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성녀인 줄 알았는데 신이 편애함

2화: 꽃이 피어난 자리
하늘이 한 번 더 갈라졌다.
정적을 찢으며 터져 나온 빛은 태양광장 바닥까지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광장을 에워싸고 있던 군중이 일제히 귀를 막으며 비틀거렸다. 처형대의 나무 난간을 부여잡고 있던 경비들도 눈을 뜨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리에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숨을 들이켰다.
눈앞을 메운 것은 눈이 멀 것 같은 흰빛이었다. 타오르던 장작의 매캐한 냄새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코끝을 스친 것은 불꽃의 열기가 아니라 코끝이 아릴 만큼 싱그럽고 차가운 꽃향기였다.
타닥거리며 살을 삼키려던 불길이 공중에서 멎었다.
그리고 흩어졌다.
불티가 아니었다. 붉은 불꽃의 끝이 둥글게 말려들더니 새하얀 꽃잎으로 부서져 내렸다. 불길이 닿았던 장작더미에서 푸른 줄기가 솟구쳤다. 새까맣게 그을려 가던 참나무 토막 사이로 탐스러운 꽃봉오리들이 팝콘처럼 터지며 피어났다.
순백의 백합이었다.
한 송이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 송이의 백합이 타오르던 불꽃을 집어삼키며 화형대 전체를 뒤덮었다. 바닥에 고여 있던 기름은 맑은 이슬로 변해 꽃잎 위를 굴렀다.
리에나의 손목을 파고들던 밧줄은 이미 바닥에 떨어져 흩어져 있었다. 거칠게 죄어 오던 삼실은 흔적도 없이 바스러졌고 그녀의 손목에는 붉은 자국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이게 대체 뭐야.”
리에나는 멍하니 중얼거리며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은 마법사가 아니었다. 성물도 없었고 신성력을 다루는 기도문을 배운 적도 없었다. 그저 돌기둥 뒤에 숨어 있던 아이들이 도망칠 수 있기만을 바랐을 뿐이었다.
그런데 화형대가 통째로 백합 밭으로 변해 있었다.
광장 전체가 숨을 죽였다.
비명도, 돌을 던지며 외치던 야유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수천 명의 사람이 모인 광장에 오직 바람에 스치는 백합 꽃잎 소리만이 바스락거렸다.
분수대 뒤를 살피던 리에나의 시선 끝에 빨간 목도리가 보였다. 아이들은 이미 광장 외곽의 골목길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경비들은 모두 땅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떨고 있어 아무도 아이들을 쫓지 못했다.
아이들은 살았다.
그 안도감이 차오르는 순간 광장의 침묵이 깨졌다.
“기…… 기적이다!”
누군가의 떨리는 외침이 정적을 갈랐다.
“불꽃이 꽃으로 변했어!”
“루멘의 응답이다! 주신께서 처형대에 강림하셨다!”
앞줄에 서 있던 노인이 무릎을 꿇었다. 그 뒤를 이어 돌을 쥐고 있던 청년도, 성수를 뿌리며 저주를 퍼붓던 신도들도 차례로 무릎을 꿇고 이마를 돌바닥에 대었다.
파도처럼 번져 나간 경배는 순식간에 광장 전체를 집어삼켰다. 방금 전까지 사기꾼이라며 침을 뱉던 군중이 이제는 눈물을 흘리며 신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성녀님이시다!”
“진짜 성녀가 화형대에 계셨어!”
군중의 함성이 광장을 울렸다.
리에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람들의 열광적인 눈빛이 자신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불길에 타 죽는 것보다 저 맹목적인 시선들이 더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관람석 상단에서는 셀레나 하르트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백발의 공식 성녀는 핏기 없는 얼굴로 자신의 가슴팍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녀의 손안에 쥐여 있던 금빛 성물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평소라면 은은한 빛을 뿜어내야 할 성물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어째서…….’
