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남친과 공동 대표가 되었다

1화: 공동대표의 이름
모아 사무실의 입구에는 빈 리필 용기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누군가는 그걸 친환경적인 장식이라고 부를지 몰랐다. 윤서진에게는 정리하지 못한 약속처럼 보였다. 용기마다 붙은 작은 메모에는 고객의 이름 대신 짧은 불만이 적혀 있었다. 뚜껑이 헐거워요. 리필 일정이 자꾸 바뀌어요. 답변을 못 받았어요.
서진은 가장자리가 접힌 메모를 손끝으로 눌렀다. 제품 하나의 결함보다 답을 기다린 시간이 더 오래 남는 법이었다.
“윤서진 디렉터님 맞으시죠?”
노트북을 안은 직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머리핀 하나가 유난히 밝았다.
“윤서진입니다.”
“저는 오하린이에요. 오늘 콘셉트 검토만 하시는 걸로 들었는데 대표님들이 급하게 회의가 생겨서요. 잠깐만 기다리시면 될 것 같아요.”
하린은 말끝마다 미안함을 얹었다. 서진은 사무실 안쪽을 훑었다. 택배 상자 위에 샘플이 쌓여 있었고 회의실 블라인드는 절반쯤 내려가 있었다. 다급한 회사는 대개 물건보다 사람의 동선을 먼저 어지럽혔다.
“기다리는 동안 자료 볼 수 있을까요?”
“네. 리브랜딩 관련 자료는 이쪽에 다 모아 뒀어요.”
서진은 테이블 위에 놓인 고객 인터뷰 요약본을 펼쳤다. 반복되는 단어는 친환경이 아니었다. 번거로움, 불안, 침묵. 모아는 덜 쓰는 생활을 말했지만 고객들은 덜 불편한 생활을 원하고 있었다.
그녀는 메모장 첫 줄에 짧게 적었다.
덜 쓰는 생활이, 덜 불편한 생활이 되게 한다.
낯선 문장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이상해서 서진은 펜을 멈췄다.
모아의 소개 자료에는 재활용률과 탄소 절감 수치가 빼곡했다. 하지만 고객이 다시 주문한 이유를 묻는 항목에는 빈칸이 많았다. 누군가는 가격을 적었고 누군가는 향을 적었다. 그 뒤에는 반드시 비슷한 문장이 붙었다. 편해서 계속 썼어요. 그런데 요즘은 믿기 어려워요.
서진은 인터뷰 요약의 날짜를 확인했다. 불만은 한 번에 터진 것이 아니었다. 배송이 늦어진 날에도 리필 예약이 밀린 날에도 모아는 먼저 말하지 않았다. 고객이 물으면 그제야 사과했다.
문제는 친환경이라는 단어가 아니었다. 모아가 고객의 생활에 들어온 뒤에도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서진은 두 번째 줄에 적었다.
약속은 좋은 문장이 아니라 답하는 방식으로 증명한다.
그때 회의실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잠깐 높아졌다가 이내 끊겼다. 숫자를 다루는 회의의 목소리였다. 서진은 고개를 들었지만 블라인드 너머에는 사람의 그림자만 희미했다.
하린은 종이컵에 물을 따라 서진의 옆에 놓았다.
“자료가 좀 엉켜 있죠? 저희도 정리 중이에요.”
“엉킨 건 자료가 아니라 순서예요.”
서진은 인터뷰지를 덮었다.
“고객이 먼저 묻기 전에 회사가 먼저 말했어야 했어요.”
하린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 표정에는 변명보다 안도에 가까운 것이 잠깐 스쳤다. 누군가가 문제를 정확한 이름으로 불러 주기를 기다렸던 사람의 표정이었다.
“디렉터님.”
하린이 이번에는 두꺼운 서류철을 들고 왔다.
“이건 법무팀에서 먼저 확인 부탁드린다고 해서요. 투자 관련 서류인데 대표님들께서 디렉터님도 읽어 보셔야 한다고 하셨어요.”
서진은 서류철 표지를 봤다. 시드 투자 계약서.
리브랜딩 콘셉트만 검토하러 온 사람에게 왜 계약서를 보여 주는지부터 이상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첫 장을 넘겼다. 투자금은 18억 원. 집행 기간은 12개월. 자금 사용 내역과 월별 성과 보고 의무.
조건은 까다로웠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스타트업이 급할수록 계약서는 친절한 말보다 많은 것을 요구했다.
서진은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그러다 손이 멎었다.
제7조. 공동대표 체제의 설치.
투자 실행일로부터 12개월간 윤서진과 강도윤은 모아의 공동대표로 취임한다.
글자는 인쇄된 모양 그대로였다. 서진의 시야만 그 다섯 글자에서 멈췄다.
강도윤.
이름을 소리 내지 않았는데도 목이 먼저 굳었다.
3년 동안 그 이름은 연락처에서 지운 뒤에도 익숙했다. 길을 건너다 비슷한 뒷모습을 보면 잠깐씩 떠올랐고 업무 메일의 딱딱한 문장 사이에서는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다. 서진은 그 이름이 자기 일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 왔다.
그런데 계약서는 너무 쉽게 선을 넘었다.
“이거, 누구한테 확인받고 준 겁니다?”
서진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하린이 굳었다.
“저는 이민재 대표님께서 전달하라고 하셔서요. 문제가 있나요?”
“아니요. 하린 씨 잘못 아니에요.”
서진은 서류를 덮었다. 손바닥 아래 종이가 미세하게 구겨졌다. 그녀는 바로 일어섰다.
