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교수가 제자들을 너무 잘 키움

1화: 눈을 감고 백 번 베라
“앞으로 길어야 삼 년입니다. 무리한 마나 운용은 남은 시간을 더 갉아먹을 뿐이에요.”
의무관의 건조한 목소리가 적힌 양피지 진단서를 내려다보며 유진 에르하르는 헐렁한 연구복 소매를 걷었다.
왼쪽 손목 안쪽에 흉터처럼 박힌 검붉은 문양이 희미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소멸의 인장.’
8년 전 별의 균열이 무너지던 참사 속에서 몸속 깊이 새겨진 저주였다. 매달 한 번씩 마나를 태우며 수명을 갉아먹는 형벌 같은 낙인.
유진은 덤덤하게 가죽 장갑을 덧씌우며 진단서를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삼 년이라.”
생각보다 길었다.
원래는 당장 쓰러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몸이었다. 8년 동안 숨죽여 지내며 연구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것도 그저 남은 시간을 조용히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마탑의 골치 아픈 정치질이나 학파 간의 권력 다툼도 그에게는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유진의 목표는 아주 소박했다.
남은 기간 동안 조용히 서류나 정리하다가 퇴직금을 두둑하게 챙겨 인적 드문 시골 영지로 내려가는 것.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고 혼자 조용히 마지막 숨을 거두는 것.
탁.
그러나 책상 위에 신경질적으로 내려앉은 붉은 결재 서류 봉투가 그 소박한 꿈을 비웃었다.
봉투 겉면에는 아르켈 마탑 감찰부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기초이론학부 특별 지도반(임시) 담당 배정 통보서]
“이게 무슨 소리야.”
유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서류를 펼쳤다.
통보서 아래에는 옛 연구 동료이자 지금은 마탑 감찰관으로 일하는 세라 노엔의 날카로운 필체가 적혀 있었다.
‘각 학부에서 퇴출 위기에 몰린 문제아 넷을 묶어 임시 반을 편성함. 담당 교수가 공석이므로 기초이론학부 유진 에르하르 교수를 임시 지도 교수로 지정함. 본 배정은 평의회의 특별 지침에 따름.’
“문제아 수용소잖아.”
유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첨부된 명단을 훑어내려 갔다.
- 카일 로웬 – 검술학부. 평민 전쟁고아 출신. 마나 순환 결함으로 실기 평가 전원 낙제. 학부 내 불화 및 퇴출 권고.
- 마리아 벨로아 – 마도공학부. 벨로아 공작가 방계. 허가받지 않은 기계 회로 조작으로 연구실 폭파 미수.
- 루카 페른 – 정령학부. 수인족 장학생. 통제 불능의 정령 폭주 사고 유발.
- 이벨린 하르트 – 성법학부. 전직 성녀 후보. 교단과의 마찰 및 불법 치유 행위로 제적 대기 중.
사연 없는 놈이 하나도 없었다. 하나같이 각 학부에서 감당하지 못해 내버린 문제아들이었다.
이런 시한폭탄 같은 녀석들을 맡아서 가르치라고?
“내가 내일모레 죽게 생겼는데 누굴 가르쳐.”
유진은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임시 배정이었다. 학생 넷 중 절반 이상이 출석을 포기하거나 스스로 자퇴서를 내면 규정상 반은 자동으로 폐강된다.
폐강 처리만 깔끔하게 끝내면 남은 학기는 연구실 문을 걸어 잠그고 편안하게 퇴직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첫날부터 질려서 도망치게 만들어 주지.”
유진은 구겨진 서류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켈 마탑 동쪽 별관의 구석진 9강의실.
오랫동안 쓰이지 않아 퀴퀴한 먼지 냄새가 가득한 교실 문을 열었을 때 유진은 뜻밖의 광경을 마주했다.
텅 빈 강의실 한가운데에 소년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칼 사이로 번뜩이는 금빛 눈동자. 낡아빠진 가죽 갑주와 수없이 덧댄 흔적이 역력한 장검.
명단에 적혀 있던 첫 번째 문제아 카일 로웬이었다.
카일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번개처럼 몸을 돌리며 검자루를 꽉 쥐었다. 그 눈빛에는 쫓겨난 자 특유의 앙상한 독기와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유진 에르하르 교수님이십니까.”