셀레나의 연보라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신전에서 배운 어떤 치유식도, 어떤 축복도 이런 현상을 일으키지 못했다. 성물을 통하지 않은 순수한 신성이 허공을 가르고 내려와 불을 꽃으로 바꿨다. 그것은 신전이 독점해 온 모든 교리와 의식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광경이었다.
그 옆에서 대사제 오르덴 베르크의 눈빛이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온화한 노인의 가면 아래로 서늘한 계산이 스쳐 지나갔다. 오르덴은 화형대 위에서 꽃에 둘러싸인 리에나를 응시했다.
‘등불이 정말로 반응했군.’
처형은 시험이었다. 거리의 쥐새끼 같은 계집에게 루멘의 파편이 깃들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덫이었다. 그런데 반응의 크기가 예상치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하늘을 두 번 가르고 내려온 빛은 신전 지하의 봉인마저 흔들릴 만큼 강력했다.
군중이 완전히 통제를 벗어나기 전에 손을 써야 했다.
오르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당황한 기색을 지우고 인자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두 팔을 넓게 벌렸다.
“신도들이여, 고개를 드십시오!”
대사제의 목소리에 깃든 성력 확성 마법이 광장 전체로 울려 퍼졌다.
“루멘께서는 언제나 가장 어둡고 비천한 곳에서 진실을 시험하십니다! 교단은 이 가련한 어린 양의 죄를 심판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신께서 감추어 두신 참된 성녀를 증명하고자 이 거룩한 시련을 마련한 것입니다!”
리에나는 그 뻔뻔한 연설을 듣고 기가 차서 헛숨을 들이켰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장부를 태우고 자신을 불태워 죽이려던 노인이 이제 와서 ‘거룩한 시련’ 운운하고 있었다.
군중은 대사제의 말에 홀린 듯 환호성을 질렀다.
“오르덴 대사제 만세!”
“주신의 뜻을 밝힌 신전 만세!”
오르덴의 눈짓에 사제들이 일제히 화형대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이 리에나에게 닿기 전 화형대 계단을 먼저 뛰어오른 그림자가 있었다.
검은 사제복을 휘날리며 올라온 남자는 에단 로웰이었다.
백금발 아래 차가운 회색 눈동자가 리에나를 꿰뚫듯이 응시했다. 에단은 무릎을 꿇지도, 환호하지도 않았다. 그는 화형대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피어난 백합 한 송이를 손으로 꺾었다.
바스락.
꺾인 줄기에서는 맑은 이슬 같은 수액이 흘러나왔다. 에단은 수액을 손끝에 묻혀 냄새를 맡고 불에 탄 장작의 재를 비벼 보았다.
마력의 잔재는 없었다. 성물을 조작했을 때 남는 특유의 인위적인 파형도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이것은 진짜였다.
에단은 고개를 들어 리에나를 보았다. 잿빛 금발에 호박색 눈을 한 마른 소녀가 경계하는 길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성물을 썼나?”
에단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없어요, 그런 거.”
리에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주문은?”
“배운 적도 없어요.”
“그렇다면 무엇을 한 거지?”
“저는 그냥…….”
리에나는 숨을 헐떡이며 발끝을 안쪽으로 감추었다. 구두 굽 안쪽에 숨겨 둔 장부 조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에단의 회색 눈동자가 그녀의 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구두 쪽으로 내려앉았다.
리에나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을 뿐이에요. 저 불길 속에서 빠져나가게 해 달라고요. 진짜로 그것밖에 없어요.”
에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거짓이 없었다. 사기꾼 특유의 능청스러움도, 성녀 행세를 하려는 자들의 과장된 거룩함도 없었다. 오직 살아남았다는 공포와 아이들을 향한 걱정만이 정직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순수한 소망에 응답하는 빛이라…….”
에단이 중얼거렸다.
그때 화형대 아래에서 사제들의 장엄한 찬송 소리가 들려왔다. 오르덴이 금실로 수놓인 사제복을 펄럭이며 화형대 계단을 밟고 올라왔다.
“에단 부관, 물러서게. 이제부터는 교단이 이 거룩한 아이를 보살필 차례일세.”
