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의 후손이 현대 무림을 씹어먹음

4화: 망해가는 체육관의 마지막 회원
창틈으로 스며든 아침 햇살이 오래된 매트 위 먼지를 비췄다.
진우는 체육관 구석에 서서 천천히 숨을 골랐다. 가슴 깊이 공기를 들이마신 뒤 명치를 지나 아랫배 단전까지 지그시 밀어 넣었다.
오병석과의 대결 이후 시야가 검게 물들고 탈진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무턱대고 힘을 끌어올려 손목 밖으로 터뜨리면 몸이 버티지 못했다. [천극신수]의 호흡을 아주 잘게 쪼개어 단전 언저리에 불씨처럼 웅크리게 두는 법을 시험하는 중이었다.
삐걱거리는 철문을 열고 첫 손님이 들어섰다.
"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절뚝이는 걸음걸이로 들어온 이는 인근 골목에서 평생 미장 일을 해 온 박 노인이었다. 무릎 연골이 닳아 계단도 제대로 오르지 못하던 노인은 낡은 도복 바지로 갈아입고 링 구석 매트에 앉았다.
서태만이 수건을 어깨에 걸친 채 반갑게 맞았다.
"어르신, 오늘은 날씨가 맑아서 무릎이 덜 쑤시시죠? 어제 가르쳐 드린 대로 고관절부터 천천히 돌려 보세요."
서태만은 닳고 닳은 가죽 수첩을 펼쳐 들었다. 그 안에는 박 노인이 언제부터 어떤 관절 운동을 했는지 날짜별로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잠시 후 문이 다시 조심스럽게 열렸다. 커다란 안경을 쓴 중학생 민지가 체육관 안을 힐끗 살피며 들어왔다. 학교에서 또래들에게 밀려 위축되던 아이였다.
"관장님, 안녕하세요."
"민지 왔구나. 오늘은 줄넘기 무리하게 뛰지 말고 스텝 밟는 연습부터 하자. 가슴 펴고 발끝 세우고."
서태만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단단했다. 백호무도관처럼 번쩍이는 협찬 도복도, KMO 랭킹 점수를 매기는 최신 센서도 없었지만 서태만은 사람의 몸 상태를 세심하게 살피며 바른 자세를 잡아 주었다.
진우는 걸레를 쥔 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화려한 번화가의 프랜차이즈 학원들은 돈이 안 되는 노인이나 몸이 약한 아이들을 받지 않았다. 랭킹 점수를 올려 줄 유망주와 비싼 개인 강습을 끊는 회원들만 대접받는 세상이었다.
석 달 밀린 월세와 독촉장 속에서도 아버지가 왜 이 낡은 체육관을 끝끝내 놓지 못했는지 진우는 이제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은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버티게 해 주는 마지막 안식처였다.
'반드시 지켜야 해.'
진우의 손끝에 작지만 흔들리지 않는 힘이 깃들었다.
오전 8시 55분.
체육관 문이 거칠게 밀리며 두 명의 남자가 들어섰다. 회색 정장 가슴팍에 대한무술기구 KMO의 황금색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앞장선 남자는 얇은 금테 안경을 쓴 KMO 지역 점검관 강진혁이었다. 그 뒤로 다부진 체격의 보조 조사원 최준규가 두툼한 장비 가방을 들고 따랐다.
"여기가 태만 격투기 체육관 맞습니까?"
강진혁의 목소리는 건조했고 눈빛은 낡은 천장과 테이프로 기운 샌드백을 훑으며 노골적인 멸시를 드러냈다.
서태만이 수건을 내려놓고 앞으로 나섰다.
"대한무술기구에서 오셨습니까. 어제 문자는 받았습니다."
"민원이 정식 접수되었습니다. 인근 공인 교육관인 백호무도관 측에서 관원 안전 위협 및 출처 불명의 비공인 무공 사용 의혹을 제기했거든요."
강진혁이 태블릿을 톡톡 두드리며 문서를 내밀었다.
"상해 유발 가능성이 있는 미등록 무공을 지도했거나 미인가 수련생이 외부인을 위협했다면 즉시 체육관 등록 취소 및 영업 정지 처분이 내려집니다."
"말도 안 됩니다. 어제는 그쪽 관장이 먼저 찾아와서 억지 시범을 요구했던 겁니다!"
서태만이 항변했지만 강진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현대 무림의 질서는 KMO 등록 규정이 기준입니다. 증빙이 안 되면 불법 사설 도장으로 간주되죠. 특히 그 아드님이라는 학생, 서진우 군이 비공인 기술을 썼다는 진술이 있습니다."
강진혁의 날카로운 시선이 진우에게 꽂혔다.
"학생, 이쪽으로 와서 KMO 표준 측정 센서를 착용해."
박 노인과 민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진우를 바라보았다.
진우는 말없이 걸어 나가 매트 중앙에 섰다. 서태만이 막아서려 했지만 진우가 아버지의 팔을 가볍게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아버지. 검사받을게요."
최준규가 가방에서 검은색 밴드 형태의 KMO 표준 기력 측정기를 꺼내 진우의 양 손목과 쇄골 부근에 부착했다. 태블릿 화면에 심박수와 근육 활성도, 내력 파장이 실시간 그래프로 떠올랐다.
