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멸망시키지 않기 위해 만렙을 숨김

4화: 이상한 D급 던전
뚝배기에서 피어오르던 구수한 김이 붉은빛 알림창 너머로 흩어졌다.
강민우는 숟가락을 내려놓지 않은 채 시야 한가운데 깜빡이는 문구를 노려보았다.
[경고: 국지적 차원 왜곡 발생]
[발생 위치: 서울 서부 제4구역 '폐섬유공장 지하 갱도' D급 던전]
[공간 균열 확장률: 초당 +0.14%]
[현재 지구 차원 과부하율: 99.01% -> 99.03% 상승 중]
"진짜 숨 좀 돌리려니까……."
민우는 혀를 찼다.
국밥 한 그릇을 온전히 비우고 옥탑방으로 돌아가 늘어지게 낮잠을 자려던 계획이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서부 제4구역 폐섬유공장은 지금 있는 식당에서 마을버스로 네 정거장 거리였다. 걸어서 가도 2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곳이었다.
저곳의 공간 균열이 임계점을 넘어 차원 축이 뒤틀리면 반경 수 킬로미터 이내의 공간이 이계의 틈새로 빨려 들어간다. 옥탑방은 고사하고 방금 전 시킨 국밥집 건물째로 허공에 증발할 판이었다.
그는 뚝배기에 남은 밥과 순대를 남김없이 입안으로 쓸어 넣었다. 깍두기 국물까지 들이켠 뒤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이모님, 계산 여기 두고 갑니다!"
"어머, 총각. 천천히 먹고 가지 왜 그렇게 급해?"
"급한 볼일이 생각나서요."
민우는 작업복 점퍼를 걸쳐 입으며 식당 문을 밀고 뛰어나갔다.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마침 정류장에 들어서는 초록색 마을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안 라디오에서는 다급한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내 말씀드립니다. 서울 서부 제4구역 일대에 갑작스러운 마력 불안정 경보가 발령되었습니다. 인근 주민 여러분께서는 각성자협회 및 지자체의 대피 유도에 따라…….]
승객들이 웅성거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 하늘은 아직 맑았지만 서쪽 지평선 너머로 희미하게 보랏빛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있었다. 일반인의 눈에는 그저 노을빛처럼 보이겠으나 민우의 눈에는 공간의 결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비명으로 보였다.
'단순한 게이트 브레이크가 아니야.'
마수가 넘쳐 나오는 수준을 넘어 차원의 바닥 자체가 꺼져 내리고 있었다.
버스가 제4구역 진입로 입구에 서자마자 민우는 뒷문으로 뛰어내렸다.
폐섬유공장 주변 도로는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각성자협회 노란색 방호 차량들이 도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방패와 진압봉을 든 통제 요원들이 확성기를 들고 소리를 질렀다.
"물러서세요! 반경 500미터 이내 출입 금지입니다!"
"던전 내부 통신 두절! 즉시 2차 저지선으로 후퇴합니다!"
공장 정문 쪽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대여섯 명의 헌터들이 비틀거리며 기어 나오고 있었다.
오늘 아침 D급 던전 정벌에 나섰던 정규 공략대였다.
선두에 선 거구의 전사는 흉갑이 반쯤 녹아내린 채 한쪽 팔을 부여잡고 있었고 뒤따르는 마법사는 마나 역류로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괴물이…… 괴물이 문제가 아니야!"
공략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악을 썼다.
"던전 안쪽 벽이 갈라지면서 공간이 통째로 뒤집혔어! 보스룸에 발을 들이자마자 바닥이 허공으로 솟구쳤다고!"
"대장님, 저기…… 입구가!"
부상당한 헌터가 가리킨 공장 지하 출입구는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푸른빛을 띠어야 할 게이트 포털의 표면이 시커멓게 멍든 자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포털 테두리의 콘크리트 벽면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쩍쩍 갈라지며 날카로운 공간 파편들이 유리 조각처럼 튀었다.
치지지직!
공간이 찢어지며 뿜어내는 마찰음이 고막을 긁었다.
통제 요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차원 침식이다! D급에서 왜 이런 현상이 터지는 거야?!"
"상위 기동대 올 때까지 못 버팁니다! 전원 퇴각!"
헌터들과 협회 요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현장은 순식간에 텅 비어 버렸다.
깨진 유리창과 나뒹구는 방호벽 사이로 맹렬한 차원 폭풍만이 소용돌이쳤다.
민우는 공장 담벼락 뒤편의 녹슨 화물 컨테이너 그늘 속에 몸을 숨겼다.
시야 구석의 붉은 수치가 다시 한번 요동쳤다.
[경고: 공간 붕괴 임계치 도달 92초 전]
[지구 차원 과부하율: 99.04%]
[주의: 외부 파괴 충격 가인 시 연쇄 붕괴 확률 99.9%]
'힘으로 때려부수면 같이 터진다는 소리군.'
만약 민우가 전설급 스킬을 꺼내 던전째로 지워 버린다면 그 충격파를 견디지 못하고 서부 일대의 공간 축이 통째로 부러질 터였다.
그렇다고 방치하면 차원 침식이 현실로 번져 수천 명이 목숨을 잃는다.
"정말 귀찮게 하네."
