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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바둑기사는 판 위에서 미래를 읽는다1화

천재 바둑기사는 판 위에서 미래를 읽는다

천재 바둑기사는 판 위에서 미래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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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판 위의 분기

“하나. 둘. 셋.”

전자 계시기의 건조한 기계음이 고요한 대국실의 공기를 잘게 쪼갰다.

가로세로 열아홉 줄의 비자나무 바둑판 위에는 흑백의 돌들이 빽빽하게 얽혀 있었다. 백여든일곱 수. 종반으로 접어든 반상은 이미 생사의 갈림길을 지나 거친 파도마저 잦아든 상태였다.

윤태오는 왼손 검지 끝으로 바둑통 안의 흑돌 하나를 가만히 굴렸다. 매끄러운 옥돌의 감촉이 손끝을 스쳤지만 답답하게 굳은 형세는 풀리지 않았다.

상대는 입단 15년 차의 베테랑 노진우 7단이었다.

‘세 집 반.’

태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미 수십 번을 거듭한 계가의 결과는 냉혹했다.

중앙의 두터움을 내주고 실리를 취했던 초반의 구상이 우상귀의 패싸움에서 어그러졌다. 노진우는 결코 무리수를 두지 않는 기사였다. 반 집의 이득이라도 확실하다면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철벽의 수비형. 그가 굳혀 놓은 영토는 끝내기 단계에서 뒤집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넷. 다섯. 여섯.”

계시기가 마지막 초읽기를 재촉했다. 이번 랭킹전 본선 진출권을 놓치면 올해 남은 주요 기전의 시드권마저 모조리 날아간다. 입단 3년 차. 천재 신예라는 꼬리표는 이미 유통기한이 지나가고 있었다. 큰 승부의 길목마다 찾아오는 반 집 차이의 패배. 사람들은 그것을 담력의 부족이라 불렀고 태오 자신도 그렇게 여겨 왔다.

‘어디서부터 비틀어야 하지.’

태오는 숨을 멈추고 우하귀에서 중앙으로 뻗어나간 백의 진형을 훑었다. 상식적인 수순으로는 빈틈이 없었다. 정석대로 젖혀 잇는다면 세 집 반의 차이는 고스란히 굳어진다. 끼워 잇는 수는 백의 단수에 걸려 자충이 된다.

그때였다.

관자놀이 부근에서 바늘로 쿡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

태오의 시야가 기이하게 일렁였다.

대국실 천장의 형광등 불빛이 한순간 차갑게 바래더니 바둑판 위의 검고 흰 돌들이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눈이 피로해서 생긴 착시가 아니었다. 흑돌과 백돌이 맞물린 격자선 위로 가느다란 은빛 선들이 거미줄처럼 뻗어나갔다.

마치 기보 용지 위에 연필로 덧그린 변화도 같았다.

‘이게 뭐지?’

태오는 당혹감에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기이한 광경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격자점 위에 흐릿한 잔상으로 떠오른 흑돌의 착점. 그 좌표를 따라 은빛 선이 갈라지더니 귓가에 전혀 다른 소리들이 겹쳐 들려왔다.

— 흑이 우하귀를 건너붙인다면 백은 침착하게 뻗어서 대응할 겁니다. 반집 차이도 안 나요. 노진우 7단이 질 수 없는 형세입니다.

해설자 한서린의 건조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둑판 너머에 앉은 노진우의 얼굴 위로 십 분 뒤 그가 지을 안도감 어린 미소가 겹쳐 보였다. 복기실에서 찻잔을 들며 승리를 곱씹는 노진우의 여유로운 손짓까지도 환영처럼 어른거렸다.

‘환각인가? 과로 때문에 뇌에 이상이라도 생긴 건가?’

태오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하지만 눈앞의 갈래길은 너무나 선명했다. 우하귀를 붙이는 길, 중앙을 끊어가는 길, 상변을 삭감하는 길. 그 모든 갈래의 끝은 태오의 고개 숙인 패배와 노진우의 담담한 악수로 이어져 있었다.

“일곱. 여덟.”

초읽기 안내 음성이 심장을 조여왔다.

그 순간 태오의 시선이 가장 어둡고 비상식적인 은빛 갈래선 하나에 멎었다.

좌변 백의 장벽 밑바닥.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 자리에 스스로 공배를 채우는 듯한 빈삼각의 착점이었다. 프로 기사라면 악수 중의 악수라며 손가락질할 만한 비효율의 극치.

그런데 그 기이한 잔상 위로 뻗어나간 미래의 갈래는 전혀 다른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 어? 저게 뭡니까? 윤태오 5단, 시간에 쫓겨 손이 미끄러진 건가요?
— 아니요, 잠깐만요. 노진우 7단의 손이 멈췄습니다.

환영 속에서 노진우는 미소를 짓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핏기가 가신 얼굴로 턱을 괴며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그가 당황하여 둔 한 수가 백의 자충을 부르고 연쇄적으로 중앙의 대마가 얽혀 들어가는 파국의 수순.

‘이게…… 보인다고?’

이유를 따질 시간은 없었다.

“아홉.”

탁.

태오는 망설이지 않고 흑돌을 집어 반상 위에 내리꽂았다.

좌하귀 십삼의 사.

돌이 바둑판에 부딪히며 맑고 단단한 파열음을 냈다.

