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남편을 위한 거짓 세계

1화: 마지막 낙원
소울 스피어는 죽은 별처럼 차가웠다.
마도실 바닥을 가득 메운 은빛 마법진 한가운데에서 수정구가 느리게 빛을 삼켰다. 손바닥만 한 구체였지만 그 안에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이 담겨 있었다.
엘리사는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마지막 룬의 획을 그었다. 손가락 끝에서 빠져나온 마력이 은실처럼 바닥을 훑고 지나갔다.
등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엘리사."
그 한마디에 그녀의 손이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카시안이 기둥에 기대 앉아 있었다. 은발은 식은땀에 젖어 뺨에 붙어 있었고 입술에는 핏기가 없었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기침은 오늘 새벽 그에게서 피까지 빼앗아 갔다.
엘리사는 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말하지 마세요. 곧 끝나요."
카시안은 그녀가 내민 손수건을 받지 않았다. 대신 엘리사의 손가락을 잡았다. 손끝이 너무 차가워서 엘리사는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그 손을 감쌌다.
"그만해."
낮고 쉰 목소리였다.
"소울 스피어는 네 가문에서도 봉인한 물건이잖아. 네가 감당할 이유가 없어."
"당신이 감당할 이유도 없어요."
엘리사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을 억지로 눌렀다.
"치료할 수 없다는 걸 알아요. 그러니 적어도 남은 시간만큼은 아프지 않게 해 드릴 거예요. 창문을 열면 바람이 들어오고 정원에는 에델바이스가 피어 있는 곳에서요. 황궁에서 온 편지도 없고 의원의 발소리도 없는 곳에서요."
카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흔들렸다.
"그게 네가 바라는 마지막이야?"
"당신과 함께라면요."
대답은 너무 빨리 나왔다. 엘리사는 그제야 자기 목소리가 떨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준비한 것은 도피가 아니었다. 카시안에게서 죽음을 빼앗을 수 없다면 죽음이 닿기 전까지의 시간을 지켜 주겠다는 고집이었다.
소울 스피어는 의식과 마력을 엮어 하나의 세계를 짓는다. 그 안에서는 들어온 이가 믿는 풍경이 벽이 되고 하늘이 된다. 로렌 가문은 현실을 흐리는 물건이라며 오래전부터 사용을 금했지만 엘리사는 금고 가장 깊은 곳에서 해석서를 꺼내 왔다.
실패할 수 있다는 문장은 읽지 않았다.
"카시안."
엘리사는 그의 손등 위에 이마를 기댔다.
"저를 믿어 주세요."
오래 침묵하던 카시안이 그녀의 손을 뒤집었다. 그의 엄지가 손바닥 중앙을 아주 느리게 쓸었다. 마치 사라질 자국을 외우려는 사람처럼.
"네가 그곳에서 울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울지 않을게요."
"거짓말이군."
그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평소의 냉정한 공작이 아니라 병상에서조차 그녀를 먼저 달래려 드는 남편의 웃음이었다.
엘리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울어도 당신 곁에서만 울게요."
카시안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좋아. 네가 만든 곳이라면 어디든 가겠어."
그 말이 허락이 되었다.
엘리사는 그를 마법진 중앙으로 이끌었다. 카시안의 몸은 가벼웠지만 그 가벼움이 무서웠다. 그는 한 번도 그녀에게 체중을 싣지 않던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수정구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자 바닥의 룬이 하나씩 떠올랐다. 엘리사는 해석서에서 외운 순서대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마력이 구체 표면에 닿자 어둠 속에 푸른 불꽃이 피어났다.
에델바이스의 언덕.
햇살을 받은 유리 온실.
카시안이 좋아하던 쓴 차의 향기.
그녀는 기억할 수 있는 평온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떠올렸다. 카시안이 고통 때문에 잠들지 못하던 밤은 그곳에 넣지 않았다. 황궁의 검은 인장은 더더욱 넣지 않았다.
"눈을 감으세요."
엘리사가 속삭였다.
카시안은 눈을 감지 않았다.
"네가 먼저."
"왜요?"
"네가 사라지지 않는지 보고 싶어서."
가벼운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의 손은 엘리사의 손목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엘리사는 미소 지으려 했다. 그러나 수정구 안에서 갑자기 붉은 빛이 번뜩였다.
푸른 불꽃 사이를 가른 가느다란 선이었다. 그녀가 그린 어떤 룬에도 없는 색이었다.
"카시안, 잠깐만요."
그녀가 손을 빼려는 순간 수정구가 한 번 크게 뛰었다.
쿵.
심장 소리 같았다.
카시안의 손가락이 더 세게 얽혔다.
"괜찮아."
그의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또렷했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가 기운을 되찾았다고 생각했다. 소울 스피어가 반응한 것이라 믿고 싶었다.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
룬들이 빛을 터뜨렸다.
차가운 마도실도 카시안의 숨소리도 순식간에 멀어졌다. 발밑이 꺼졌고 엘리사는 본능적으로 손을 움켜쥐었다. 손안의 온기가 끊길 것 같았다.
안 돼.
그 생각 하나로 엘리사는 마력을 밀어 넣었다.
한 번 더.
