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에서 죽는 삼류 악당이 되었다

6화: 첫 번째 기연
본채 대청의 공기는 서늘했다.
동이 트기 시작하자 창살 틈으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길게 드리웠다. 탁자 위에는 약방 약재함 아래에서 찾아낸 은전 꾸러미와 위조 처방전 그리고 검은 먹으로 덧칠된 세 줄 배송 표식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설가장 가주 설무경은 묵묵히 처방전의 종이 끝을 매만졌다. 그의 깊고 무거운 시선이 바닥에 엎드린 연화에게서 백위량에게로 천천히 옮겨 갔다.
"연화는 지하 옥사에 두고 상처를 돌보아라. 동생의 행방을 알아낼 때까지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엄중히 감시해야 한다."
"예, 가주님."
호위 무사들이 연화를 부축하여 대청 밖으로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가주 설무경과 설소운, 설수연 그리고 백위량만이 남았다.
설무경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백위량이라 하였느냐."
"예, 가주님."
"네놈이 흑풍채의 기습로를 알렸고 마봉칠의 암수를 막았다. 곽노삼의 내통을 밝혀 수로문을 지켰으며 약방의 등불 신호까지 정확히 짚어냈다."
설무경의 날카로운 안광이 백위량을 꿰뚫을 듯 쏘아보았다. 장내를 짓누르는 가주의 기파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사파의 일개 졸개가 어찌 이토록 장원의 급소를 손바닥 보듯 훤히 꿰고 있단 말이냐? 장흑산이 보낸 또 다른 첩자가 아니라고 내 어찌 확신하겠느냐?"
가주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백위량은 속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서 한 끗이라도 삐끗하면 장원을 구한 은인이고 뭐고 단칼에 모가지가 날아갈 판이었다.
백위량은 가장 순박하고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바닥에 깊숙이 엎드렸다.
"가주님! 소인은 본래 무공도 미천하고 배운 것도 없는 흑풍채의 말단 짐꾼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흑풍채 놈들이 말단들을 고기 방패로 내몰고 쓸모가 다하면 토사구팽하는 꼴을 수없이 보아 왔습니다."
백위량은 목소리를 파르르 떨며 애절함을 한껏 담았다.
"살고 싶었습니다. 그 악귀 같은 소굴에서 목숨을 건져 평범하게 살고 싶었기에 놈들의 동선과 수상한 움직임을 뼈에 새기듯 관찰했을 뿐입니다. 장원을 해칠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소장주님의 칼날 앞에 무릎을 꿇고 제 목숨을 미끼로 던졌겠습니까?"
곁에 서 있던 설소운이 주저 없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버지, 백 형의 말이 옳습니다. 어젯밤 빈채 창가에서 미끼가 되어 주지 않았다면 약방의 내통자를 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오직 정의와 신의로 저희 가문을 도왔습니다."
설수연 역시 차분하고 명료한 목소리로 거들었다.
"가주님, 그가 지목한 장부와 인장 그리고 신호의 방향은 모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았습니다. 만약 흑풍채가 심어 둔 첩자라면 결코 내줄 수 없는 치명적인 정보들이었습니다."
설무경의 굳었던 눈매가 서서히 풀렸다. 그는 수염을 천천히 쓸어내리더니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일어나라."
설무경의 손짓에 하준이 다가와 백위량의 손목을 묶고 있던 밧줄을 단칼에 끊어 냈다.
손목을 옥죄던 올가미가 풀려나가자 백위량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마침내 살아남았다! 처참하게 목이 잘릴 운명이었던 악당의 사망 플래그를 완벽하게 분쇄한 것이다!
설무경이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설가장은 은원을 분명히 하는 가문이다. 네가 사파에 몸담았던 과거는 더 이상 묻지 않겠다. 장원을 구한 은공을 치하하여 본채 서익랑의 객방을 내주고 은전 오십 냥을 하사하마. 몸을 추스르고 당분간 장원의 귀빈으로 머물도록 해라."
"가주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백위량은 바닥이 쿵 울리도록 정중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완벽했다. 이제 푹신한 비단 이불에 누워 기름진 고기와 따뜻한 밥을 먹으며 평생 설가장의 한량으로 유유자적 꿀을 빨면 되는 것이었다.
서익랑 객방은 상상 이상으로 호화로웠다.
두툼한 비단 요가 깔린 침상과 은은한 백단향이 피어오르는 탁자. 창밖으로는 정갈하게 가꾸어진 연못과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종이 정성스레 가져다준 따뜻한 차와 고급 다과를 입에 넣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캬, 이게 인생이지. 역시 주인공 라인을 타야 해."
