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남친과 공동 대표가 되었다

3화: 믿을 이유
오전 아홉 시가 되자 회의실 벽면의 화면에 고객 후기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좋은 뜻인 건 알겠는데 반납한 용기가 정말 다시 쓰이는지 모르겠어요. 리필 제품은 새 제품보다 왜 더 기다려야 하죠. 친환경이라 샀는데 다음에 뭘 사야 할지 모르겠어요.
누구도 큰 소리로 읽지 않았지만 직원들의 시선은 문장마다 오래 머물렀다. 회의실 테이블 위에는 어젯밤 하린이 정리한 이탈 설문과 주문 취소 사유가 인쇄돼 있었다.
서진은 화면 옆에 서서 펜 뚜껑을 닫았다. 새 대표에게 건네는 어색한 인사가 몇 번 오갔지만 그녀는 자리에 앉으라는 말부터 하지 않았다.
“모아의 문제가 뭔지 말해 볼까요?”
잠깐의 침묵 끝에 하린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친환경 제품을 찾는 분들은 많은데 저희 인지도가 낮아요. 광고 예산을 늘리고 리필 과정을 영상으로 보여 주면 반응이….”
“인지도가 낮아서가 아니에요.”
서진은 하린의 말을 끊으려는 듯 보이지 않게 한 박자 쉬었다. 그러고는 화면의 후기 하나를 확대했다.
“이 고객은 모아를 이미 알아요. 제품도 샀고 반납도 신청했어요. 그런데 다시 살 이유를 못 찾았습니다.”
회의실 공기가 조금 더 팽팽해졌다. 창가에 서 있던 도윤은 팔짱을 끼지 않은 채 직원들의 표정을 훑었다.
“지난 석 달간 첫 구매 고객 중 이십팔 퍼센트만 두 번째 주문을 했습니다. 이게 할인 쿠폰이 약해서라고 생각하나요?”
마케팅 담당 직원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가격 비교를 하시는 분도 많았습니다. 리필은 새 제품보다 배송이 늦다는 문의도 계속 있었고요.”
“맞아요. 그런데 가격이나 배송만 고치면 돌아올까요?”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친환경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썼어요. 수거한다, 세척한다, 다시 채운다. 고객은 자기 용기가 어디로 가는지 못 봐요. 리필이 안전한지 확인할 수도 없고요.”
화면에는 반납 신청 뒤 열이틀을 기다렸다는 고객의 글이 떠 있었다. 그 아래에는 '다시 쓰는 과정이 보이면 기다릴 수 있다'는 문장이 붙어 있었다.
“좋은 말은 약속이 아닙니다. 고객이 확인할 수 있어야 약속이에요.”
민재가 의자 끝에 걸터앉은 채 손을 들었다.
“수거와 세척 과정은 내부 기준대로 하고 있어. 다만 그걸 고객에게 보여 줄 체계가 없지.”
“그럼 오늘부터 만듭시다.”
서진은 테이블 위에 놓인 투명한 리필 용기를 집었다. 바닥에는 회수 번호만 작게 찍혀 있었다.
“이 번호로 고객이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언제 회수됐고 언제 세척이 끝났고 언제 다시 진열됐는지. 그 세 가지를 보여 주세요.”
도윤이 낮게 입을 열었다.
“당장 모든 제품에 적용하면 생산이 밀려. 수거 기록도 지금은 창고 표지와 엑셀로 나뉘어 있어.”
“전 제품에 하자는 말이 아니에요.”
서진이 도윤을 바라보았다. 그의 제동이 익숙한 방식의 통제로 느껴질 뻔했지만 목소리에는 감정 대신 일정표를 보는 사람의 긴장이 묻어 있었다.
“고객이 믿을 이유 하나를 제대로 만들자는 겁니다. 그걸 만들 수 있는 범위를 도윤 씨가 정해 주세요.”
도윤의 시선이 잠시 용기 바닥의 번호에 머물렀다. 그는 곧바로 생산 담당자에게 물었다.
“한 품목으로 제한하면 세척과 충전 이력까지 남길 수 있는 물량이 얼마지?”
“현재 인력으로는 백이십 개 정도면 가능합니다.”
“좋아. 그 수량은 기존 출고와 분리해.”
서진은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 안에 고객이 확인할 수 있는 약속을 하나 정합니다. 예쁘게 말하는 방법 말고 실제로 지킬 방법을요.”
회의가 끝난 뒤 서진은 하린과 민재를 데리고 창고로 내려갔다. 수거된 공병 상자 옆에는 세척 대기, 검수 완료, 충전 대기라는 종이 표지가 붙어 있었다.
표지의 글씨는 성실했지만 몇몇 칸은 비어 있었다. 상자 사이로 세척액 냄새와 젖은 종이 냄새가 엷게 섞여 나왔다.
“이 표지는 누가 작성해요?”
“담당자가요.”
민재가 대답했다.
“날짜는?”
민재가 표지를 들여다보다 잠시 입을 다물었다. 비어 있는 칸이 세 개였다. 수거일과 세척 완료일이 이어지지 않는 상자도 있었다.
그때 도윤이 뒤따라 내려와 상자를 확인했다. 그는 빈칸을 보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지난주에 현장 인력이 빠졌어. 정리는 오늘 안에 맞출게.”
서진은 표지의 빈칸을 손끝으로 눌렀다.
“이걸 고객에게 보여 줄 수는 없겠네요.”
“그래서 지금은 보여 주는 캠페인보다 흐름을 고치는 게 먼저예요.”
하린이 노트북을 품에 안은 채 급히 말했다.
“그래도 콘텐츠는 먼저 만들 수 있어요. 세척 장면이랑 직원 인터뷰를 올리면 반응을 확인할 수 있을 텐데요.”
