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인공의 호위기사로 취직했습니다

5화: 은빛 봉인과 등불의 그림자
서재 테이블 위에 놓인 은빛 봉투는 등불 아래에서 차가운 광택을 뿜어냈다.
봉투 윗부분에는 황실 우편국의 공식 인장이 선명하게 압인되어 있었고 그 바로 아래에는 체스터 공작가의 상징인 포효하는 사자 문장이 붉은 밀랍으로 굳어 있었다.
마르센은 마른침을 삼키며 손끝으로 봉투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황실 우편국의 특급 봉인입니다. 이건 황실 업무나 공적인 귀족 소환에만 쓰이는 직인인데... 대체 공작 전하께서 어떻게 이 직인을 개인 서한에 붙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적인 초대장이 아니라 공문서처럼 꾸며서 거절할 수 없게 만들려는 겁니다.”
로잘린은 탁자 위에 놓인 편지칼을 집어 들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밀랍을 갈라내자 빳빳한 양피지 한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클라라는 로잘린의 옆에 바짝 다가서서 숨을 죽인 채 문서를 내려다보았다.
양피지에 적힌 문장은 정중한 격식을 차리고 있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도는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제국 황실 자선 바자회 준비 위원회. 본 위원회 부위원장 에드윈 드 체스터 공작은 에린 자작가의 클라라 영애를 명예 위원으로 위촉하고자 하오니 내일 정오 황실 별관에서 열리는 사전 간담회에 동행할 것을 정중히 요청합니다. 본 건은 황실 공식 후원 행사이므로 공적인 의무에 준합니다.’
“명예 위원 위촉이라니... 저는 그런 직책을 신청한 적도 없어요.”
클라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황실 후원 행사라고 적혀 있으면 제가 거절했을 때 황실의 뜻을 거스르는 게 되는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저희 가문에 해가 갈까 봐...”
“그렇지 않습니다.”
로잘린은 양피지 하단을 가리키며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보십시오. 문서의 직인은 황실 우편국의 ‘발송 확인인’일 뿐이고 정작 황실 내명부나 시종원의 ‘공식 칙허인’은 찍혀 있지 않습니다. 이건 체스터 공작이 준비 위원이라는 직함을 남용해 우편국에서 공용 봉투만 발급받아 보낸 사설 서한입니다.”
“정말인가요?”
“제국 사교 의례 규정 제12조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황실 공무라 할지라도 개인에게 직책을 위촉할 때는 최소 3일 전 정식 칙허장과 함께 본인의 수락 서명을 받아야 합니다. 하루 전날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마차를 보내 데려가려는 행위는 명백한 사교 예법 위반이자 월권행위입니다.”
마르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입니다. 법적 구속력이 있는 칙령이 아니라면 거절할 수 있겠군요.”
“단순한 거절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로잘린은 서재 잉크병을 열고 클라라 앞에 양피지를 새로 펼쳤다.
“공작은 영애께서 법률을 잘 모를 거라 짐작하고 황실 봉인을 앞세워 겁을 준 겁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영애께서 제국의 정식 규정을 인용해 당당하게 반박해야 합니다. ‘황실 칙허인이 누락된 사적 요청이므로 참석할 수 없다’는 서한을 작성해 황실 우편국 공식 접수처와 공작가에 동시에 사본을 보내십시오.”
클라라는 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제 손으로 직접 쓰겠어요.”
로잘린이 읊어 주는 법조항을 받아 적는 클라라의 손끝은 처음에는 조금 떨렸으나 문장이 완성될수록 점차 흔들림이 잦아들었다.
서명을 마친 클라라가 고개를 들며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분홍빛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녹송석 눈동자가 맑게 빛나고 있었다.
“로잘린이 곁에 있어 주지 않았다면 저는 또 겁을 먹고 끌려갈 뻔했어요. 정말 고마워요.”
“감사는 모든 위협을 완전히 털어낸 뒤에 받겠습니다.”
로잘린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서류상의 덫은 걷어냈지만 진짜 문제는 저택 내부에 남아 있습니다.”
“마구간 뒤에서 나온 쪽지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해 질 무렵 동쪽 창의 등불을 보라’는 문구는 외부의 누군가에게 영애님의 동태를 알리기 위한 암호입니다. 해가 진 지금이야말로 그 신호를 확인하려는 자가 움직일 시간입니다.”
로잘린은 외투를 여미며 허리춤의 검을 점검했다.