백위량은 탁자에 다리를 편하게 꼬고 앉아 차를 들이켰다.
원작 소설 <천마강림>의 주인공 설소운은 타고난 검술 천재에 인성까지 바른 먼치킨이다. 비록 지금은 가문의 위기를 겪고 있지만 머지않아 중원 무림을 평정할 천하제일인이 될 운명이었다.
그런 거물의 '목숨을 구해준 절대적인 은인' 자리를 꿰찼으니 미래는 탄탄대로였다.
"가만히 누워서 설소운이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만 구경하면 된다. 위험한 싸움은 소운이가 다 알아서 해줄 테고 나는 뒤에서 은인 대접이나 받으면서 늙어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면 끝이지."
백위량은 실실 웃으며 비단 침상 속으로 몸을 던졌다. 푹신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온몸을 감쌌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행복한 미래를 그리던 백위량의 머릿속에 불현듯 차가운 벼락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
백위량은 용수철처럼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의 머릿속에서 원작 소설 <천마강림> 초반의 줄거리가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원작에서 설가장은 흑풍채의 야습을 받아 처참하게 불탔다. 설소운은 혈투 끝에 중상을 입고 간신히 탈출하여 북쪽 망월곡(望月谷) 칠성애(七星崖)로 쫓겨 갔다.
그리고 거기서 장흑산의 추격을 피해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 절벽 아래 깊숙이 자리한 은월동(隱月洞)에서 설소운은 20년의 순양내공을 단숨에 채워주는 전설의 영약 '만년지상(萬年地蔘)'을 발견해 복용했다.
만년지상의 신묘한 약력 덕분에 설소운은 단숨에 일류 고수로 각성했고 단신으로 흑풍채를 몰살시키며 화려한 복수극의 서막을 열었던 것이다.
백위량의 등골을 타고 얼음장 같은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기연이…… 날아갔잖아?!"
백위량은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 원작을 비틀어 흑풍채의 야습을 완벽하게 막아 버린 탓에 설소운은 중상을 입지도 않았고 칠성애 절벽으로 도망칠 일도 없어졌다.
즉 설소운이 만년지상을 먹고 20년 내공을 얻을 이벤트가 통째로 증발해 버린 것이다!
"안 돼! 이건 절대 안 된다고!"
백위량은 방 안을 미친 듯이 서성거렸다.
원작의 타임라인대로라면 흑풍채를 격퇴한 직후 인근의 거대 사파 세력인 '혈랑채(血狼寨)'가 장흑산의 지원 요청을 받고 설가장으로 쳐들어온다.
혈랑채주 독랑검 조패는 일류 상급의 절정 고수였다. 원작에서는 만년지상을 먹고 일류로 각성한 설소운이 혈투 끝에 조패의 목을 베었지만 지금의 설소운은 아직 이류 중급에 불과했다.
내공 증폭이 없는 설소운으로는 혈랑채의 보복을 막아낼 수 없었다. 설소운이 패배하면 설가장은 멸문당할 것이고 설가장이 무너지면 은전 백 냥의 현상금이 걸린 자신은 뼈도 못 추리고 끔살당한다.
"소운이가 무적의 방패가 되어 줘야 내가 안전한 건데 방패에 구멍이 뚫리면 어떡해!"
만년지상은 본래 그 자리에서 백 일 동안만 온전한 영기를 유지하다가 땅속으로 흩어지거나 동굴 속의 독사에게 먹혀 사라지는 까다로운 영약이었다.
지금 당장 찾아내서 설소운의 입에 억지로라도 쑤셔 넣어야만 했다.
"내가 먹을까? 아니지. 내 삼류 잡탕 내공으로는 만년지상의 맹렬한 순양화기를 견디지 못하고 주화입마로 혈관이 터져 죽는다."
답은 하나뿐이었다. 설소운을 그 동굴로 끌고 가서 만년지상을 먹여야 했다.
오후의 연무장에는 거친 파공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쉬익! 촤아악!
설소운의 청강검이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검풍을 일으켰다. 푸른빛이 감도는 검결은 정교했으나 그의 미간에는 깊은 고뇌가 서려 있었다.
"하압!"
검을 거둔 설소운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소장주님, 검술이 참으로 눈부십니다."
나직한 목소리에 설소운이 고개를 돌렸다. 단정한 객복으로 갈아입은 백위량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설소운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번졌다.
"백 형! 몸은 좀 괜찮으시오? 가주님께서 내주신 객방은 마음에 드십니까?"