서진은 상자 옆에 쪼그려 앉아 용기 하나를 들어 올렸다. 유리 표면에 남은 작은 흠집이 창고 조명 아래에서 드러났다.
“우리가 확인하지 못하는 걸 고객에게 믿어 달라고 할 수는 없어요. 현장을 예쁘게 찍는 건 나중이에요.”
하린이 입술을 다물었다. 꾸중이라기보다 기준을 세우는 말이라는 걸 알아들었는지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먼저 흐름을 고치고 그다음에 보여 줍시다. 하린 씨는 과정 전체가 아니라 고객이 가장 궁금해할 세 질문만 정리해 주세요. 내 용기는 언제 회수됐나. 어떤 기준으로 다시 채워졌나. 내가 다시 받을 때 무엇이 달라지나.”
“네. 고객 인터뷰 질문도 그 세 가지에 맞출게요.”
도윤이 서진을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한 범위를 정해. 그 범위만큼은 생산 일정에서 빼 줄게.”
“성수 팝업에서 한 품목만 시험해요. 일주일 뒤 토요일에요.”
서진이 용기를 내려놓았다.
“반납한 용기의 처리 날짜를 현장에서 보여 주고 고객에게 직접 물어봅시다. 이 과정이면 다시 살 마음이 드는지.”
“일주일?” 하린의 눈이 커졌다.
“일주일이면 문구를 만들 시간이 아니라 진짜로 작동하게 만들 시간이에요.”
도윤은 휴대폰으로 일정을 확인했다. 그의 손가락이 화면을 빠르게 움직였다.
“팝업 장소는 기존 대관을 활용하면 돼. 다만 추가 세척 인력과 현장 장비까지 넣으면 비용이 커져.”
“한도는요?”
“사백오십만 원. 그 안에서 끝내.”
서진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알겠어요. 예산을 줄이려고 고객에게 보여 줄 정보를 줄이지는 않을게요. 대신 쓸모없는 장식부터 뺍시다.”
도윤의 입가가 아주 짧게 움직였다. 웃음이라기보다 계산이 끝났다는 표시였다.
민재는 작업대 위의 향료 배치표를 들춰 보았다. 대부분은 수치와 담당자 서명이 정리돼 있었지만 중간의 한 묶음에는 확인란이 비어 있었다.
서진이 배치표를 보자 민재가 먼저 말했다.
“리필 제품 하나를 고르려면 향료 테스트도 다시 봐야 해.”
도윤의 시선이 배치표로 향했다.
“누락된 게 있어?”
“정리 중인 게 좀 있어.”
민재는 바로 답했지만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서진은 그 표정의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정리 중인 것과 확인되지 않은 것은 달라요.”
창고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민재는 배치표를 다시 내려다봤다.
“오늘 오후까지 전부 확인할게. 확실하지 않은 배치는 시험 운영에서 빼자.”
도윤은 잠시 그를 보다가 말했다.
“그게 맞아. 수량은 줄어도 돼.”
서진도 같은 쪽을 바라봤다.
“줄여요. 이번에 필요한 건 그럴듯한 성과가 아니라 고객 앞에서 숨기지 않을 기준이에요.”
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동작에는 안도와 부담이 함께 묻어 있었다.
회의실로 돌아온 서진은 화이트보드에 세 줄을 적었다. 처리 이력 확인률. 재방문 의향. 구매 후 불만 이유.
하린이 적힌 글자를 읽고 물었다.
“성공 기준은 이걸로요? 투자사 보고서에는 재구매율 숫자가 필요하잖아요.”
“재구매율은 마지막에 나오는 숫자예요.”
서진은 마커를 내려놓았다.
“지금은 고객이 어디에서 멈추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현장에서 이력을 실제로 확인하는지 확인한 뒤 다시 살 마음이 드는지 그래도 안 산다면 왜인지. 답을 쌓아야 다음 결정을 할 수 있어요.”
도윤이 화이트보드 아래에 작은 글씨를 보탰다. 시험 물량 120개. 비용 한도 450만 원. 결과 취합 월요일 오전.
“이 안에서 움직여. 추가 지출은 나한테 알려.”
서진은 그 문장을 훑어본 뒤 고개를 들었다.
“알릴게요. 대신 예산이 아니라 고객의 답으로 다음 결정을 합시다.”
도윤은 잠시 서진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직원들이 각자 노트북과 서류를 챙겼다. 누군가는 수거 번호 목록을 정리했고 하린은 인터뷰 질문을 적기 시작했다. 민재는 향료 배치표를 들고 생산실로 향했다.
서진은 텅 비어 가는 회의실에서 화이트보드의 세 줄을 한 번 더 봤다. 90일이라는 숫자는 여전히 무거웠다. 그래도 처음으로 그 숫자 앞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보였다.
하린은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며 노트북을 닫지 못하고 있었다. 화면 오른쪽 위에서 새 메일 알림이 조용히 깜빡였다.
보낸 사람은 리프랩 인사팀이었다. 제목은 간단했다. 최종 제안 및 회신 요청.
하린은 제목만 읽고도 손끝이 굳는 것을 느꼈다. 더 큰 회사, 더 높은 연봉, 정해진 체계. 막 공동대표 체제를 시작한 모아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때 문가에서 서진이 돌아봤다.
“하린 씨, 고객 인터뷰 질문 초안은 점심 전까지 볼 수 있을까요?”
하린은 화면을 급히 덮었다.
“네. 바로 하겠습니다.”
모아의 첫 실험은 시작됐다. 하지만 하린의 노트북 안에는 다른 회사가 내민 출구가 조용히 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