카일이 억지로 가라앉힌 목소리로 물었다.
유진은 대답 대신 교탁으로 걸어가 삐걱거리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른 애들은?”
“모릅니다. 배정 통보를 받고 곧바로 온 건 저뿐입니다.”
“그래? 열정이 넘치네.”
유진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괴었다.
카일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의 주먹에 핏줄이 돋았다.
교수의 눈빛에서 어떠한 기대나 열정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검술학부에서 자신을 쓰레기 보듯 내쫓던 귀족 교수들의 눈빛보다 차라리 더 지독한 무관심이었다.
“저는 검술학부로 돌아가야 합니다.”
카일이 낮게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학부 놈들은 제가 평민 출신에 마나 제어도 못 하는 불량품이라며 내쫓았습니다. 하지만 전 검을 놓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학점을 채우지 못하면 마탑에서 영구 제적당하고 기숙사에서도 쫓겨납니다.”
절박함이 뚝뚝 묻어나는 호소였다.
하지만 유진의 표정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래서?”
“가르쳐 주십시오. 마법이든 마나 제어든 뭐든 좋습니다. 검술학부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누르고 제 자리를 되찾을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카일이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하는 거친 쇳소리와 함께 낡은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소년은 자신의 온 마나를 검신에 쏟아부었다.
화르륵!
불안정한 푸른빛 마나가 검날을 뒤덮었다.
하지만 그 빛은 매끄럽게 흐르지 못하고 사방으로 거칠게 튀었다. 칼날 끝이 미세하게 경련하듯 흔들렸고 카일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카일은 이를 악물며 검을 똑바로 유지하려 애썼다.
‘봐라. 나도 마나를 쓸 수 있다. 결함품이 아니란 말이다.’
소년의 눈동자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유진의 눈에 비친 것은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유진의 회색 눈동자에 기이한 정적이 감돌았다.
‘공백.’
유진이 평생을 걸쳐 갈고닦았던 고유의 공명 문장이 그의 시야 속에서 카일의 마나 구조를 실시간으로 분해해 보여 주고 있었다.
엉망진창이었다.
마나의 양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많았다.
어떻게든 힘을 과시하려는 조급함 때문에 온몸의 마나를 억지로 쥐어짜 검에 밀어 넣고 있었다.
마치 좁은 배수로에 폭포수를 쏟아붓는 꼴이었다. 넘쳐흐른 마나가 혈관과 근육을 짓누르고 있었고 검 끝의 궤적을 스스로 갉아먹고 있었다.
저러니 검이 흔들릴 수밖에.
‘저러다 혈관 다 터지겠군.’
유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서는 상세하게 이론을 설명해 주고 싶지도 않았다. 귀찮았고 설명할 기력도 없었다.
유진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카일은 교수가 다가오자 숨을 들이켜며 검을 더 굳세게 쥐었다.
유진은 카일의 코앞까지 걸어가더니 가죽 장갑을 낀 검지손가락을 툭 내밀었다.
툭.
“……!”
유진의 손가락이 거칠게 날뛰던 검날의 옆면을 가볍게 건드렸다.
그 순간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카일이 온 힘을 다해 쥐어짜던 푸른 마나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졌다.
칼날을 짓누르던 무거운 압박감이 거짓말처럼 씻겨 나갔다.
“어……?”
카일이 멍하니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하나였다. 아무런 영창도 거대한 마력의 파동도 없었다. 그저 툭 건드렸을 뿐인데 검을 집어삼킬 듯 날뛰던 마나가 허공 속으로 깨끗하게 비워졌다.
동시에 유진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미세한 통증이 스쳐 지나갔다. 소멸의 인장이 미약하게 반응한 탓이었다.
유진은 통증을 내색하지 않은 채 하품을 짤막하게 삼키며 무심하게 말했다.
“마나 억지로 쥐어짜지 마. 쓸데없는 소음이 너무 많잖아.”
“소, 소음이라니요……?”
“눈으로 칼끝을 쫓으면서 마나를 억지로 맞추려 드니까 몸이 굳는 거야. 그 짓거리 계속하면 일주일도 못 가서 팔 근육 다 찢어져.”
