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님, 꿈속에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9화: 익숙한 체향
뜨거운 증기가 은제 찻주전자 주둥이에서 가늘게 피어올랐다.
로제트는 숨을 가다듬으며 황태자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아침 햇살이 길게 쏟아지는 집무실 안은 서늘하고 고요했다. 책상 위에는 정갈하게 정돈된 서류들이 쌓여 있었고 그 뒤편에 카이엔이 앉아 있었다.
카이엔은 깃펜을 쥔 채 집무 서류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평소처럼 이마를 찌푸리거나 관자놀이를 짓누르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밤마다 그를 괴롭히던 지독한 광증과 피로가 씻은 듯 가라앉은 탓이었다. 수년 만에 누린 여덟 시간의 깊은 수면은 그의 붉은 눈동자에 서늘하고도 맑은 생기를 되찾아 주었다.
로제트는 조심스럽게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전하, 아침 차를 준비했습니다.”
찻잔을 책상 모퉁이에 내려놓으려던 순간이었다.
탁.
서류를 넘기던 카이엔의 손이 허공을 가르며 로제트의 가느다란 손목을 단숨에 낚아챘다. 거칠지 않았지만 벗어날 수 없을 만큼 단단하고 정확한 악력이었다.
“……전하?”
로제트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카이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깃펜을 내려놓고 로제트의 손목을 천천히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로제트의 몸이 저절로 책상 쪽으로 기울어졌다. 카이엔의 차가운 흑발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곧장 꿰뚫을 듯 응시했다. 숨소리마저 닿을 듯한 거리에서 카이엔이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역시 그렇군.”
카이엔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뭐가 말이십니까?”
“향기.”
그는 로제트의 손목을 쥔 채 조금 더 가까이 고개를 기울였다. 손목 안쪽의 맥박이 뛰는 자리, 그리고 목덜미 부근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어젯밤 꿈속에서 정원에 흩날리던 장미 향이다. 비린 피와 저주의 악취를 덮어 버렸던 그 향기와 한 치도 다르지 않아.”
로제트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카이엔은 악몽 속의 감각을 놀라울 정도로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꿈속에서 잡았던 손의 온기뿐만 아니라 정원을 채웠던 장미 꽃가루의 냄새까지 그대로 현실로 끌고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순순히 인정할 수는 없었다. 황실 암투와 저주의 배후가 도사리는 이곳에서 하급 시녀가 타인의 꿈을 주무르는 드림워커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당장 위험한 정치적 장기말로 전락할 터였다.
로제트는 능청스럽게 눈을 크게 뜨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 그건 당연합니다!”
“당연하다고?”
“어젯밤 전하의 침실 바닥을 장미유로 닦아냈으니까요! 게다가 오늘 아침 빨래를 하면서 장미수 비누를 통째로 쏟았습니다. 하급 시녀에게서 장미 냄새가 나는 건 피땀 어린 노동의 증거입니다!”
카이엔의 눈썹이 가늘게 꿈틀거렸다.
“장미수 비누?”
“예! 엎지른 걸 아까워서 제 앞치마에 벅벅 문질렀거든요. 냄새가 너무 독해서 머리가 아프시다면 당장 물러가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로제트는 손목을 빼내려 슬그머니 힘을 주었다.
그러나 카이엔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에 힘을 살짝 더 주며 로제트의 맥박을 짚었다. 그녀의 맥박이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말이 길어지는 버릇이 있군.”
“시녀의 충정을 거짓이라 치부하시면 섭섭합니다.”
카이엔은 로제트를 빤히 쳐다보았다.
붉은 눈동자 속에 담긴 의심은 지워지지 않았지만 날카로운 살기는 섞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로제트의 손목을 쥐고 있는 동안 그의 미간에 남아 있던 미세한 긴장이 완전히 풀려나갔다.
로제트가 가까이 있을 때마다 머리를 쪼개던 악몽의 잔재가 거짓말처럼 가라앉고 있었다.
“물러갈 필요 없다.”
카이엔이 마침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차는 두고 가라. 그리고 오늘 집무실 밖으로 멀리 나가지 마라.”
“전담 시녀의 본분을 다하겠습니다.”
로제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바로 놓았다. 손목에 붉은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 순간 집무실 문이 조심스럽게 두드려졌다.
똑, 똑.
“전하, 레온입니다. 명하신 기록을 확인하여 가져왔습니다.”
“들어와라.”
문이 열리고 레온 기사장 대리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섰다.
