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싶은 마교 교주

1화: 칼을 거두고 퇴근하라
서북 적염산의 밤은 유난히 차고 어두웠다.
해발 삼천 척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우뚝 솟은 혈마신교의 본산 흑요대전에는 핏빛 향로에서 피어오른 짙은 백단향이 깔려 있었다. 제26대 교주 진패천의 장례가 끝난 지 불과 반 각도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대전 바닥을 가득 메운 백여 명의 마교 간부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전대 교주의 죽음은 공식적으로는 급환에 의한 서거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오간 독과 암투 그리고 뒤이어 펼쳐질 피의 보복. 마교의 역사는 늘 새로운 교주가 옥좌에 오를 때마다 흘린 피로 쓰여 왔다.
모두의 시선이 대전 가장 높은 곳, 검은 옥좌에 앉아 있는 청년에게 쏠렸다.
제27대 혈마신교주 진무연.
검은 비단 상복을 걸친 그는 턱을 괸 채 미동도 없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안색에 짙은 흑발, 그리고 무엇보다 형형하게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가 보는 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역시 마황의 유일한 양자이자 후계자다.'
'사흘 밤낮을 곡소리 하나 없이 제단을 지키더니 저 살기를 보라.'
간부들은 무연의 붉은 눈을 보며 저마다 마른침을 삼켰다. 저것은 필시 마교를 뒤흔든 배신자들을 모조리 찢어발기겠다는 마도 절대자의 서슬 퍼런 안광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시각 진무연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생각은 전혀 달랐다.
'죽겠다. 진짜 과로사하겠어.'
무연은 턱을 괸 손가락에 은근히 힘을 주며 관자놀이를 억눌렀다.
붉은 안광? 천만의 말씀이었다.
전대 교주가 갑작스럽게 쓰러진 뒤 사흘 동안 조문객을 맞고 상주 노릇을 하며 끊임없이 밀려드는 보고서에 도장을 찍느라 단 한 시간도 눈을 붙이지 못해 실핏줄이 터진 것뿐이었다.
'이런 미친 조직이 세상에 어디 있어? 교주가 죽었는데 결재 서류는 왜 더 늘어나는 건데?'
무연은 속으로 피를 토하듯 절규했다.
그는 애초에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야망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는 평화주의자였다. 전대 교주 진패천에게 거두어져 자란 것도 살인을 즐겨서가 아니었다. 밥을 굶지 않고 살기 위해 무공을 배웠을 뿐이었다.
그가 바라는 삶은 단순했다. 위험천만한 마교 교단에서 무사히 빠져나가 양지바른 산골마을에 조용한 찻집 하나를 차려 해가 지면 문을 닫고 퇴근하는 삶. 그 은퇴 자금을 모으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다.
그런데 전대 교주가 덜컥 죽어버리며 그 무거운 교주의 인장을 자신에게 떠넘겨 버렸다.
"교주이시여!"
침묵을 깨고 벼락같은 고함이 대전을 뒤흔들었다.
붉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거구의 사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혈마신교의 삼대 장로 중 한 명이자 전쟁파의 수장인 도천악이었다. 그의 오른팔에 장착된 강철 의수가 묵직한 마찰음을 냈다.
"선대 교주님의 급환 뒤에 간악한 배신자들의 간계가 얽혀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입니다!"
도천악은 품에서 피 묻은 붉은 죽간 한 뭉치를 꺼내 높이 치켜들었다.
"교주님의 즉위를 맞아 본교 내부의 썩은 살을 도려내야 합니다. 여기 본좌가 추려낸 배신자 일백삼십 명의 명단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백야대와 혈풍대를 풀어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이놈들의 삼족을 멸하고 정파 놈들이 있는 남쪽 국경으로 진군해야 합니다!"
도천악의 고함과 함께 대전 안의 공기가 흉흉한 살기로 팽창했다. 도천악의 수하들이 일제히 칼자루를 쥐며 핏발 선 눈으로 호응했다.
"교주님의 영단을 청합니다!"
"배신자들의 피로 제단을 적시소서!"
귀청을 찢는 고함 소리에 무연의 편두통이 한층 더 심해졌다.
무연은 한숨을 삼키며 손짓을 했다. 옥좌 곁에 시립해 있던 백의의 여검수 백야호법 설백하가 소리 없이 내려가 도천악의 죽간을 받아왔다.
설백하는 은빛 머리칼 사이로 차가운 눈빛을 빛내며 무연에게 죽간을 바쳤다.
"교주님. 백야대는 이미 대전 외곽에 결진을 마쳤습니다. 명만 내리시면 적염산의 문을 걸어 잠그고 쥐새끼 한 마리 남기지 않고 도륙하겠습니다."
설백하의 목소리는 지극히 공손했으나 살기는 도천악 못지않았다.
무연은 피 묻은 죽간을 넘겨받아 무표정하게 훑어보았다.