정적에 휩싸여 있던 대국실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노진우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

노진우는 태오가 둔 자리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실수라 여긴 듯 그의 입가에 엷은 실소가 스쳤다. 시간에 쫓겨 허둥대다 엉뚱한 자리에 돌을 떨어뜨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노진우는 가볍게 손을 뻗어 바둑통으로 향했다. 당연히 찔러 들어가 흑을 응징하려는 손길이었다.

그러나 바둑통에 닿기 직전 노진우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뚝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좌변의 흑돌과 중앙 백의 호구 모양을 빠르게 오갔다.

‘찔러가면…… 막는다. 끊으면 단수 치고 넘어가는데, 그때 좌하의 축이……?’

노진우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태오는 숨을 죽인 채 상대의 얼굴을 응시했다. 은빛 선으로 보았던 미래의 잔상과 지금 눈앞의 현실이 소름 끼치도록 완벽하게 겹쳐지고 있었다. 노진우의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 떨리는 입술, 가빠지는 호흡까지도 전부.

“하나. 둘. 셋.”

이번에는 노진우를 향해 초읽기가 시작되었다.

언제나 여유만만하던 베테랑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안전하게 이기려던 계산이 태오가 던진 기묘한 빈삼각 한 수에 완전히 꼬여버린 것이다. 뒤로 물러서자니 두 집을 손해 보고, 정면으로 받자니 숨겨진 변화의 덫이 너무 깊었다.

“일곱. 여덟. 아홉.”

“아, 젠장…….”

노진우가 작게 욕설을 짓씹으며 백돌을 놓았다.

탁.

그것은 예지 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자리였다. 당황한 끝에 위험을 피하려다 오히려 스스로의 활로를 좁혀버린 완착.

태오는 차가운 전율을 느끼며 즉각 다음 흑돌을 집어 들었다.


“말도 안 됩니다. 저건 완전히 노진우 7단의 착각을 유도한 마법 같은 수순이에요.”

대한기림회 방송 스튜디오 안.

모니터를 응시하던 해설자 한서린은 손에 쥐고 있던 붉은색 플러스펜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중계 화면 속 바둑판 형세 그래프가 요동치고 있었다. 85퍼센트를 가리키던 백의 승률이 단 세 수 만에 50퍼센트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한서린 위원님, 방금 윤태오 5단의 좌하귀 빈삼각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인공지능 분석 프로그램도 처음에는 일치율 1퍼센트 미만의 완착으로 분류했었는데요.”

캐스터가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한서린은 붉은 펜을 고쳐 쥐며 모니터 속 기보를 빠르게 짚었다.

“인공지능의 계산은 완벽한 수비만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대국을 하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에요. 윤태오 5단이 둔 수는 인공지능의 최선수는 아니었지만, 노진우 7단이라는 인간이 가진 심리적 맹점을 100퍼센트 파고든 수였습니다.”

한서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시간에 쫓긴 상대가 안전제일주의로 물러설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결코 둘 수 없는 수예요. 만약 백이 최강으로 버텼다면 흑이 망하는 길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윤태오 5단은 마치 노진우 7단이 어디로 물러설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주저 없이 손을 뻗었습니다.”

“상대의 다음 수를 미리 내다보고 둔 함정이었다는 말씀인가요?”

“내다본 수준이 아닙니다. 상대를 그 자리로 몰아넣은 것에 가까워요.”

한서린은 중계 카메라 너머 대국실의 윤태오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모니터 속 태오는 미동조차 없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날카로운 눈에는 소년의 창백한 안색과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가 고스란히 들어왔다.

‘저건 단순한 배짱으로 둘 수 있는 수가 아니야. 대체 판 위에서 뭘 본 거지?’


“계가하겠습니다.”

기록원의 목소리와 함께 두 기사가 사석을 메우기 시작했다.

바둑판 위의 집을 정리하는 노진우의 손길은 이미 힘을 잃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이따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흑 반 집 승입니다.”

기록원의 선언이 떨어졌다.

반 집.

벼랑 끝에서 거둔 기적 같은 역전승이었다.

“……잘 뒀습니다.”

노진우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태오는 깍듯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러나 승리의 희열을 느낄 틈도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뇌수를 쥐어짜는 듯한 편두통이 밀려왔다.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고 바둑돌을 쥐었던 왼손의 검지와 중지가 굳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큭…….’

태오는 비틀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가누며 대국실 문을 밀고 나왔다.

복도의 서늘한 공기가 뺨을 때렸지만 손끝의 마비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벽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정수리 위에서 낯익고 묵직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이겼더구나.”

태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낡은 회색 코트를 걸친 노인이 서 있었다. 구부정한 어깨와 희끗희끗한 머리칼. 그러나 깊게 파인 주름 속의 눈빛만큼은 반상 위의 어떤 고수보다도 날카롭게 빛나는 사람.

태오의 스승 백무진 9단이었다.

“사부님…….”

“손이 차구나.”

백무진의 시선이 태오가 코트 주머니 속에 숨기려던 왼손 끝에 머물렀다. 떨림을 감추지 못하고 바들거리는 손가락을 노기사는 묵묵히 응시했다.

복도 저편에서 승전보를 취재하려는 기자들의 발소리가 웅성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백무진은 다가오는 소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태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태오야.”

“예, 사부님.”

“방금 판 위에서…… 무얼 보았느냐.”

그것은 단순한 승리의 소감을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태오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숨을 삼켰다. 스승의 깊은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마치 금지된 문을 열어버린 아이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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