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같은 동네 학부모가 됐다

1화: 낯선 이름표
유나의 이름표는 분홍색이었다.
한서윤은 현관문 앞에서 그 이름표를 세 번째로 만지작거렸다.
강유나, 새싹반.
가방 고리에는 유나가 고른 토끼 인형이 달려 있었다. 유나는 그 인형의 귀를 만지며 신발장 앞에 서 있었다. 새 공룡 가방은 어깨보다 조금 커 보였다.
"엄마, 유치원에 혼자 들어가야 해?"
서윤은 현관문 손잡이를 잡은 채 유나를 돌아봤다. 처음 가는 곳이라 긴장한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이사 온 지 사흘, 거실에는 아직 상자가 쌓여 있었다.
그렇다고 그 걱정을 유나에게 건넬 수는 없었다.
"선생님이 교실까지 같이 가 주실 거야. 엄마는 현관 앞까지 갈게."
"문 앞은 어디까지야?"
유나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괜찮은 척하려고 더 작게 말하는 버릇을 서윤은 알고 있었다.
서윤은 몸을 낮춰 유나의 운동화 앞코를 바로잡았다. 새 신발의 흰 끈은 이상할 만큼 깨끗했다.
"유나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다만 선생님이 문 닫는 시간에는 엄마가 밖에서 기다려야 해."
유나는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엄마도 밖에서 잘 기다려."
말 끝에 서윤은 웃을 뻔했다. 아이가 걱정받는 쪽에만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게 애틋했다.
"알겠어. 엄마도 잘 기다릴게."
유나는 그제야 서윤의 손을 잡았다.
은솔동 골목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골목 끝의 햇살나무 유치원은 생각보다 작았다. 벽돌 담 위로 해바라기 모양 바람개비가 돌아가고 현관 유리문에는 아이들이 그린 나무 그림이 붙어 있었다.
유나는 걸음을 늦췄다.
"저기 들어가면 토끼 이름표 친구도 있어?"
"아마 있겠지. 유나는 토끼가 아니어도 친구가 될 수 있고."
"공룡도?"
"공룡도."
유나가 겨우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현관 쪽에서 낮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민재야, 가방은 내가 들 수 있어. 네가 들고 가고 싶으면 천천히 가자."
서윤의 발이 멈췄다.
목소리는 기억보다 가까웠다. 너무 가까워서 이름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회색 셔츠의 소매를 걷은 남자가 아이의 가방끈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이는 커다란 공룡 가방을 가슴 쪽으로 끌어안고 있었고 남자는 한쪽 무릎을 굽힌 채 버클을 다시 잠가 주고 있었다.
강도현이었다.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몇 걸음 떨어진 서윤과 시선이 부딪혔다.
그의 표정이 먼저 멎었다. 놀람이 지나가고 그 위에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는 조심스러움이 얹혔다. 서윤도 같은 얼굴이었을 것이다.
"서윤아."
유치원 현관에서 듣기에는 너무 오래된 이름이었다.
서윤은 목이 잠긴 것을 들키지 않으려 침을 삼켰다.
"도현 씨가 왜 여기 있어요?"
처음엔 자연스럽게 나올 뻔한 반말을 끝에서 눌렀다. 이혼한 뒤 두 사람의 문자는 늘 유나의 날짜와 시간을 확인하는 존댓말이었다. 그 편이 덜 아프고 덜 위험했다.
도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곁에 있던 아이가 서윤과 유나를 번갈아 보다가 도현의 셔츠 자락을 쥐었다.
"삼촌, 나 안 들어가면 안 돼?"
도현은 아이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표정이 부드러워지는 속도가 빨랐다.
"무서워?"
아이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교실 문까지만 같이 가자. 들어가서 창가 자리에 앉아 봐. 네가 좋아하는 공룡 책도 있대."
"진짜?"
"선생님한테 들었어. 그리고 하원 시간에는 내가 꼭 올게."
아이는 한 번 더 도현을 올려다봤다. 도현은 가방끈을 매만지지 않고 아이의 눈을 기다렸다. 아이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윤은 그 짧은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도현은 원래 약속을 말할 때 단정했다. 지키지 않으려 해서가 아니라 지키는 일만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사람처럼.