명단에 적힌 이름들을 보는 순간 무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양곡 창고 관리인, 서북 운송로 마부장, 교단 식당 조리장, 하급 회계관……?'
이건 배신자의 명단이 아니었다. 전쟁을 반대하고 교단의 보급과 살림을 담당하던 온건파와 실무자들의 명단이었다. 도천악은 새 교주가 오른 첫날 혼란을 틈타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실무진을 모조리 학살하고 교단을 전쟁 체제로 몰아넣으려는 속셈이었다.
게다가 백삼십 명? 그들의 삼족까지 합치면 수백 명이 넘는다.
'오늘 밤에 이 사람들을 다 죽이겠다고? 그러면 내일부터 밥은 누가 짓고 마차는 누가 몰며 장부는 누가 쓰는데?'
조직 운영의 기본조차 모르는 무식한 전쟁광의 발상에 무연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사람이 죽어나가면 교단의 재정은 파탄 나고 은퇴는커녕 평생 피비린내 나는 전쟁 뒤치다꺼리나 하다 죽을 판이었다.
무연은 피 묻은 죽간을 대리석 바닥 위로 툭 떨어뜨렸다.
탁.
맑고 건조한 파열음이 대전의 고함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도 장로."
무연의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대전 전체에 울려 퍼졌다.
"예, 교주님! 명을 내려주십시오!"
도천악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취했다. 그러나 이어진 무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도천악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이들이 배신자라는 물증은 어디 있습니까?"
"……예?"
"횡령한 은자의 출처, 정파와 내통한 서신, 혹은 위조된 통행증. 그에 관한 회계 장부나 문서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도천악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교, 교주님. 마교의 규율은 의심이 곧 죄이며 피로써 증명하는 법입니다. 어찌 한가하게 장부 따위를 들먹이십니까!"
"장부가 한가하다?"
무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에서 일체의 살기나 흉폭한 패기가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대전을 가득 채우고 있던 도천악의 핏빛 살기가 마치 거짓말처럼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상대의 흉포한 기운을 비워내고 안정시키는 진무연의 독문무공 무흔심법(無痕心法).
어떠한 충돌도 없이 주변의 모든 기혈을 고요 속에 가라앉히는 그 기괴한 정적에 도천악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내 패도혈공의 기운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고? 언제 저런 경지에 도달한 것이냐?'
도천악은 무연이 살기를 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살기를 완벽하게 통제하며 상대를 내려다보고 있다고 착각했다.
무연은 피곤에 절어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이며 도천악을 응시했다.
"증거도 없는 명단 하나로 백삼십 명의 목을 치면 내일부터 교단의 물류와 식량 보급은 누가 책임집니까? 도 장로가 직접 쌀가마니를 나르고 솥뚜껑을 잡을 생각입니까?"
"그, 그것은……."
"목을 베기 전에 장부부터 가져오시오. 숫자가 맞지 않고 혐의가 입증된 자들만 법도에 따라 문책할 것입니다."
무연의 단호한 거절에 대전 안의 간부들이 숨을 삼켰다.
그때 대전 한구석에서 청의를 입고 안경을 쓴 사내가 걸어 나왔다. 교단의 장부와 행정을 도맡고 있는 총관 서진의였다. 그는 늘 품에 넣고 다니던 주판과 두꺼운 서류철을 꺼내 들었다.
"교주님의 혜안이 지극히 타당하십니다. 현재 본교의 창고 재고와 장부 사이에는 수만 냥에 달하는 오차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야간 수색과 전면 심문에 돌입한다면 행정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여 교단 전체의 업무가 마비될 것입니다."
서진의는 차분한 목소리로 현실적인 난관을 짚었다. 그러자 도천악이 이를 악물며 다시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야간 순찰대를 세 배로 늘려 밤새도록 적염산 전체를 뒤져야 합니다! 밤을 새워서라도 배신자들을 색출해야 합니다!"
밤을 새운다.
그 한마디가 무연의 마지막 인내심을 끊어놓았다.
무연은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지금 당장 저 자들의 고집을 꺾어놓지 않으면 오늘 밤도 내일 밤도 끝없는 야간 회의와 심문과 보고서에 시달려야 한다. 사람이 잠을 자지 못하면 미치거나 죽는다.
무연이 눈을 번쩍 떴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도 장로, 그리고 총관."
"예, 교주님."
"본교의 야간 무력 행사를 전면 금한다."
대전에 서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예?"
도천악도 서진의도 심지어 설백하마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무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전의 간부들을 둘러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시각부터 해가 지면 모든 무기는 칼집에 넣는다. 야간 기습, 비밀 심문, 야간 순찰의 과도한 징발을 일체 중단하라. 또한 명확한 물증과 결재 없는 살생 역시 금한다."
"교, 교주님!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교가 밤의 칼을 거두다니요!"