“베른 경과 함께 동쪽 정원을 수색하겠습니다. 영애님께서는 방 안에서 문을 잠그고 제가 돌아올 때까지 절대 창가에 다가가지 마십시오.”
“조심하세요, 로잘린.”
클라라의 진심 어린 당부를 뒤로한 채 로잘린은 차가운 복도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밤이 깊어지자 에린 저택의 정원은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구름이 달빛을 가려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든 시간이었지만 로잘린의 감각은 칼날처럼 팽팽하게 곤두서 있었다.
전생에서 수없이 겪었던 야간 잠복의 감각이 핏속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바람의 방향과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흙을 밟는 미세한 무게감까지 온몸의 신경이 주변을 훑었다.
“로잘린.”
낮게 깔린 베른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동쪽 온실 뒤편에 사람 그림자가 하나 잡혔다. 정원 관리용 통로 쪽으로 숨어들고 있어.”
“움직이지 말고 퇴로만 막으십시오. 제가 직접 잡겠습니다.”
로잘린은 발소리를 완전히 죽인 채 어둠을 타고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장미 덤불 너머로 희미한 불빛이 깜빡였다.
한 사내가 작고 어두운 차광등을 손에 쥔 채 동쪽 처소 2층, 즉 클라라의 침실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내는 품에서 덮개를 살짝 열어 불빛을 세 번 깜빡였다.
신호였다. 2층 창문에 불이 켜져 있는지 확인하고 저택 외곽에 대기 중인 공작가의 하수인들에게 영애의 취침 여부를 알리려는 손짓이었다.
사내가 다시 한번 불빛을 깜빡이려는 순간 로잘린의 손이 어둠을 가르고 뻗어 나갔다.
사각.
로잘린은 사내의 어깨를 낚아채 바닥으로 내리누른 뒤 반대쪽 손으로 차광등을 낚아채 바닥에 짓이겼다.
“커억...!”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도록 사내의 턱관절을 강하게 틀어막은 채 로잘린은 차가운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소리를 내면 뼈가 부러질 거다.”
등 뒤에서 나타난 베른이 밧줄을 꺼내 사내의 양팔을 단단히 결박했다.
사내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건이 벗겨지자 흙투성이가 된 얼굴이 드러났다.
“...토마스?”
베른이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너 정원사 보조 녀석 아니냐? 네가 왜 이 야심한 밤에 여기서 등불을 켜고 있어!”
사내, 토마스는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살려주십시오! 저는 그냥...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입니다!”
로잘린은 토마스의 주머니를 뒤졌다. 묵직한 가죽 주머니가 손에 잡혔다. 주머니를 열어 쏟아내자 은화 수십 개와 함께 접힌 쪽지가 떨어졌다.
은화에는 체스터 공작령의 특산 주조 표식이 찍혀 있었고 쪽지에는 서늘한 필체로 지령이 적혀 있었다.
‘영애가 방에 홀로 남는 시각을 등불 세 번으로 확인하라. 외곽 조가 즉시 진입할 것이다.’
로잘린의 눈빛이 북부의 빙벽처럼 차갑게 식어 들어갔다.
황실 우편을 통한 압박은 양동작전이었다. 클라라가 서한을 받고 혼란에 빠져 밤을 지새우는 틈을 타 내부 첩자의 신호를 받아 방 안으로 무단 침입하려던 계략이었던 것이다.
“누구에게 이 돈과 쪽지를 받았지?”
로잘린의 서늘한 검 끝이 토마스의 목덜미를 살짝 눌렀다.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에 토마스는 울음을 터뜨렸다.
“시내 주점에서 검은 망토를 쓴 귀족가 시종이 접근했습니다! 노름빚을 갚아줄 테니 밤마다 신호만 보내라고... 영애님을 해치려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베른 경.”
로잘린이 일어나며 검을 거두었다.
“이 자를 지하 창고에 감금하고 마르센 집사 입회하에 자백서를 작성하게 하십시오. 오늘 밤 외곽 조는 신호가 없으니 감히 섣불리 담을 넘지 못할 겁니다.”
“알겠다. 즉시 처리하지.”
베른이 토마스를 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로잘린은 정원 담장 너머의 숲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이쪽의 신호를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을 터였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꺼낸 은화 하나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챙.
맑은 쇠 소리가 고요한 밤공기를 갈랐다.
“감히 내 주군을 노려?”
로잘린의 입가에 차가운 비소가 스쳤다.
새벽이 다가오는 시각, 저택 안은 적막에 싸여 있었다.
