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마왕입니다만?! : 현대 힐링 라이프를 방해하지 마라

5화: 게임기는 건드리지 마라
붉은 눈들이 일제히 루시펠을 향했다.
동굴 안쪽은 바깥보다 넓었다. 검은 안개가 바닥을 덮고 있었고 그 중심에 열두 개의 검은 돌이 원을 이루고 있었다. 돌마다 붉은 실선이 뻗어 나와 제단 한가운데의 덩어리로 모였다.
차원 핵.
마계의 전쟁터에서 보던 균열의 씨앗과 비슷했다. 다만 이 장치는 지나치게 조잡했다. 누군가 차원의 흐름을 억지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침입자다!"
로브를 입은 신도 하나가 지팡이를 들었다.
"마왕님의 강림을 방해하는 자를 제물로 바쳐라!"
목소리가 울리자 마수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네 발로 기어오는 놈도 있었고 사람처럼 두 발로 달리는 놈도 있었다. 모두의 목에 원 안의 세 뿔 문양이 붉게 박혀 있었다.
루시펠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왕의 이름을 빌려 마수를 부리고 있었다. 정작 마왕 본인이 눈앞에 서 있는데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왕을 부른다고? 허락은 받았나?"
가장 앞의 마수가 턱을 벌리고 튀어 올랐다.
루시펠은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딱.
손가락 끝이 허공을 가볍게 튕겼다. 소리는 작았지만 파동은 동굴 전체를 가로질렀다. 마수의 몸이 공중에서 멈추더니 뒤따라오던 놈들을 덮치며 바닥을 굴렀다.
두 번째 마수가 제단에 닿기 전에 루시펠이 손가락을 옆으로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선이 앞발을 휘감았다. 놈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세 번째 마수는 방향을 틀어 게이트 밖으로 달려갔다.
루시펠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밖으로 나가는 건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엄지를 튕기자 마수의 몸이 뒤집혔다. 놈은 허공에서 몇 바퀴를 돌고 제단 앞에 떨어졌다. 검은 돌 하나가 진동하며 붉은 불꽃을 뿜었다.
게이트 밖에서 윤서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도현 씨! 안쪽은 괜찮아요?"
"밖을 지켜라. 곧 끝난다."
"그 말을 믿어도 되는 상황이에요?"
루시펠은 대답하지 않았다. 열두 개의 돌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방향을 세었다. 서로 다른 열두 갈래가 중심 핵을 붙잡고 있었다. 핵을 먼저 부수면 힘이 전력망으로 역류한다. 돌을 하나씩 부수면 그때마다 게이트가 마수를 토해 낼 것이다.
귀찮은 구조였다.
신도 둘이 제단 앞으로 달려갔다. 한 명이 검은 가루를 돌 위에 뿌리자 열두 개의 돌이 한꺼번에 붉게 달아올랐다.
"마왕님께서 곧 응답하신다!"
"저 힘은 내가 모르는 힘이다."
루시펠이 신도를 바라봤다.
"그럼 누구의 힘이지?"
신도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위대한 마왕님의 힘이다. 이 문을 열면 지구는 마왕님의 왕국이 된다."
"내 왕국이라고? 허락도 없이?"
루시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때 제단 뒤의 어둠이 부풀었다. 무언가가 돌벽을 찢고 나왔다. 앞서 쓰러진 마수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어깨가 동굴 천장에 닿았고 두 팔에는 검은 핏줄이 굵게 꿈틀거렸다. 목덜미에는 여러 개의 문양이 겹쳐 새겨져 있었다.
신도 하나가 웃었다.
"차원 핵이 길러 낸 수호수다. 네가 아무리 강해도―"
수호수의 주먹이 루시펠을 향해 떨어졌다.
루시펠은 피하지 않았다. 손바닥을 들어 주먹을 받아 냈다.
쿠웅!
바닥이 움푹 꺼졌다. 검은 돌 사이로 먼지가 솟구쳤다. 그러나 루시펠의 발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수호수의 눈이 흔들렸다.
"이게 수호수인가?"
루시펠은 손바닥으로 놈의 주먹을 밀어 냈다.
거대한 몸이 뒤로 날아가 제단 앞에 처박혔다. 중심 핵이 크게 흔들리며 붉은 실선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신도들의 표정이 굳었다.