유진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어떻게 하면 이 녀석이 질려서 내일부터 안 나올까.
가장 지루하고 성과도 안 나며 귀찮아서 당장 때려치울 만한 과제가 무엇이 있을까.
유진은 대충 생각나는 대로 툭 던졌다.
“그냥 눈 감고 백 번 베어 봐.”
“……예?”
“눈 딱 감고. 마나 쓸 생각 하지 말고 그냥 백 번만 휘둘러 보라고. 벽 치지 말고.”
카일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끝입니까?”
“그래. 그거 다 하면 오늘 수업 끝이야. 다 못 하면 내일부터 오지 마.”
유진은 카일의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강의실 문을 열고 나가며 유진은 속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눈 감고 백 번 검이나 휘두르라는데 버틸 놈이 어디 있겠어. 내일이면 제 발로 자퇴서를 내든 학부 행정실에 항의하러 가든 하겠지.’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교실 안에는 카일 로웬 혼자만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정적만이 감도는 교실.
카일은 유진이 사라진 문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장난하나……?”
치밀어 오르는 모욕감에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눈을 감고 백 번 베라니. 마나도 쓰지 말고 그냥 허공을 가르라니.
이건 가르침이 아니었다. 명백한 조롱이자 축객령이었다. 귀찮은 낙제생 하나를 쫓아내기 위해 던진 비열한 핑계에 불과했다.
“결국 당신도 똑같은 건가.”
카일은 이를 갈며 검을 바닥에 내던지려 했다.
하지만 검자루를 놓으려는 찰나 손끝에 남아 있던 기묘한 감각이 뇌리를 스쳤다.
손가락 하나.
유진 교수의 손가락이 칼날에 닿았던 그 찰나의 순간.
자신의 몸을 찢어발길 듯 날뛰던 마나가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거지?
‘그건 마법이 아니었어. 상쇄 마법도 결계도 아니었어.’
마나를 강제로 억누른 것이 아니라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마나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비워 낸’ 느낌이었다.
그 압도적인 경지.
마탑의 어떤 고위 마법사에게서도 느껴 본 적 없는 기이하고도 완벽한 제어력이었다.
카일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잠깐.’
교수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마나 억지로 쥐어짜지 마. 쓸데없는 소음이 너무 많잖아.’
‘눈으로 칼끝을 쫓으면서 마나를 억지로 맞추려 드니까 몸이 굳는 거야.’
‘눈 감고 백 번 베어 봐.’
카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소음……?’
자신은 지금까지 검술학부의 귀족 동기들을 따라잡기 위해 오직 시각에만 의존해 왔다.
상대의 검로를 눈으로 쫓으며 내 칼날에 마나가 얼마나 둘러쳐졌는지를 눈으로 확인하고 억지로 힘을 주입했다.
그 결과 마나는 늘 충돌했고 근육은 비명을 질렀다.
교수는 그걸 한눈에 꿰뚫어 본 것이다.
‘내가 눈으로 마나의 형태에 집착하느라 진짜 검의 길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걸……!’
눈을 감으라는 것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시각이라는 감각의 족쇄를 끊어내고 몸속에 가득 찬 쓸데없는 마나의 소음을 비워 내라는 뜻이었다.
완벽한 무(無)의 상태에서 오직 순수한 검의 궤적만을 찾아내라는 은밀한 시험.
“……그런 거였나.”
카일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교수는 무기력한 척 귀찮은 척 연기하고 있었지만 실은 자신의 고질적인 결함을 단 3초 만에 간파한 은둔 고수였던 것이다.
“대충 던진 게 아니었어.”
카일은 떨리는 손으로 검을 고쳐 쥐었다.
마탑의 버림받은 9강의실.
먼지 낀 창문 너머로 붉은 노을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카일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시야가 암전되었다.
눈앞의 풍경이 사라지자 주변의 공기 흐름과 자신의 거친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스으읍.
숨을 들이켜고 쓸데없는 마나의 흐름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그리고 검을 내질렀다.
쉬익!
첫 번째 검격.
비록 마나는 실리지 않았지만 칼날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흔들림이 없었다.
카일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한 번.”
소년은 멈추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오직 스승이 던져 준 가르침만을 곱씹으며 다시 검을 치켜올렸다.
“두 번.”
밤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