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마왕입니다만?! : 현대 힐링 라이프를 방해하지 마라

3화: 이상한 이웃집 헌터
루시펠은 휴대전화 화면을 세 번 확인했다.
[이체 완료]
원룸 주인에게 월세와 관리비를 보낸 뒤 남은 금액은 삼만 원 남짓이었다. E급 게이트에서 벌어 온 첫 정산금은 손에 들어오자마자 사라졌다.
마왕성의 세금은 적어도 군단장이 직접 독촉하지는 않았다. 이곳의 원룸 주인은 짧은 문자 하나로 정확히 오전 열 시에 납부를 확인했다.
[확인했습니다. 다음 달에는 미루지 마세요.]
루시펠은 답장을 쓰지 않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생수 한 병. 김치통. 어제 먹다 남은 무 절임 몇 조각.
차가운 빛이 텅 빈 선반을 비췄다. 그는 한동안 냉장고 앞에 서 있다가 문을 닫았다.
"전리품을 나눠 가진 뒤에도 굶을 수 있군."
공략대의 정산 방식은 공정했다. 문제는 그가 아직 지구의 돈을 모으는 법을 몰랐다는 것이다.
루시펠은 침대에 걸터앉아 휴대전화로 이상 게이트 알림을 다시 열었다. 화면 속 검은 문양은 원 안의 세 뿔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한강북구 외곽 이상 파동. 협회 통제 구역 지정]
[민간 헌터 및 일반인 출입 금지]
그는 공고 아래의 신청 버튼을 눌렀다.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현장 통제 권한이 없습니다.]
루시펠의 손가락이 멈췄다.
마왕교가 게이트 안에 넣어 둔 명령을 알아낼 기회였다. 그러나 이곳의 인간들은 허가증이 없으면 위험한 곳에 들어갈 수 없게 막아 둔다. 꽤 현명한 규칙이었다.
다만 지금의 그에게는 성가셨다.
그는 다음 일용 공고를 찾으려 화면을 넘겼다. 그때 복도에서 비닐봉지가 바닥을 끄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작게 놀라는 숨소리가 들렸다.
루시펠은 문을 열었다.
옆집 현관 앞에서 한 여자가 장바구니를 붙들고 있었다. 종이봉투 밑이 젖었는지 귤 몇 알과 통조림 하나가 복도 바닥으로 굴러갔다.
여자는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난처하게 웃었다. 편한 후드티 차림이었지만 팔목에는 마력 보호용 가죽 밴드가 감겨 있었다. 어깨가 아니라 발끝에 힘을 둔 자세도 평범한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루시펠은 굴러가던 귤을 발끝으로 멈췄다.
통조림 하나가 계단 쪽으로 떨어질 듯 기울었다. 그가 손을 뻗기도 전에 통조림이 허공에서 아주 잠깐 멈췄다. 보이지 않을 만큼 얇은 마력이 바닥 쪽으로 밀어 넣은 결과였다.
여자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어? 고마워요."
"떨어지면 소리가 난다."
"그게 이유예요?"
"아래층 사람이 깰 수 있다."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맞네요. 저는 윤서연이에요. 옆집에 사는데 이제야 인사하네요."
"강도현이다."
"도현 씨. 혹시 오늘도 집에 계셨어요?"
"그렇다."
윤서연의 시선이 열린 문틈 너머를 스쳤다. 침대와 책상, 낡은 냉장고뿐인 방이었다. 식탁 위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라면 봉지 하나와 빈 생수병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판단하는 얼굴이 됐다.
"점심은 드셨어요?"
"아직이다."
"그럼 잘됐어요."
윤서연은 장바구니 속 보온 가방을 들어 보였다.
"도시락이 두 개 왔거든요. 길드 사무실로 시켰는데 주소를 잘못 눌렀나 봐요. 혼자 다 먹긴 많아서요."
루시펠은 가방을 바라봤다. 고기와 밥의 냄새가 지퍼 틈으로 흘러나왔다.
"대가는?"
"네?"
"음식을 주면 뭘 받나."
윤서연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종이봉투를 품에 안고 조용히 대답했다.
"옆집 사람이 밥 한 끼 같이 먹는 데 대가까지 받아요?"
루시펠은 그 말을 곱씹었다.
마계에서 음식은 늘 군량이었다. 누군가의 식량을 받으면 전투에 나가거나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식사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제육볶음 냄새는 이해보다 빨랐다.
"많이 주는 건가?"
"충분히요."
루시펠은 옆으로 물러섰다.
"들어와라."
윤서연은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보는 남자의 원룸에 망설임 없이 들어오는 행동이었지만 허리의 작은 마력총과 손목 밴드를 보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루시펠은 도시락 뚜껑이 열리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제육볶음. 계란말이. 콩나물무침. 따뜻한 흰밥.
그는 젓가락을 들어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달고 매운 양념이 혀를 덮었다. 씹을수록 불향이 올라왔고 마지막에는 밥을 부르는 짭짤함이 남았다.
윤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입에 안 맞아요?"
"아니다."
루시펠은 두 번째 젓가락을 들었다.
"아주 훌륭하다. 이 고기는 전투 전에 먹어도 사기가 오르겠군."
"전투요?"
"게임 전투 말이다."
그는 책상 위 휴대전화를 가리켰다. 윤서연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게임 하세요?"
"아직 기계가 없다. 곧 구할 생각이다."
"그럼 취업 준비 중이신 거예요?"
루시펠의 손이 멈췄다.
"그게 뭐지?"
"직업을 구하려고 준비하는 거요."
"일은 필요하면 한다."
"아… 그렇구나."