도천악이 경악하여 소리쳤다. 무연은 차갑게 그를 내려다보며 쐐기를 박았다.
"오늘 안에 끝내지 못할 피는 내일도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낮에 처리하지 못하는 일은 밤을 샌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늘 업무는 여기까지입니다."
무연은 검은 비단 소매를 펄럭이며 돌아섰다.
"모두 물러가서 쉬십시오."
그것으로 끝이었다.
교주는 어떠한 추가 설명도 없이 옥좌 뒤편의 내실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닫히는 육중한 석문 소리와 함께 대전에는 기괴할 정도의 침묵만이 남았다.
"……야간 무력 행사를 금한다?"
도천악은 바닥에 떨어진 죽간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장부를 가져오라 하셨다. 그리고 밤의 암살과 숙청을 금하셨지. 설마…….'
도천악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밤에 사람을 죽이는 것은 뒤탈을 감추기 위함이다. 하지만 낮에 공개적으로 장부를 털어 죄를 묻겠다는 것은 단순한 숙청이 아니라 내 배후에 있는 비밀 자금줄과 원로들의 돈줄까지 천하에 폭로하여 합법적으로 목을 치겠다는 뜻이다!'
야간 무력 금지는 자비가 아니었다. 적들의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한 치의 변명도 통하지 않는 대낮의 단두대로 끌어내리겠다는 서슬 퍼런 선전포고였다.
도천악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어린 놈인 줄 알았더니…… 뱀 같은 놈. 전대 교주보다 훨씬 더 무서운 괴물이다.'
한편 총관 서진의 역시 안경을 고쳐 쓰며 깊은 충격에 빠져 있었다.
'피를 흘리지 않고 장부로 적을 제압하겠다? 게다가 야근을 금지하여 조직의 피로도를 낮추고 효율을 극대화하겠다는 계산인가.'
서진의는 손에 쥔 주판을 조용히 튕겼다.
밤샘 근무로 인한 사고율과 비효율 그리고 무차별 학살로 인한 재정 손실. 새 교주는 그 모든 것을 단 한 번의 눈짓으로 꿰뚫어보고 조직의 체질을 바꾸려 하고 있었다.
'단순한 무골이 아니다. 이 자는 마교를 단순한 폭력 집단이 아닌 천하를 경영할 수 있는 거대한 제국으로 탈바꿈시키려 하고 있어.'
서진의의 차가운 가슴 한구석에서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이 일었다.
설백하 또한 쌍도의 자루를 꽉 쥐며 은빛 눈동자를 빛냈다.
'교주님의 뜻은 명확하다. 밤의 어설픈 칼질로 적을 놓치지 말고 완벽한 증거가 모일 때까지 숨을 죽이라는 명령이다. 백야대는 그림자 속에서 놈들의 자금 흐름을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간부들은 저마다 새 교주의 가늠할 수 없는 심계와 대전략에 압도당한 채 조용히 대전을 빠져나갔다.
그 시각 교주 처소.
육중한 침향목 문을 걸어 잠근 진무연은 비단 침상 위에 털썩 엎어졌다.
"아이고 내 허리야……."
근엄한 교주의 위엄 따위는 온데간데없었다. 무연은 신발도 제대로 벗지 못한 채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드디어 퇴근했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장례 사흘 동안 꼿꼿하게 펴고 있던 등뼈가 비명을 질렀다.
무연은 침대 옆 탁자에 놓인 따뜻한 작설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나른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래. 이래야지. 사람이 밥 먹고 잠은 자야 살 것 아닌가."
무연은 품에서 전대 교주가 남긴 낡은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곳에는 은퇴 후 열고 싶었던 조그마한 찻집의 대략적인 설계도가 그려져 있었다.
'장부를 샅샅이 정리해서 새어 나가는 돈부터 틀어막아야지. 횡령된 돈만 환수해도 교단 빚을 다 갚고 내 은퇴 자금까지 넉넉하게 챙길 수 있을 거야.'
평화롭고 조용한 찻집 주인의 삶.
무연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내일부터는 정시에 출근해서 장부만 결재하고 해 지면 무조건 문 닫아야지."
무연은 그렇게 평온한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날 밤 적염산의 어둠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야간 무력 전면 금지.'
'피 대신 장부를 요구하는 마교의 새 교주.'
교단 내부에 잠입해 있던 각 문파의 세작들과 암시장의 첩자들은 새 교주의 기괴하고도 무시무시한 선언에 전율했다.
어둠을 틈타 날아오른 수십 마리의 전서구들이 밤하늘을 갈랐다. 정파의 구대문파로 사파 연맹으로 그리고 저 멀리 황궁의 깊은 궁궐로.
천하는 마교가 마침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칼날을 숨긴 채 대륙 전체를 집어삼킬 거대한 침묵의 음모를 시작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교 교주의 평화로운 첫 퇴근길 위로 천하를 뒤흔들 거대한 폭풍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