그래서 더 많은 말이 필요했던 날들이 있었다.
유나가 서윤의 손가락을 살짝 당겼다.
"엄마, 저 가방 공룡이야?"
서윤이 대답하기 전에 유나가 아이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두 아이의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그 공룡 티라노야?"
공룡 가방을 꼭 안고 있던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알로사우루스야. 티라노보다 팔이 더 길어."
유나는 진지하게 가방을 들여다봤다.
"미안. 나는 유나야. 동물 스티커 좋아해."
"오민재. 나는 공룡 좋아해."
"알았어. 민재는 공룡 박사구나."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방을 끌어안던 팔에 조금 힘을 뺐다.
햇살나무 유치원 교사가 현관 안에서 아이들을 불렀다. 이름표를 확인하던 교사는 유나와 민재를 보더니 밝게 웃었다.
"새싹반 친구들이네. 둘 다 이쪽으로 와 볼까?"
유나는 서윤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민재도 도현 쪽으로 반 걸음 물러났다. 교사는 서두르지 않고 두 아이에게 교실 안을 가리켰다.
"새싹반 창가에 작은 화분이 있어. 오늘 물 주는 친구를 뽑을 거야."
유나가 물었다.
"화분 이름도 있어요?"
"아직 없어. 친구들이 정해 줄 거야."
유나가 민재를 바라봤다. 민재는 잠시 공룡 가방의 지퍼를 만지더니 말했다.
"공룡풀이라고 하면 안 돼?"
유나가 피식 웃었다.
"풀인데 공룡이야?"
"공룡도 풀 먹는 거 있어."
"그럼 공룡풀이 맞네."
둘 사이에 아주 짧은 웃음이 생겼다. 서윤은 그 웃음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유나가 새 유치원에서 누군가와 말을 섞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이사도 유치원도 고른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곁에 도현이 있었다.
교사가 다시 손을 내밀자 유나는 한 번 서윤을 올려다봤다.
서윤은 유나의 손등을 쓸었다.
"엄마는 밖에서 기다릴게. 유나가 하고 싶은 만큼만 해 봐."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민재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들어갈래? 내가 창가 자리 좋아해."
민재는 손을 보지 않고 도현을 먼저 봤다. 도현은 아이의 선택을 재촉하지 않았다. 다만 짧게 말했다.
"민재가 정해."
한참 뒤 민재의 작은 손이 유나의 손바닥에 닿았다.
두 아이는 교사와 함께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유나는 두 번 뒤돌아 서윤에게 손을 흔들었다. 두 번째에는 민재도 망설이다가 손을 들었다.
문이 닫히자 현관 앞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다른 보호자들의 인사는 멀리서만 들렸다.
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회사 발령이 이 근처로 났어. 두 달 정도 됐고."
서윤은 유리문 너머의 유나를 보며 대답했다.
"그랬구나."
질문은 많았다. 왜 하필 이 근처인지, 저 아이는 누구인지, 은솔동에 살고 있는지. 하지만 하나를 묻는 순간 다른 질문들이 줄을 설 것 같았다. 서윤은 지금 그런 줄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도현이 아이 쪽을 향한 채 말했다.
"민재는 내 조카야. 누나가 아니라 여동생 아들이고. 당분간 내가 보고 있어."
서윤은 그의 얼굴을 봤다. 도현의 가족 얘기는 결혼했을 때도 필요한 만큼만 들었다. 그래도 조카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아이의 이름과 얼굴을 몰랐을 뿐이었다.
"민재 어머니는요?"
"외국에서 일해. 길게는 말 못 들었고. 민재한테는 당분간이라고만 얘기했어."
도현의 말이 평소보다 조금 느렸다. 설명을 마친 뒤에도 변명처럼 들리지 않도록 고르는 말투였다.
서윤은 더 묻지 않았다. 아이의 사정은 아이가 알 수 있는 만큼만 알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유나는 이번에 이사 왔어."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은솔동으로?"
"응. 회사랑도 조금 가까워서."
짧은 대답 뒤에 다시 침묵이 왔다. 서윤은 그 침묵을 오래 알고 있었다. 결혼 생활의 마지막에는 두 사람이 이 정도의 침묵을 너무 자주 남겼다. 상대가 먼저 풀겠지 하고 지나간 말들이 쌓여 결국 길이 막혔다.