"규정대로 현장 적격성 대련 측정을 진행한다. 내가 가볍게 압박 공격을 가할 테니 평소 쓰던 대로 반응해라. 이상 파장이 300헤르츠를 넘거나 위험 내공이 감지되면 즉시 불합격이다."
최준규는 KMO 공인 3단 도복 띠를 맨 베테랑 조사원이었다. 그의 눈빛에는 햇병아리 고등학생을 한 번에 꺾어 꼬투리를 잡겠다는 악의가 어려 있었다.
최준규가 거칠게 거리를 좁혀 왔다.
훅!
묵직한 정권이 진우의 턱을 향해 뻗어 나왔다. KMO 표준 타격술 특유의 힘을 실은 직선 공격이었다.
진우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천극신수]의 호흡을 지극히 평온하게 유지하며 아랫배의 기운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혔다. 겉으로 드러나는 내력은 제로에 가까웠다.
대신 상대의 발목 각도와 어깨의 쏠림을 보았다.
주먹이 닿기 직전, 진우는 고개를 반 뼘만 비틀어 타격을 흘렸다.
동시에 손바닥으로 최준규의 팔꿈치 관절 바깥쪽을 가볍게 짚었다. 힘을 주어 꺾은 것이 아니라 상대가 내지른 힘의 진행 방향을 옆으로 살짝 유도했을 뿐이었다.
휘청!
자신의 체중과 타격력을 주체하지 못한 최준규가 앞으로 쏠리며 헛발을 디뎠다.
"이 자식이…!"
당황한 최준규가 곧바로 몸을 회전시키며 낮게 로우킥을 차올렸다. 매트 바닥을 차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진우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차라리 반 발자국 안으로 파고들며 최준규의 디딤발 무릎 옆에 자신의 정강이를 가볍게 댔다.
지렛대의 원리처럼 중심축이 걸린 최준규는 다리를 휘두르다 말고 스스로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매트에 나뒹굴었다.
쿵!
체육관 안에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강진혁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급히 태블릿 화면을 확인했다.
[심박수: 74 bpm (정상)]
[내력 방출량: 12 Hz (미검출 수준)]
[판정: 단순 신체 반사 및 지렛대 균형 유도]
화면 어디에도 위험한 외공이나 미등록 내공의 폭발적 파장은 잡히지 않았다.
진우는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제자리에 섰다. 내력을 바깥으로 뿜어내는 현대의 퍼포먼스 무공과 달리, 태극의 이치는 상대의 힘을 이용해 허실을 뒤집는 정통 무학이었다. 규격화된 KMO의 기계로는 결코 잡아낼 수 없는 심오한 영역이었다.
바닥에서 일어난 최준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점검관님, 이놈이 이상한 꼼수를 썼습니다!"
"그만해."
강진혁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 기계 수치가 정상을 가리키고 있는 이상 억지를 부리면 도리어 KMO의 공정성에 흠집이 날 터였다.
강진혁은 안경을 고쳐 쓰며 태블릿의 측정 완료 버튼을 눌렀다.
"……현장 측정 결과, 즉각적인 안전 위해 요소는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서태만이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강진혁의 입가에 짓궂은 냉소가 걸렸다. 그는 가방을 챙기며 서태만에게 싸늘한 경고를 던졌다.
"하지만 안심하긴 이릅니다, 서 관장님. 2주 뒤에 KMO 분기 정기 실사가 있습니다. 그때까지 밀린 협회비와 공과금을 납부하지 못하거나 공인 대회 출전 실적이 전무할 경우 체육관 등록은 자동 말소됩니다."
"2주라니요, 보통 한 달 유예를 주는 게 원칙 아닙니까?"
"백호무도관을 비롯한 지역 협의회에서 정밀 감사를 요청했거든요. 실적이 없으면 자격 미달로 문을 닫아야 합니다. 그게 현대 무림의 룰입니다."
강진혁과 최준규는 더 머무르지 않고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자 박 노인이 다가와 진우의 등을 두드렸다.
"진우야, 정말 대단하구나.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민지도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꾸벅 인사를 건넸다.
회원들이 돌아간 뒤, 서태만은 텅 빈 체육관 매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파스 붙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는 그의 어깨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진우야… 내가 못나서 너한테까지 짐을 지우는구나."
"아니에요, 아버지."
진우는 아버지 곁에 다가가 앉았다.
"2주 뒤 실사, 제가 해결할게요. 공인 대회 실적이 필요하면 제가 KMO 청소년 루키전에 나가면 돼요."
"진우 너는 몸도 약한데 거길 어떻게 나가…."
"저 이제 안 약해요. 아까 보셨잖아요."
진우의 눈동자는 깊고 맑았다.
어제까지는 당장 닥친 빚과 괴롭힘을 피하기에 급급했지만 이제는 달랐다.
아버지의 체육관을 지키고 정통 무학의 가치를 되찾기 위해서는 숨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협찬과 랭킹으로 왜곡된 현대 무림의 무대에 직접 올라 가짜들을 부숴 버려야 했다.
진우는 가방 속 주칠 궤짝의 비화록을 떠올리며 단전에 고요히 잠든 기운을 다시 한번 갈무리했다.
그 시각, 백호무도관 본관 앞.
선팅된 검은 세단 주변으로 협찬 브랜드 로고가 화려하게 박힌 도복을 입은 상급 수련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오병석 관장의 연락을 받고 체육관을 손봐주기 위해 집결한 이들이었다.
폭풍 전야의 그림자가 서서히 낡은 체육관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