"덕분에 과분할 정도로 편안히 쉬었습니다. 헌데 소장주님의 검에 깊은 수심이 깃들어 있는 듯하여 다가왔습니다."
설소운은 검을 칼집에 꽂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흑풍채를 물리쳤으나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장흑산은 달아났고 도망친 약재 마차의 배후에는 더 거대한 사파 세력이 도사리고 있을 터. 가문을 지키기에는 제 검과 내공이 너무도 턱없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백위량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판이 완벽하게 깔렸다.
백위량은 짐짓 진중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살폈다.
"소장주님, 실은 제가 사파에 몸담았을 때 들었던 지형과 약재에 관한 정보가 하나 있습니다."
"정보라니요?"
"도망친 약재 마차의 흔적과 장흑산 잔당의 예상 도주로가 겹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북쪽 망월곡 너머의 칠성애 일대입니다."
설소운의 눈이 커졌다.
"칠성애라면 험준한 바위산과 짙은 안개로 유명한 악지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흑풍채 놈들이 비상 은신처로 삼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지요. 게다가 칠성애 절벽 깊은 골짜기에는 외상과 내상의 지혈에 탁월한 효능을 지닌 희귀 약초 적심초 군락이 자생한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백위량은 설소운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어젯밤 장원을 지키다 수많은 호위 무사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놈들의 잔당 흔적도 정찰하고 무사들을 치료할 약초도 구할 겸 저와 함께 칠성애를 답사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설소운의 두 눈에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의 빛이 차올랐다.
"백 형……! 형님은 스스로의 안위보다 부상당한 장원의 무사들과 가문의 앞날을 먼저 걱정하고 계셨던 것입니까?"
'아니, 그냥 네 입에 영약 처넣으러 가자는 건데.'
백위량의 속마음과는 달리 설소운은 백위량의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사파의 위협 속에서 갓 벗어나 편히 쉬셔야 할 분이 이토록 가문을 위해 헌신하시다니…… 참으로 부끄럽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아, 아닙니다. 소장주님. 그저 미력이나마 보태고자……."
"어디를 가시겠다는 겁니까?"
서늘하고 맑은 목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갈랐다.
고개를 돌리자 장원의 지도를 든 설수연이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백위량을 찬찬히 훑었다.
"칠성애라니요. 그곳은 사파의 잔당이 숨어들기 쉬울 뿐더러 독사와 맹수가 들끓는 위험천만한 험지입니다. 백 공자께서는 어찌하여 굳이 그곳을 지목하셨습니까?"
설수연의 의구심 어린 질문에 백위량은 침착하게 미소를 지었다. 원작의 설정을 낱낱이 꿰고 있는 고인물의 지식이 빛을 발할 차례였다.
"수연 낭자, 칠성애는 겉보기에 험악하나 그 산세의 바람길을 알면 사파 무리들의 이동 경로가 훤히 보입니다. 칠성애 남쪽 골짜기는 낮에는 짙은 운무가 끼지만 오후 신시가 되면 북서풍이 불어 안개가 걷히고 숨겨진 동굴의 입구가 드러납니다."
백위량은 지도의 특정 계곡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약재 마차가 남긴 바퀴 자국도 결국 망월곡의 좁은 협로를 우회해야만 합니다. 지금 선제적으로 그 길목의 지형을 파악해 두지 않으면 사파의 본대가 기습해 올 때 낭패를 보게 될 것입니다."
설수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백위량이 짚어낸 바람길과 협로의 위치는 장원의 늙은 사냥꾼들조차 쉽게 알지 못하는 정밀한 지형 정보였다.
'이 사내는 단순한 삼류 말단이 아니다. 강호의 지리와 형세를 꿰뚫어 보는 비범한 혜안을 숨기고 있어.'
설수연의 경계심은 깊은 경외감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지도를 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의 혜안이 놀랍군요. 타당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소운 오라버니와 정예 무사 두 명을 대동하여 다녀오십시오. 장원의 후방과 잔여 내통망은 제가 철저히 지키겠습니다."
"고맙소, 수연."
설소운이 주먹을 불끈 쥐며 백위량을 바라보았다.
"백 형, 내일 동이 트는 즉시 칠성애로 출발합시다!"
"예, 소장주님. 만반의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백위량은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첫 번째 기연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절벽 아래 은월동에 잠들어 있는 만년지상. 그 영약을 반드시 설소운에게 먹여 천하제일의 든든한 고기 방패로 키워내리라.
백위량의 입가에 뻔뻔하고도 은밀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