민우는 헛웃음을 지으며 작업복 점퍼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
그는 흩날리는 콘크리트 먼지와 찌그러진 철골 파편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몸 안의 마력을 단 한 톨도 흘리지 않는 완벽한 은신 보법이었다. 발밑의 자갈조차 소리를 내지 않았고 찢어지는 차원 폭풍의 틈새를 미끄러지듯 통과했다.
지하 계단을 내려가 시커멓게 뒤틀린 게이트 입구 안으로 몸을 던졌다.
우웅!
시야가 회전하며 던전 내부로 진입했다.
내부는 지옥도 그 자체였다.
본래 평범한 암반 갱도였어야 할 던전의 중력이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거대한 바위 덩어리들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고 천장에서는 핏빛 번개가 번쩍였다.
갱도 깊은 곳, 본래 보스 마수가 잠들어 있어야 할 공터 한가운데에 거대한 허공의 균열이 찢겨 있었다.
길이 10미터가 넘는 거대한 틈새였다.
그 틈새 너머로 이계의 혼돈 마력이 검은 안개처럼 쏟아져 들어오며 지구의 차원 지지벽을 갉아먹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균열 주변에 서식하던 D급 마수 바위도마뱀 수십 마리가 차원 폭풍에 휘말려 뼈와 살이 분해되며 비명을 질렀다. 마수들의 생체 마력까지 흡수한 균열은 점점 더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붕괴 임계치 도달 45초 전]
[지구 차원 과부하율: 99.05%]
과부하율이 또 올랐다.
민우의 관자놀이에서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는 부유하는 바위 파편을 디딤돌 삼아 허공으로 가볍게 도약했다.
바람 한 점 일으키지 않는 고요한 도약이었다. 그는 찢어진 균열의 정중앙, 혼돈 마력이 가장 거세게 뿜어져 나오는 지점 바로 위에 도달했다.
민우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 끝에 맺힌 마력은 지극히 미세했다.
직접 방출 출력: 0.004%.
그는 자신의 힘으로 균열을 억누르려 하지 않았다. 대신 던전 내부에 휘몰아치는 거친 환경 마력과 마수들이 흩뿌린 잔류 마력의 결을 읽어냈다.
스스스스.
민우의 손끝이 허공을 가르며 가느다란 마력의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마법진이 아니었다.
만렙 상태창이 품고 있는 신화급 패시브 권능이자 차원의 의미와 경계를 물리적으로 확정 짓는 고대 기술이었다.
[개념 고정 룬 - 닫힌 경계의 쐐기]
민우의 손가락이 허공에 정교한 기하학적 룬 문자를 엮어내자 주변에 날뛰던 보랏빛 혼돈 마력이 룬의 궤적을 따라 빨려 들어갔다.
사방으로 날뛰던 폭풍이 룬의 테두리에 갇혀 팽팽한 실처럼 압축되었다.
민우는 그 압축된 마력 실을 찢어진 차원 균열의 양쪽 모서리에 걸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가볍게 오므렸다.
"닫혀라."
낮게 읊조린 한마디와 함께 허공에 새겨진 황금빛 룬이 푸른빛으로 반전되며 균열을 물어뜯듯 조여들었다.
콰드득!
공간이 맞물리는 둔탁한 소리가 갱도 전체를 울렸다.
찢겨 나갔던 차원의 경계면들이 마치 바느질로 꿰매어지듯 정교하게 맞물려 들어갔다. 틈새 너머로 쏟아져 들어오던 검은 안개가 차단되고 허공에 떠돌던 바위 덩어리들이 제자리를 찾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쿵, 쿵!
마침내 거대한 균열이 단 한 줄기 미세한 실선으로 좁혀지더니 퐁 하는 가벼운 파열음과 함께 허공 속으로 완전히 녹아 사라졌다.
거칠게 날뛰던 던전의 공기가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벽면의 핏빛 번개도 사라지고 잔잔한 푸른 마력만이 갱도 안을 부드럽게 감쌌다.
민우의 눈앞에 푸른 상태창이 떠올랐다.
[차원 봉합 완료]
[개념 고정 룬 안착: 경계 안정화율 100%]
[외부 방출 마력: 0.004%]
[지구 차원 과부하율: 99.01% (안정화 복귀)]
수치가 다시 원래대로 내려앉았다.
민우는 길게 숨을 내쉬며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하마터면 오늘 저녁도 못 먹고 날아갈 뻔했네."
던전 내부의 차원벽은 이제 어지간한 상위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너무 완벽하게 봉인된 탓에 오히려 조사관들이 오면 기이하게 여길 정도였다.
민우는 손가락을 가볍게 털어 허공에 남아 있던 룬의 잔향 마력을 먼지 속으로 흩어 버렸다.
자신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증거는 단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작업용 장갑을 주워 끼고 뒤를 돌아 갱도 출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지하 계단을 올라 게이트 포털 밖으로 빠져나오자 차가운 저녁 바람이 뺨을 스쳤다.
공장 밖에서는 여전히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저 멀리 도로 저편에서 푸른색 섬광등을 번쩍이는 협회 최상위 조사 차량과 고급 세단 몇 대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정문 앞에 멈춰 서는 모습이 보였다.
차량 문이 열리고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내는 상위 헌터들이 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민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무너진 공장 담벼락 옆 좁은 샛길로 조용히 빠져나갔다.
"빨리 집 가서 발이나 닦고 자야지."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어둑해지는 골목길을 향해 유유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