레온은 문을 열자마자 카이엔의 얼굴을 보고 흠칫 굳어졌다. 늘 핏발 서 있던 황태자의 눈이 맑게 가라앉아 있었고 지독하게 뿜어져 나오던 살벌한 기운이 정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하…… 안색이 매우 좋아 보이십니다.”
“잡담은 됐다. 황후궁 수로 출입 기록은 어찌 되었지?”
카이엔의 서늘한 목소리에 레온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품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어젯밤 지시하신 대로 최근 한 달간 황후궁 뒤편 수로 봉인판을 점검하거나 출입한 자들의 명단을 대조했습니다. 그런데 묘한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묘한 점이라니.”
“수로 수문 관리와 봉인판 상태를 최종 점검했던 조향 보좌관 ‘에릭’이 오늘 새벽 돌연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레온의 보고에 로제트의 귀가 쫑긋 섰다.
“새벽에?”
“예. 평소 황후궁의 허드렛일과 향료 납품을 맡아 오던 자인데 오늘 아침 점호에 나타나지 않아 숙소를 수색해 보니 이미 주요 짐을 챙겨 성 밖으로 도주한 뒤였습니다.”
카이엔의 입꼬리가 차갑게 비틀렸다.
“꼬리를 잘랐군.”
“황후궁에 즉시 사람을 보내 심문하시겠습니까?”
“아니. 에릭이 혼자 저지른 일이라고 발뺌하면 그만이다. 명확한 연결 고리 없이 섣불리 건드리면 황후궁은 증거를 인멸하고 우리 쪽의 약점만 찾으려 들 테지.”
카이엔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에릭의 뒤를 은밀히 쫓아라. 황성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가기 전에 반드시 산 채로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황후궁에서 황태자궁으로 이어지는 모든 통로의 경계를 조용히 두 배로 늘려라.”
“명 받들겠습니다!”
레온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로제트는 찻주전자를 챙기며 상황을 냉정하게 정리했다.
카이엔이 여덟 시간 동안 악몽 없이 잠들자 황후궁 일파가 즉각 위기감을 느끼고 움직인 것이 분명했다. 현실의 수로 통로가 흔들리고 황태자의 광증이 멈추자 현장 관리인을 신속하게 도주시킨 것이었다.
황후궁 쪽에서도 밤마다 벌어지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뜻이었다.
로제트는 쟁반을 들고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황태자궁 회랑은 평화로워 보였지만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쟁반을 들고 시녀 대기실로 향하던 로제트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화려한 감청색 비단 드레스를 입은 중년 시녀였다. 가슴팍에 달린 황후궁의 백합 문양 은 브로치가 햇빛을 받아 번뜩였다. 황후궁의 선임 시녀 베아트였다.
“잠깐 멈추어라.”
베아트가 서늘한 시선으로 로제트를 아래위로 훑었다.
“황후궁 선임 시녀님을 뵙습니다.”
로제트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베아트는 로제트에게 다가서며 코를 킁킁거렸다. 그녀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시녀 주제에 몸에 장미 향을 진하게도 뿌렸구나.”
“아, 세탁용 비누를 쏟아서 그렇습니다. 송구합니다.”
“흥. 그것보다 어젯밤 황태자 전하의 처소에서 별다른 소란이 없었다지? 매일 밤 들리던 고함이나 칼부림 소리가 전혀 없었다고 하더구나.”
베아트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떠보기가 섞여 있었다.
로제트는 즉시 겁먹은 하급 시녀의 표정을 지으며 몸을 잘게 떨었다.
“그, 그것이…… 전하께서 너무도 무서운 기세로 침대에 누워 계셔서 저는 구석에 틀어박혀 밤새 눈도 못 뜨고 벌벌 떨기만 했습니다. 어찌나 살벌하던지 숨소리 하나 내지 못했습니다.”
“정말 그것뿐이냐? 네가 전하께 무언가 수상한 약을 올리거나 수작을 부린 것은 아니고?”
베아트의 손이 로제트의 턱을 거칠게 치켜들었다.
로제트는 눈가에 억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전하께 약을 쓰겠습니까! 전하께서 칼을 뽑으실까 봐 무서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철저하게 겁에 질린 연기에 베아트의 입꼬리가 비웃음을 띠며 일그러졌다.
“쯧, 쓸모없는 것. 황태자궁 전담으로 뽑혔다기에 무슨 대단한 계집인가 했더니 흔해 빠진 겁쟁이 시녀였군.”