윤서연은 더 묻지 않고 계란말이를 그의 도시락 칸으로 하나 옮겨 줬다. 그 조심스러운 손길에는 캐묻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루시펠은 뜻을 완전히 알 수 없었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너는 무슨 일을 하지?"
"헌터예요. 라온 길드라는 작은 길드에서 일하고 있어요. 제가 길드장이고요."
"길드장?"
그는 그녀를 다시 봤다. 복도에서 장바구니가 쏟아진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함이었다.
윤서연은 휴대전화에 붙은 작은 명함을 꺼내 보여 줬다. 라온 길드장 윤서연. 이름 아래에는 낡은 상가 건물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작아서 제가 장도 보고 전화도 받고 다 해요. 오늘은 근처 이상 파동 때문에 대기조가 됐고요."
"그 검은 문양이 나온 곳인가."
윤서연의 눈빛이 달라졌다.
"알아요? 뉴스 봤어요?"
"알림이 왔다."
"그쪽은 가지 마세요. 협회가 막아 놨고 분위기가 좀 이상하대요. 특히 혼자서는요."
루시펠은 밥을 한 숟갈 더 떠먹었다.
"혼자가 더 빠를 때도 있다."
"그런 말 하는 사람치고 안전한 사람 못 봤는데."
그녀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표정은 진지했다. 마왕성에서 루시펠에게 걱정한다는 말을 한 부하는 없었다. 모두 명령을 기다리거나 공포에 떨었다.
윤서연은 눈앞의 낯선 이웃이 위험한 곳으로 걸어 들어갈까 봐 정말 걱정하는 듯했다.
그 감정이 이유 없이 마음에 남았다.
그때 윤서연의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라온 길드 한도윤: 서연 누나, 변전함 쪽에서 마력 반응이 또 튀었어요.]
[배지훈: 한강북로 골목입니다. 전선이 뜨거워요.]
윤서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요. 제가 통화하고 올게요."
그녀는 창가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도윤아, 시민부터 물려나게 해. 협회 신고는 했어? …응. 불꽃이 보이면 절대 가까이 가지 말고. 내가 바로 갈게."
통화를 끝낸 윤서연은 도시락 뚜껑을 덮으려 했다. 그러나 손끝에 작은 불꽃이 튀었다. 긴장할 때 새어 나오는 화염 마력이었다.
그 불꽃이 비닐 뚜껑에 닿기 전에 루시펠이 손가락을 튕겼다.
불씨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
윤서연이 그를 돌아봤다.
"방금… 제가 껐나?"
"네 불이 약했다."
"그런데 분명 튀었는데."
루시펠은 대답하지 않고 책상 서랍을 열었다. 검은 돌 조각이 든 종이봉투를 꺼내자 안쪽에서 붉은 실선이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손바닥을 덮었다. 돌 조각을 짓누르지 않고 표면의 명령만 잠재웠다.
찌직.
방 안 전등이 한 번 어두워졌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가느다란 줄이 지나갔다.
윤서연은 그 과정을 말없이 지켜봤다. 루시펠이 종이봉투를 서랍 깊이 밀어 넣자 그녀가 낮게 물었다.
"도현 씨, 정말 아무 일도 안 하세요?"
"일을 한다고 했을 텐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그녀는 말을 삼켰다. 낯선 사람에게 재능과 과거를 캐묻는 건 무례하다고 판단한 듯했다.
"됐어요. 말하기 싫은 건 안 물을게요. 대신 위험한 일 있으면 혼자 하지 말아요."
루시펠은 그녀를 바라봤다.
"왜?"
"옆집이니까요."
아까와 같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기 냄새보다 오래 남았다.
윤서연은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었다. 휴대전화는 쉴 새 없이 진동했고 그녀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도현 씨. 혹시 일자리 찾는 거면 저희 길드에 들러 봐요. 잡일이라도 있을 수 있고 밥은 챙겨 드릴게요."
"밥을 또 주나?"
"그건 제가 장담할 수 있어요."
그녀는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루시펠은 종이를 받아 들었다. 얇은 종이였지만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가 규칙적으로 찍혀 있었다. 현대 인간들은 도움을 청하는 방법까지 작은 종이로 정리해 둔다.
"다음에는 내가 산다."
윤서연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그럼 맛있는 곳으로 골라야겠네요. 약속이에요."
"약속은 지킨다."
윤서연은 웃으며 복도 끝으로 뛰어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루시펠은 현관에 서 있었다.
그는 문을 닫은 뒤 명함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도시락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밥값을 갚아야 한다.
루시펠은 그 생각을 하며 중고 거래 앱을 열었다. 작은 게임기와 낡은 모니터를 검색하자 값싼 매물이 화면을 채웠다. 삼만 원으로는 부족했다.
다시 게이트 공고를 찾거나 다른 일을 구해야 했다.
바로 그때 창밖에서 둔탁한 울림이 터졌다.
웅.
창문이 가늘게 떨렸다. 루시펠은 고개를 들었다.
원룸 건너편 전신주 꼭대기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전선 사이로 붉은 빛이 거미줄처럼 번졌다. 그 빛은 이내 원 안의 세 뿔 모양을 만들었다.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지직거리며 진동했다.
[한강북로 골목. 소형 게이트 반응 감지]
전등이 두 번 깜빡였다.
한 번 더.
그러고는 방 안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게임기 매물도, 윤서연의 명함도, 도시락의 빈 용기도 검은 어둠 속으로 잠겼다.
루시펠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왕교는 게이트 안에서만 난동을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들의 전선 가까이까지 기어들어 와 그의 방과 식사를 방해하려 한다.
그건 개인적인 선전포고였다.
루시펠은 현관 옆에 걸어 둔 외투를 집어 들었다.
"감히 내 전기를 끊어?"
어둠 속 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