이 소리쳤다.
"손 놓으세요! 여기는 협회 시설입니다!"
상대는 현우를 벽 쪽으로 밀쳤다. 현우의 등이 차가운 금속 기둥에 부딪혔다.
커터칼을 꺼낼 수는 없다. 칼날을 켜는 순간 상대의 손가락이 잘릴 수도 있었다. 여기서 다치게 하면 사라진 마수보다 더 큰 문제가 된다.
"마지막으로 말할게요. 손 놓으세요."
"그래? 그럼 직접 확인하지."
D급 헌터는 현우의 옷을 잡아당기며 허리춤의 짧은 칼을 뽑았다. 협회 안에서 무기를 뽑자 주변의 헌터들이 일제히 물러났다.
태식의 표정이 굳었다.
"야. 칼까지 뽑으라는 말은 안 했잖아."
"겁주기만 하면 말을 듣겠냐?"
칼끝이 현우의 옆구리를 향했다.
현우는 몸을 비틀었다. 칼은 재킷을 찢으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 옷 아래에서 은회색 빛이 번졌다.
팅!
칼날이 튕겨 나갔다. D급 헌터의 손목이 크게 꺾이며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뭐야?"
현우도 숨을 멈췄다.
재킷에는 길게 찢어진 자국이 남았다. 그러나 회색 내복에는 실밥 하나 풀리지 않았다. 피부에는 칼끝이 닿았다는 감각조차 없었다.
D급 헌터가 당황한 얼굴로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칼 대신 주먹이었다.
현우는 한 걸음 옆으로 비켰다. 주먹이 어깨를 스쳤지만 내복 표면에서 힘이 미끄러지며 충격이 흩어졌다. 팔이 저리지도 않았다.
이건 칼만 막는 게 아니었다.
현우는 상대의 손목을 잡아당겨 균형을 무너뜨렸다. 몸이 가벼웠다. 그는 헌터의 팔을 등 뒤로 꺾고 무릎으로 다리를 눌렀다.
쿵!
D급 헌터의 얼굴이 바닥에 닿기 직전 멈췄다. 현우가 힘을 조금만 더 주면 코뼈가 부러질 자세였다.
"이제 손 놓으시죠."
상대는 신음하며 몸부림쳤다. 현우는 더 누르지 않고 팔을 밀어냈다. 헌터가 바닥을 구르며 일어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현우의 찢어진 재킷과 멀쩡한 내복에 꽂혔다.
유미란은 바닥의 칼을 주워 들었다. 칼날 끝이 둥글게 휘어 있었다.
"이 칼이 먼저 닿았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옷은 왜 멀쩡합니까?"
"안쪽에 보호 장비를 입었습니다."
"방한용 특수 내복이 칼도 튕겨 낸다고요?"
"저도 방금 알았습니다."
현우는 재킷의 찢어진 부분을 여몄다. 상품명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길게 할수록 꼬리가 늘어날 터였다.
태식이 물었다.
"그걸 어디서 구했지?"
"인터넷에서요."
"어느 사이트?"
"회원 전용이라 알려 드리기 어렵습니다."
현우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셀레스티얼 몰을 말한 것은 아니지만 질문을 부를 대답이었다.
마침 준호가 숨을 몰아쉬며 반납 구역으로 뛰어왔다.
"현우 씨! 괜찮아요?"
준호는 찢어진 재킷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현우가 괜찮다는 손짓을 하자 미란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감정팀에서 가죽값 일부 지급해도 된다고 했어요. 절단면은 추가 확인하지만 마수 자체에 문제는 없대요."
준호는 휴대폰을 꺼냈다.
"현우 씨 몫 절반 먼저 보낼게요."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입금 93,000원]
관리비 전액은 아니었지만 숨을 돌릴 만큼의 돈이었다. 현우는 주머니 속 고지서를 만지며 작은 안도감을 느꼈다.
유미란은 그 사이 전산 화면에 사건 기록을 입력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강현우 씨. 지난 이틀간 E급과 D급 게이트에서 신고된 공략 시간이 평균보다 짧아요. 전리품은 일부만 남았고요."
"준호 씨와 정산한 방식 때문입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래서 다음 공략부터 출입과 퇴장 시간을 자동 대조하겠습니다."
현우는 내복이 편한 만큼 더 많은 시선을 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숨겨야 할 물건이 하나 더 생겼다.
그는 상점 창을 몰래 열었다.
[에테르 항균 내복 착용 상태 확인]
[골드 회원 사전 심사 점수 반영: 생활 방호 의류 1건]
구매는 끝나지 않았다. 쓰임을 증명할 때마다 다음 문이 열릴지도 몰랐다.
현우는 찢어진 재킷을 가방에 넣었다. 현금은 일부 해결됐지만 관리비를 내고 나면 남는 돈은 거의 없었다. 포인트도 37 HP뿐이었다.
내복 덕분에 던전의 추위와 독기를 두려워할 이유가 줄었다. 가까이 붙어야 하는 커터칼의 위험도 조금은 낮아졌다.
현우는 협회 전광판에 뜬 E급 게이트 목록을 바라봤다.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안전한 곳부터 확인해 보려고요."
유미란은 전산 기록 옆의 조사 버튼을 눌렀다.
현우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다음 던전에서 포인트를 벌고 관리비를 내면 된다. 평소처럼 물건을 하나씩 사서 편하게 살 길을 만들면 된다.
하지만 협회 기록의 첫 줄에는 이미 새로운 문장이 입력되고 있었다.
[E급 헌터 강현우: 공략 시간 및 전리품 변동 확인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