"말도 안 돼…… 저 마력은 측정되지 않았는데……"
"측정할 기계가 없어서 그렇다."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지직거렸다. 배터리 잔량은 아홉 퍼센트였다. 전자기기에 이상이 생길 때마다 힘을 너무 많이 썼다는 뜻이었다.
루시펠은 손끝에 모인 마력을 다시 눌렀다. 거대한 힘을 한 번에 쓰는 것은 쉬웠지만 장치가 전력망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잘못 흘리면 원룸까지 불꽃이 역류할 수 있었다.
게임기와 냉장고를 태울 수는 없었다.
수호수가 다시 일어났다. 등에 박힌 검은 돌 조각들이 살을 뚫고 나오며 붉은 실선을 뿜었다. 그 실선이 신도의 손목과 이어졌다.
"명령을 강화해라!"
수호수가 포효했다. 천장이 울리고 바닥의 돌들이 동시에 떠올랐다.
루시펠은 수호수의 눈을 바라봤다.
녀석의 몸을 움직이는 것은 힘이 아니었다. 검은 돌에 새겨진 명령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라. 부숴라. 인간을 죽여라. 단순한 말들이 여러 겹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루시펠은 손가락을 한 번 휘저었다.
붉은 실선 열두 개가 동시에 끊어졌다.
수호수의 몸이 굳었다. 놈은 주먹을 든 채 무릎을 꿇었다. 뒤에서 달려들던 마수들도 한꺼번에 바닥에 엎어졌다.
신도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명령을 빼앗았어?"
"빼앗은 게 아니다. 돌려준 거다."
루시펠은 손을 내렸다.
"살고 싶으면 방해하지 마라."
하지만 신도들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공포보다 광신이 먼저 떠올랐다.
"마왕님께서 직접 보낸 사자다!"
두 사람은 품 안에서 검은 조각을 꺼내 중심 핵에 던졌다. 제단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게이트 바깥에서 윤서연의 불꽃이 폭발했다.
"도현 씨! 문이 더 커지고 있어요!"
"알고 있다."
루시펠은 중심 핵으로 걸어갔다. 신도 둘이 주문을 외우며 막아섰지만 그의 앞을 가로막은 순간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루시펠이 손가락을 아래로 내리자 두 사람은 동시에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네놈은 누구냐!"
"내가 묻고 있다. 누가 이 장치를 만들었지?"
신도들은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검은 피가 흘렀지만 그들은 웃고 있었다.
"곧 문이 완성된다. 지구의 불빛이 모두 꺼지면 마왕님께서 내려오신다."
지구의 불빛을 모두 끈다.
게임도 꺼지고 와이파이도 끊기고 냉장고도 멈춘다. 배달 앱까지 사라진다.
루시펠은 중심 핵 앞에 섰다.
"내 이름을 팔아 전기를 끊고 내 생활을 망가뜨리겠다? 상당히 무례하군."
핵이 맥박치며 붉은 빛을 내뿜었다. 게이트 바깥의 전신주에서 굉음이 들렸다. 역류가 시작된 것이다. 윤서연의 목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도현 씨! 지금 당장 나와요! 골목 전체가 무너질 수 있어요!"
루시펠은 핵에서 뻗어 나온 열두 갈래의 흐름을 바라봤다.
먼저 부수면 안 된다. 돌을 모두 잠재우고 핵을 닫아야 한다. 하지만 돌 하나만 건드려도 다른 돌이 힘을 받아 게이트가 더 넓어질 수 있었다.
그는 열두 개의 돌 사이에 손을 뻗었다. 손가락 하나가 첫 번째 돌의 붉은 선을 눌렀다.
빛이 꺼졌다.
두 번째. 세 번째.
루시펠은 돌을 부수지 않고 각각의 명령만 꺾었다. 열두 개의 붉은 선이 차례로 잿빛으로 변했다. 마력이 빠져나간 돌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마지막 돌이 꺼지는 순간 중심 핵이 크게 솟구쳤다.
루시펠은 두 손으로 핵을 감쌌다.
뜨거웠다. 전기와 마력이 뒤섞인 힘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휴대전화 화면이 하얗게 번쩍였고 배터리 잔량이 일곱 퍼센트로 떨어졌다.
핵은 손안에서 계속 부풀었다.
"이 정도로 내 방을 끌 수 있다고 생각했나?"