카시안의 손을 놓치지 않을 만큼만.
어둠 끝에서 바람이 불었다.
맑은 종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엘리사는 눈을 떴다.
천장은 낯설 만큼 높고 하얬다. 얇은 커튼 너머로 아침 햇살이 번졌고 열린 창에서는 풀과 젖은 흙 냄새가 흘러들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종의 소리는 멀지 않은 마을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 의자에 카시안이 앉아 있었다.
현실의 그는 며칠째 제대로 걷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의 카시안은 옅은 회색 셔츠 차림으로 곧게 앉아 있었다. 여전히 창백했지만 숨은 고르고 눈동자는 선명했다.
엘리사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의 얼굴을 만졌다.
따뜻했다.
카시안이 그녀의 손을 뺨에 붙였다.
"왜 그렇게 봐?"
"당신이… 조금 나아 보여서요."
"조금?"
그는 웃었지만 그 미소 끝에는 피로가 남아 있었다. 엘리사는 그 작은 피로를 보자마자 안도했다. 완전히 나아진 것이 아니라면 이곳은 아직 현실을 억지로 속이지 않았을 것이다.
"무리하면 안 돼요. 오늘은 침대에서 쉬어요."
"명령인가요, 공작부인?"
"부탁이에요."
카시안은 대답 대신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맥박을 짚는 손끝이 지나치게 오래 머물렀다. 엘리사가 의아하게 내려다보자 그가 천천히 손을 놓았다.
"너는 어디 불편한 데 없고?"
"저는 멀쩡해요."
"정말?"
그 물음은 너무 조심스러워서 엘리사는 웃었다.
"당신이 환자가 된 날부터 제가 약하다는 소리는 못 들었을 텐데요."
카시안은 웃지 않았다. 붉은 눈이 그녀의 얼굴을 훑었다. 그 시선은 걱정이라기보다 확인에 가까웠다.
그러나 곧 그는 늘 그랬듯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문이 조용히 열렸다.
"실례하겠습니다, 마님."
은발이 아닌 짙은 갈색 머리의 기사가 문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단정한 제복과 허리의 검이 낯익었다.
"루시안."
엘리사가 이름을 부르자 기사의 표정이 아주 잠깐 굳었다가 풀렸다.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날이 좋으니 온실에서 드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그 목소리까지 그녀가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엘리사는 자신이 만든 세계가 정말 눈앞에 펼쳐졌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카시안이 천천히 일어났다.
"엘리사는 아직 쉬어야 한다."
"저는 괜찮다니까요."
"그래도."
짧은 한마디였지만 카시안은 그녀가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까지 손을 내밀어 기다렸다. 손을 잡아 주는 다정함에 엘리사는 더 말하지 못했다.
복도를 지나 온실에 이르자 햇살이 유리 지붕에서 쏟아졌다. 하얀 에델바이스가 화분마다 가득 피어 있었고 작은 분수에서는 맑은 물이 흘렀다. 시녀 마리안이 은쟁반 위에 찻주전자를 올려두고 물러났다.
"정말 예쁘네요."
엘리사는 창밖을 보았다.
저택 너머로 완만한 언덕이 펼쳐졌다. 들판의 풀은 바람이 스칠 때마다 은빛으로 기울었다. 멀리서는 아이들이 웃으며 달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곳에는 아무도 아픈 사람이 없었다.
카시안이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차를 따르려다 손을 멈췄다.
"내가 해도 될까?"
"그 정도는 괜찮아요."
엘리사는 찻잔을 받아 들었다. 쓴 향이 코끝에 닿자 카시안이 좋아하던 차를 정확히 떠올렸다는 사실이 기뻤다.
"내일은 정원을 더 돌아봐요."
그가 말했다.
"당신이 힘들지 않으면요."
"네가 함께라면 괜찮아."
엘리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도실에서 붙들고 있던 공포가 조금씩 풀렸다. 이곳에서는 카시안의 기침이 멎고 얼굴에 햇살이 닿았다.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저지른 금기를 용서받은 기분이었다.
그때 창문 밖에서 무언가가 스쳤다.
햇빛을 가른 붉은 선이었다.
엘리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실 유리 바깥의 하늘과 들판 사이로 가느다란 금이 그어진 듯했다. 손을 뻗자 선은 물결처럼 흔들렸다.
"엘리사?"
카시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녀가 다시 보려는 순간 붉은 선은 햇살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들판에는 흰 꽃만 흔들렸다.
엘리사는 손을 내렸다.
"방금 저기…"
말끝이 흐려졌다. 소울 스피어가 처음 열릴 때는 마력이 불안정할 수 있다. 해석서에도 비슷한 경고가 있었던 것 같았다. 정확한 문장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 정도의 흔들림으로 카시안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피곤해서 그래요."
카시안이 그녀의 곁으로 와 어깨를 감쌌다.
"그래. 오늘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그의 손길은 따뜻했고 목소리는 더없이 다정했다.
엘리사는 그 품에 잠시 기대었다.
창밖의 완벽한 아침은 아무 흔들림 없이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카시안의 어깨 너머로 보인 유리창에 사라진 줄 알았던 붉은 선이 아주 가늘게 다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