“민재 씨 어디 있죠?”
하린이 회의실 쪽을 가리키려던 순간 문이 열렸다. 후드 소매에 희미한 얼룩이 묻은 남자가 나왔다. 이민재는 서진과 눈이 마주치자 반가운 표정을 지으려다 실패했다.
“왔네.”
“설명해.”
인사도 없이 건넨 말에 민재가 입술을 다물었다. 서진은 계약서의 열린 페이지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름이 잘못 들어간 건 아닐 테고.”
민재는 종이를 보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잘못은 아니야.”
“그럼 내 이름은 왜 들어가 있어?”
“투자 조건이야.”
서진은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이 새는 소리에 가까웠다.
“내가 동의한 적 없는데.”
“그래서 지금 읽어 보라고 한 거야. 서명하라는 뜻은 아니고.”
“모아가 내 이름을 먼저 계약서에 넣고 나서 읽어 보라고 하는 방식인가 보네.”
민재의 어깨가 낮아졌다. 그는 늘 농담으로 틈을 메우던 사람이었다. 오늘은 그 틈을 메울 말이 없었다.
“서진아. 지금 회사가 좀 급해.”
“급하면 남의 선택권부터 빌려 와도 돼?”
하린이 조용히 물러났다. 서진은 그 뒷모습을 보고서야 목소리를 한 톤 낮췄다. 그러나 계약서 위의 이름은 낮아지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조항을 읽었다. 주요 의사결정은 공동서명. 어느 한쪽이 사임하면 투자자는 우선매수권과 경영개입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 문장은 누군가를 대표 자리에 앉히는 제안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퇴로가 곧 회사의 퇴로가 되도록 묶어 두는 장치였다.
“이건 공동대표 자리가 아닌데.”
서진이 말했다.
“서로를 묶어 두는 장치지.”
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런데 그 장치가 없으면 투자금이 안 들어와. 다음 달 결제할 생산비도 빠듯해.”
“그러면 회사가 버티기 위해 대표 둘이 서로를 감시해야 한다는 거네.”
“감시까지는 아니고.”
“계약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어.”
서진은 조항의 끝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브랜드 운영과 대외 커뮤니케이션, 일정 금액 이상의 지출, 주요 인력의 채용과 해임. 회사가 흔들릴 때마다 두 사람은 같은 종이에 이름을 적어야 했다.
도윤과 함께라는 말이 불쾌한 이유를 서진은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더 불쾌한 건 그가 이미 이 구조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알고도 자신을 이곳으로 불렀고 직접 연락하지는 않았다.
“도윤이는 이 조항을 언제 알았어?”
“협상할 때부터.”
민재가 답한 뒤 곧바로 덧붙였다.
“네 이름을 마음대로 쓴 건 아니야. 오늘 만나서 결정하자고 했어.”
“계약서에 이름을 인쇄해 둔 다음에?”
민재는 다시 말이 없었다. 서진은 그 침묵이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고 민재에게 더 화를 낼 이유도 없었다. 그는 회사를 붙들고 있는 사람이었고 지금은 그만큼 다급해 보였다.
하지만 다급함이 서진의 선택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도윤이 나를 불렀어?”
민재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짧은 침묵이 서진에게는 충분했다.
“그 사람이 여기 있어?”
“회의실에.”
서진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수동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이 유리창 너머에서 작게 움직였다. 누구도 그녀가 오래 피한 이름 하나 때문에 발이 묶였다는 걸 몰랐다.
모아의 메모들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답변을 못 받았어요.
서진은 그 문장을 이해했다. 누군가의 침묵이 남기는 모양을 너무 잘 알았다.
“나 안 해.”
민재의 표정이 굳었다.
“서진아.”
“아직 끝까지 안 읽었어.”
서진은 곧바로 말을 고쳤다. 거절은 입에서 나왔지만 손은 계약서를 놓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조항 아래의 작은 글씨를 다시 훑었다. 브랜드 운영과 대외 커뮤니케이션은 대표 권한의 범위에 포함된다는 문장.
모아의 문제는 돈만이 아니었다. 이 회사는 고객에게 무엇을 약속하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진이 떠나면 다른 누군가가 그 일을 맡겠지만 그 누군가는 고객 메모에서 먼저 읽어야 할 말을 놓칠지도 몰랐다.
자신의 일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이 회사가 정말로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서 화가 났다. 바꿀 수 있는 일을 앞에 두고 과거의 침묵만 이유로 등을 돌리는 건 서진이 싫어하는 방식이었다.
“민재야.”
“응.”
“나 설득하지 마. 계약 조건도 감정도.”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대신 내가 직접 들을게. 왜 하필 공동대표인지. 왜 내 이름을 넣었는지.”
그녀는 서류철과 메모장을 함께 들었다. 하린이 남기고 간 볼펜 하나가 테이블 위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서진은 그것을 세워 놓고 회의실로 향했다.
닫힌 문 너머에서 낮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또렷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일정과 수치를 확인하는 말투였다. 감정을 숨길 때보다 일을 할 때 더 정확했던 목소리.
서진은 문 앞에 섰다.
손잡이를 잡은 손이 차가웠다. 도망치면 오늘의 불쾌함은 끝날지 몰랐다. 하지만 모아의 계약서는 다른 누군가의 선택으로 계속 굴러갈 것이고 고객 메모 속 침묵도 그대로 남을 것이다.
그건 서진이 싫어하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숨을 한 번 고른 뒤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