루시펠은 손에 힘을 주었다.
쩌저적.
차원 핵 표면에 금이 갔다. 신도들의 비명이 동굴을 울렸다.
"안 돼! 그걸 부수면 전부 무너진다!"
"그래서 부수는 거다."
그는 악력을 더했다.
핵이 산산이 부서졌다.
검은 조각들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폭발해야 할 마력은 루시펠의 손바닥 안에서 한 덩어리로 눌렸다. 그는 그것을 가늘게 접어 게이트 가장자리의 틈으로 밀어 넣었다.
바깥에서 윤서연이 무언가를 외쳤다. 주황색 불꽃이 게이트의 테두리를 둥글게 감쌌다. 불꽃이 흩어지는 마력을 붙잡아 한 방향으로 밀어 냈다.
"불꽃을 유지해라."
"지금도 하고 있어요! 빨리 나와요!"
게이트가 안쪽으로 접히기 시작했다. 쓰러져 있던 마수들이 검은 먼지로 변했고 로브를 입은 신도 둘은 제단 잔해 아래에 깔렸다.
루시펠은 무너지는 게이트를 향해 걸었다.
"다음에는 이름을 빌리기 전에 본인에게 물어라."
검은 벽이 어깨를 스쳤다. 바깥의 소리가 돌아왔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고 전선이 타는 냄새가 났다. 윤서연의 화염이 그의 앞에서 갈라졌다.
루시펠이 골목으로 나오자 게이트가 손바닥만 한 틈으로 줄어들었다.
그 틈은 마지막까지 붉게 떨더니 소리 없이 닫혔다.
잠시 뒤 전신주 위에서 불꽃이 꺼졌다.
어두웠던 골목에 가로등이 하나씩 켜졌다.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원룸 건물의 창문들이 차례로 밝아졌다. 끊겼던 통신도 돌아왔는지 주민들의 휴대전화가 동시에 울렸다.
윤서연은 숨을 몰아쉬며 루시펠에게 다가왔다.
"도현 씨. 안에서 대체 뭘 한 거예요?"
"장치를 껐다."
"장치를 끈 사람이 왜 손에 아무 상처도 없어요?"
루시펠은 손을 내려다봤다. 손바닥에는 검은 가루가 조금 묻어 있었다. 그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이 켜졌다.
[네트워크 연결됨]
배터리 6퍼센트.
그는 곧바로 게임 아이콘을 눌렀다. 멈춰 있던 화면이 돌아오며 저장 데이터가 정상적으로 불러와졌다.
루시펠의 표정이 아주 조금 풀렸다.
윤서연은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 게임을 확인한 거예요?"
"중요한 일이다."
"사람들이 다친 건 없는지부터 확인해야죠."
"밖에 있던 사람들은 네가 지켰다."
루시펠은 주변을 둘러봤다. 한도윤은 주민들에게 상황이 끝났다고 설명하고 있었고 배지훈은 불이 붙은 전선 주변을 통제하고 있었다. 큰 부상을 입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윤서연은 그가 동료들의 상태를 확인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도현 씨가 안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더 크게 터졌을 거예요. 고마워요."
"밥값이다."
"밥값치고는 너무 큰데요."
"다음에는 더 좋은 밥을 사라."
윤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다가 곧 웃음을 거뒀다.
골목 바닥에는 부서진 검은 돌과 불에 그을린 문양이 남아 있었다. 루시펠의 힘이 지나간 자리에는 기존 게이트와 달리 얇고 깊은 균열 같은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협회가 오면 이걸 조사할 거예요. 도현 씨도 설명해야 할 수 있어요."
"설명할 수 있다."
"정말요?"
루시펠은 손에 묻은 검은 가루를 털었다.
"게임을 방해한 놈들을 쫓아냈다고 하면 된다."
윤서연은 이마를 짚었다.
그때 루시펠의 휴대전화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화면 가장자리에 가느다란 줄이 번졌다가 사라졌다. 게이트가 닫힌 뒤에도 검은 돌 조각 하나가 주머니 안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루시펠은 손으로 주머니를 눌렀다.
이번에는 전등이 깜빡이지 않았다. 대신 멀리서 또 다른 전선이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윤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루시펠은 게임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아직 하나가 남았군."
그리고 그는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
게임을 계속하기 전에 방해꾼부터 처리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