베아트가 로제트의 턱을 홱 밀치며 손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그 찰나 로제트는 베아트의 소매 자락에서 퍼져 나온 미세한 냄새를 맡았다. 수로의 깨진 봉인판에서 흘러나왔던 썩은 장미 냄새와 차가운 백합 향의 잔재였다.
베아트 역시 그 저주의 통로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황태자 전하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지켜보아라.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황후궁에 즉시 보고하는 것이 네 목숨을 보전하는 길일 게다.”
“명심하겠습니다, 선임 시녀님!”
베아트가 거만하게 돌아섰다.
로제트는 멀어지는 베아트의 뒷모습을 보며 눈가의 눈물을 쓱 닦아냈다.
첫날밤의 청소로 저주의 겉가지만 겨우 쳐냈을 뿐이었다. 카이엔이 숙면을 취하자마자 황후궁은 꼬리를 자르고 전담 시녀인 자신까지 압박해 오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황태자의 무의식 속에 남은 저주의 핵을 완전히 뽑아내지 못하면 현실에서의 위협도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터였다.
밤이 깊어지자 황태자궁 침실에 다시 묵직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침실 안에는 오직 카이엔과 로제트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레온이 이끄는 호위 기사들이 문밖 복도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카이엔은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낮에 확인했던 은실이 들려 있었다.
“그 시녀가 낮에 너를 건드렸다고 들었다.”
“아, 베아트 선임 시녀 말씀이십니까? 그냥 잔소리 조금 들었을 뿐입니다.”
“다음에는 내 허락 없이 황후궁 사람과 마주치지 마라. 황태자궁 전담 시녀를 함부로 건드리는 자는 누구든 용납하지 않는다.”
카이엔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독점욕이 묻어 있었다.
로제트는 묵묵히 미소를 지으며 안락의자를 침대 곁으로 바짝 당겨 놓았다.
“오늘 밤에도 어제처럼 진행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먼저 잠드시면 제가 곧바로 뒤따라 들어가겠습니다.”
“네 몸은.”
“은실을 세 번 당기는 규칙을 잊지 마세요. 그리고 꿈속에서는 제 이름을 딱 한 번만 부르셔야 합니다.”
카이엔은 로제트의 손을 잡아끌어 손목에 은실을 감았다. 이번에도 매듭은 조이지 않게 느슨하게 묶였다.
그는 로제트의 손등을 가볍게 덮어쥐었다.
“어제 약속했지.”
“예?”
“꿈속에서도 내 손을 놓지 않겠다고.”
카이엔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낮게 일렁였다.
“오늘 밤에도 놓지 마라. 네가 곁에 있어야 악몽에 휘둘리지 않는다.”
로제트는 그의 진지한 눈빛을 마주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겠습니다. 쓰레기를 다 치울 때까지는 절대 놓지 않을 테니까요.”
카이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그는 침대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로제트의 체향이 침실 공기를 채우자 카이엔의 숨소리가 이내 고르게 잦아들었다.
로제트도 의자에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의식이 현실의 육체를 빠져나와 차가운 어둠을 뚫고 카이엔의 몽경으로 침투했다.
파앗.
시야가 밝아지며 어젯밤 정화해 두었던 장미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분홍빛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고 맑은 수로가 흐르고 있었다. 벤치 위에 서 있던 카이엔이 로제트를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로제트.”
“전하, 무탈하시……”
로제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쿠구구궁!
정원의 하늘이 쩍 갈라지며 피처럼 붉은 번개가 꽂혔다.
수로의 맑은 물이 순식간에 검게 끓어올랐고 정원 너머의 지평선이 거대하게 뒤틀렸다. 어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마력의 파동이 회랑 전체를 뒤흔들었다.
“크아아아아악!”
지평선 너머의 먹구름을 찢으며 거대한 그림자가 솟구쳐 올랐다.
검붉은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날개와 산봉우리만 한 몸집. 입안에서 지옥의 불꽃을 머금은 채 포효하는 고대 용의 형상이었다.
저주의 통로가 막히자 심연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던 악몽의 본체가 직접 눈을 뜬 것이었다.
카이엔이 로제트의 앞을 막아서며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이번 놈은…… 어제보다 거대하군.”
로제트는 흩날리는 분홍 꽃잎 속에서 장미 가시로 엮인 거대한 빗자루를 허공에 불러내며 씩 웃었다.
“스케일이 커졌네요. 하지만 분리수거 대상인 건 똑같습니다.”
용의 아가리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브레스가 정원을 향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