지금은 그 길을 다시 열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유치원 첫날 현관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유나 일은 지금처럼 문자로 연락하면 돼요."
도현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서윤은 말을 이었다.
"민재랑 유나가 친해지더라도 아이들 일정은 아이들한테 맞춰서요. 우리 사정 때문에 불편하게 만들고 싶진 않아요."
그 말은 부탁이면서 경계였다. 유나에게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을 도현과의 재회보다 앞에 놓겠다는 선택이었다.
도현은 잠시 서윤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나도 그래."
그는 휴대폰을 꺼냈다.
"혹시 민재 쪽으로 급한 일이 있으면 연락할 수 있게 번호는 받아도 될까? 유나 일 말고는 먼저 연락 안 할게."
서윤은 화면을 보지 않았다. 도현의 번호는 이미 있었다. 저장 이름도 그대로였다. 유나 아빠.
그 이름을 바꾸지 않은 이유는 미련이 아니라 필요한 정보를 빨리 찾기 위해서라고 스스로에게 여러 번 말해 왔다.
"번호는 있어요. 도현 씨도 제 번호 있잖아요."
"응. 그래도 민재 보호자라고 따로 적어 둘게."
도현은 자신의 연락처를 새로 보냈다. 화면에 뜬 이름은 강도현이었다. 서윤은 그 이름을 한동안 바라보다 저장 버튼을 눌렀다.
강도현 - 민재 보호자.
한때 같은 집의 현관 비밀번호를 공유했던 사람이 이제는 딸 친구의 보호자로 화면에 남았다.
그때 교실 안에서 아이들 목소리가 터졌다. 유나가 창가 쪽에서 뭔가를 들고 흔들고 있었다. 작은 스티커 한 장이었다. 민재가 그 옆에서 손가락으로 공룡 그림을 가리키자 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걸렸다.
도현도 그쪽을 보고 있었다.
"민재가 먼저 말을 걸었네."
"유나가 공룡을 틀렸다고 했으니까요."
"정확한 애라서."
"유나도 금방 외울 거예요."
서윤이 말하자 도현이 짧게 웃었다. 웃을 때만 눈가가 조금 부드러워지는 얼굴이었다. 그 낯익음이 마음에 닿기 전에 서윤은 시선을 돌렸다.
교사가 현관문을 열고 보호자들에게 안내장을 나눠 주었다.
"첫 주는 열한 시 반 하원입니다. 새싹반은 아이들이 적응할 수 있도록 다음 주부터 두 명씩 짝을 지어 귀가 준비도 해 볼 거예요."
서윤의 손에 얇은 안내장이 쥐어졌다. 하원 시간 옆에는 작은 별표가 있었다. 같은 반 친구끼리 잠깐 놀이터에서 인사할 수 있도록 보호자끼리 확인해 달라는 문구였다.
도현도 같은 종이를 보고 있었다.
서윤은 안내장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오늘은 제가 데리러 올게요."
"알겠어. 민재도 내가 올 거야."
필요한 말은 그뿐이었다. 서윤은 유치원 담장 쪽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럼 가 볼게요."
도현이 대답했다.
"서윤아."
서윤은 돌아보지 않았다.
"유나 첫날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평범한 말이었다. 하지만 도현이 유나를 걱정하는 방식은 아직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이 서윤을 잠깐 멈추게 했다.
"도현 씨도 민재 잘 챙겨요."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골목 쪽으로 걸었다.
몇 걸음 뒤 휴대폰이 진동했다. 유치원 단체 알림방 초대 메시지였다. 그 아래 새로 저장한 연락처가 보였다.
강도현 - 민재 보호자.
서윤은 화면을 끄지 못한 채 한 번 더 교실 창을 올려다봤다.
유나가 창문 안쪽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옆의 민재는 공룡 스티커를 가슴에 붙인 채 유나가 가리키는 쪽을 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벌써 같은 풍경을 보고 있었다.
서윤은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피하고 싶은 사람을 피하는 일보다 유나가 친구를 잃지 않게 하는 일이 먼저였다.
그 사실 하나만은 오늘 아침, 분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