오르덴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에단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에단은 천천히 일어서며 오르덴을 막아서듯 섰다.
“대사제님. 이 처형은 정식 재판 승인 문서 없이 진행되던 중이었습니다. 진위 확인과 조사가 먼저 끝나야 합니다.”
“신의 기적이 직접 무죄를 선포하셨는데 인간의 종이 쪼가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오르덴이 에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밀어냈다.
“성녀 후보를 대성전으로 인도하라. 모든 상처를 치유하고 거룩한 세례를 준비해야 한다.”
사제들이 리에나를 둘러쌌다. 눈부시게 하얀 비단 망토가 리에나의 더러워진 어깨 위로 덮였다.
한편 광장 남쪽 도로변에 멈춰 서 있던 흑철색 마차 안.
짙은 제복을 입은 청년이 차창 커튼을 걷어 올린 채 화형대를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흑발 아래 깊은 금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아르켈 제국의 황태자 카이렌 아스테르였다.
그의 무릎 위에는 신전의 구휼 창고 횡령 사건에 관한 비밀 조사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전하.”
마차 밖에서 황실 정보관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 화형대에서 일어난 현상입니다. 마도탑의 측정관에 따르면 수도 전체의 마력 나침반이 일제히 태양광장을 가리켰다고 합니다.”
“마법이 아니라는 뜻이군.”
카이렌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분했다.
“예. 성물의 공명도 아니었습니다. 순수한 신성의 직접 개입으로 추정됩니다.”
카이렌은 턱을 괴며 화형대 위를 보았다.
오르덴이 사기극의 공범이라며 처형하려던 소녀를 이제는 성녀라 부르며 비단 망토로 감싸고 있었다. 신전의 속셈은 뻔했다. 전례 없는 기적을 일으킨 아이를 신전 깊숙이 가두고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다.
“신전이 성녀를 독점하게 둘 수는 없다.”
카이렌이 낮게 읊조렸다.
“저 소녀의 신원 기록과 오늘 재판의 배후를 전부 뒤져라. 대사제가 서류를 불태우기 전에 원본을 확보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성전에 사람을 심어 둬라. 저 아이가 진짜 성녀이든 신전의 또 다른 장기말이든 황실의 시야에서 벗어나선 안 된다.”
카이렌의 금안이 화형대 위에서 비단 망토를 두른 채 불안하게 주위를 살피는 잿빛 금발의 소녀에게 고정되었다.
화형대 위에서 리에나는 비단 망토를 움켜쥐었다.
오르덴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늙은 사제의 손은 따뜻했지만 그 온기 밑에 숨겨진 서늘한 통제욕이 살갗을 타고 전해졌다.
“가자꾸나, 아이야. 너를 위한 진짜 자리가 기다리고 있다.”
오르덴이 속삭였다.
리에나는 오르덴의 은빛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그 눈은 신을 섬기는 사제의 눈이 아니었다. 쓸모 있는 먹잇감을 손에 넣은 사냥꾼의 눈이었다.
여기서 거절하면 어떻게 될까.
‘저는 성녀가 아니에요. 사기꾼들의 심부름꾼이었을 뿐이고 장부는 제 신발 속에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신전은 자신을 조용히 지하실로 끌고 가 입을 막아 버릴 것이다. 화형대에서는 살아남았지만 이제는 발을 헛디디면 통째로 집어삼켜질 거대한 짐승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셈이었다.
살아야 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기회를 보아 도망쳐야 했다.
리에나는 떨리는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따르겠습니다, 대사제님.”
그녀의 목소리는 온순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르덴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이끌었다. 수천 명의 군중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길을 열었다. 흩날리는 백합 꽃잎 사이로 대성전의 황금 가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리에나는 가마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발목에 닿는 장부 조각의 감촉을 확인했다.
그녀의 등 뒤로 광장의 차가운 바람과 함께 심문관 에단의 예리한 시선과 보이지 않는 마차 너머 카이렌의 금빛 시선이 길게 따라붙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