클라라는 침실 소파에 앉아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곤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녀는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똑똑.
익숙하고 규칙적인 노크 소리가 울렸다.
“로잘린입니다.”
클라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조금 전 정원을 수색하고 돌아온 로잘린이 서 있었다. 제복에 흙먼지 하나 묻지 않은 단정한 모습이었지만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이 들려 있었다.
“영애님. 캐모마일 차입니다. 안정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로잘린... 다치신 곳은 없나요?”
클라라는 차보다 먼저 로잘린의 온몸을 살피며 물었다.
“전혀 없습니다. 영애의 처소를 엿보려던 자를 현장에서 체포했습니다. 정원사 보조 토마스였습니다.”
“토마스가요...?”
클라라의 눈에 충격과 슬픔이 동시에 번졌다.
“어릴 때부터 정원에서 꽃을 가꾸던 아이였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빚 때문에 공작가의 하수인에게 매수당했다고 합니다. 영애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약점을 파고들어 사람을 돈으로 흔드는 자들이 사악한 겁니다.”
로잘린은 찻잔을 클라라의 손에 쥐여 주었다. 따뜻한 온기가 차가워진 클라라의 손가락을 감쌌다.
클라라는 찻잔을 든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무서웠어요. 문을 잠그고 혼자 앉아 있는데 사방이 온통 적 같아서 숨이 막혔어요. 공작가 사람들도, 황실의 이름도, 심지어 매일 마주치던 하인들까지... 모두가 저를 옭아매려는 것만 같아서요.”
눈물 한 방울이 찻잔 속으로 툭 떨어졌다.
“저는 왜 이렇게 힘이 없고 나약할까요. 왜 제 의지대로 평범하게 살고 싶은 것조차 이렇게 두려워해야 하는 걸까요.”
원작의 클라라는 언제나 이런 공포와 고립 속에서 울다가 미친 남주들의 손에 이끌려 새장 속에 갇히는 운명을 맞이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로잘린은 클라라의 눈높이에 맞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서늘한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클라라의 녹송석 눈동자를 곧게 응시했다.
“영애님.”
로잘린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약한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나약함에 굴복해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하는 순간 상대는 그것을 약점으로 삼아 집어삼키려 들 겁니다.”
“로잘린...”
“영애께서는 오늘 당당히 거절하셨고 법률을 적어 서한을 완성하셨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커다란 첫걸음을 내딛으신 겁니다.”
로잘린은 가슴팍에 손을 얹으며 나직하게 맹세했다.
“제가 영애의 검이자 방패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황실이든 대공가든 영애의 동의 없이 그 가녀린 손목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겁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영애가 서 계신 그 자리가 영애의 당당한 영토입니다.”
클라라는 멍하니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차갑고 엄격한 규율만을 말하던 호위기사의 눈빛 속에 자신을 향한 깊고 단단한 진심이 온전히 담겨 있었다.
그 서늘하면서도 다정한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클라라의 마음속을 짓누르던 어두운 공포가 눈 녹듯 사라졌다.
쿵, 하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차올랐다.
단순히 지킴을 받는다는 안도감이 아니었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어떤 거대한 벽 앞에서도 꺾이지 않고 당당히 맞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경한 용기였다.
클라라는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로잘린의 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네, 로잘린. 저 도망치지 않을게요. 기사님이 저를 지켜주시는 만큼 저도 제 자리를 지키겠어요.”
로잘린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번졌다.
“훌륭한 각오입니다, 주군.”
그때 복도 끝에서 마르센이 다급한 발걸음으로 뛰어왔다.
“로잘린! 영애님!”
마르센의 손에는 토마스의 자백서가 들려 있었다.
“토마스의 진술에 따르면 오늘 아침 날이 밝는 대로 체스터 공작가의 마차가 다시 정문 앞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황실 자선회 호송’이라는 명목으로 기사단까지 대동해 영애님을 강제로 마차에 태워 가려 한답니다!”
창밖을 바라보자 동쪽 하늘에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공작의 오만한 계략이 정면으로 들이닥칠 시간이었다.
로잘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허리춤에서 검자루가 묵직하게 흔들렸다.
“마차를 끌고 온다라.”
로잘린의 서늘한 눈빛이 여명 속에서 날카롭게 번뜩였다.
“주군의 허락 없이 굴러가는 바퀴는 부숴버리면 그만입니다.”
클라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로잘린의 곁에 섰다.
이제 두 사람은 다가올 아침의 폭풍을 향해 당당히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