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 막내아들은 펀드를 너무 잘함

2화: 식탁 위의 셈법
식당 문을 열자 서늘한 공기가 뺨에 닿았다.
넓은 대리석 바닥 중앙에는 열 명이 족히 앉을 만한 흑단목 식탁이 놓여 있었다. 샹들리에의 주황빛 조명 아래 식기가 정갈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그러나 식당 안의 분위기는 온기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만큼 무거웠다.
상석에는 강문식 회장이 앉아 있었다.
창업주의 각진 턱과 깊게 팬 미간은 사진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위압적이었다. 신문을 읽다 말고 든 그의 무채색 눈동자가 문가에 선 서준을 향했다.
“앉거라.”
짧은 한마디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서준은 고개를 숙이며 가장 구석진 자리로 걸어갔다. 식탁의 배치는 집안의 권력 구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강문식의 바로 오른쪽에는 장남 강태준이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이복 누나인 최유민이 앉아 있었다. 서준의 자리는 식탁의 가장 끝자락이었다.
“몸은 좀 어떠니, 서준아?”
어머니 홍명숙 여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많이 나았어요, 어머니. 어지러운 것도 가라앉았고요.”
서준은 최대한 순진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스무 살 대학생의 풋내 나는 억양을 흉내 내는 것은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았다. 몸에 남은 근육과 기억이 저절로 반응하고 있었다.
강태준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피식 웃었다.
“대학생이나 됐으면 몸 관리도 실력이다. 겨우 감기몸살로 며칠씩 누워 있으면 바깥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니.”
태준의 목소리는 품위가 넘쳤지만 그 안에는 막내를 향한 노골적인 무시가 깔려 있었다.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 이미 전략기획 부사장 타이틀을 달고 그룹의 차기 대권을 노리는 남자였다. 그에게 스무 살짜리 막내 동생은 경쟁 상대조차 되지 않는 곁가지에 불과했다.
“죄송해요, 형. 앞으론 조심할게요.”
서준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렇게 봐라.’
경계의 사각지대에 들어가는 것. 그것이 무일푼으로 시작해야 하는 지금의 자신에게 가장 강력한 방패였다.
최유민은 말없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녀는 백화점 기획팀을 맡고 있었지만 혼외자라는 태생적 한계 탓에 늘 식탁에서 조용히 숨을 죽였다. 서준과 눈이 마주치자 유민은 가볍게 눈인사만 건넬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찬모들이 들어와 은식기에 담긴 음식을 내려놓았다. 맑은 장국과 갈비찜, 전복초가 차려졌지만 누구 하나 숟가락을 먼저 들지 않았다. 강문식이 젓가락을 집어 든 뒤에야 조용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강태준이었다.
“아버지, 지난주에 말씀하셨던 동남아 정유 플랜트 증설 건은 싱가포르와 홍콩 쪽 금융단을 통해 외화 차입 계약을 마무리했습니다.”
태준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차입 금리는 리보(LIBOR)에 0.8퍼센트 가산금리로 묶었습니다. 국내 은행에서 원화로 대출받는 것보다 금리가 훨씬 저렴합니다. 초기 설비 자금 백억 원 이상을 절감하는 효과가 납니다.”
강문식의 젓가락질이 미세하게 느려졌다.
“만기는 얼마로 잡았느냐.”
“1년 만기 단기 차입입니다. 만기 때마다 롤오버(만기 연장)를 하면 되기 때문에 장기 차입보다 조달 비용이 훨씬 적게 듭니다. 홍콩 쪽 투자은행들도 대한그룹의 신용도를 높게 평가해서 연장에는 아무 문제 없다고 확답했습니다.”
서준은 국물을 떠먹는 척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단기 달러 차입으로 장기 플랜트에 투자한다고?’
만기가 짧은 돈을 빌려 회수 기간이 긴 공장에 쏟아붓는 것. 전형적인 만기 불일치(Maturity Mismatch)였다. 평화로운 호황기에는 저금리 혜택을 누릴 수 있지만 시장에 한 번이라도 유동성 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파산으로 이어지는 지옥의 구조였다.
외환위기 당시 굴지의 대기업들이 맥없이 쓰러진 이유가 바로 저것이었다. 외국계 은행들이 만기 연장을 거부하고 일제히 달러 회수에 나서자 하루아침에 갚을 달러가 없어 부도를 냈다.
태준은 그것도 모르고 자신이 엄청난 금융 비용을 절감했다며 기세등등해하고 있었다.
그때 최유민이 조심스럽게 말을 얹었다.
“오빠, 요즘 시중 금리가 조금씩 오르는 추세인데다 환율도 요동치고 있어요. 백화점 쪽 입점 업체들도 결제 대금을 원화 대신 달러로 요구하는 곳이 늘고 있고요. 단기 외채 비중이 너무 높으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태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유민이 너는 매장 관리나 신경 써라. 그룹의 거시적인 재무 전략은 네가 백화점에서 옷 파는 거완 차원이 다른 문제야. 지금 우리 경제성장률이 몇 퍼센트인데 환율 걱정을 해? 한국은 이제 OECD 가입을 눈앞에 두고 있어. 달러가 부족할 일은 없다.”
태준의 오만한 반박에 유민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1994년 한국 사회의 맹목적인 낙관론이 식탁 위를 지배하고 있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신화에 취해 누구도 파국의 가능성을 보려 하지 않았다. 부채를 끌어다 덩치를 키우는 것이 미덕이었고 리스크 관리를 입에 담는 자는 겁쟁이나 패배자 취급을 받았다.
강문식은 태준의 보고를 묵묵히 들을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러나 늙은 회장의 눈가에는 묘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역시 본능적으로 무언가 지나치게 빠르게 팽창하고 있다는 불안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식사가 중반에 이르렀을 때 강문식이 갑자기 수저를 내려놓았다.
식탁 위의 모든 소리가 뚝 끊겼다. 태준도 말을 멈추고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강문식의 무거운 시선이 식탁 끝에 앉은 서준에게 머물렀다.
“서준아.”
“네, 아버지.”
서준은 입에 넣으려던 밥을 멈추고 반듯하게 허리를 세웠다.
“너 대학에서 경제학을 배운다고 했지.”
“네, 1학년 1학기 듣고 있어요.”
강문식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덤덤하게 물었다.
“그래. 책에서 배우기에 돈이란 게 어디로 흐른다고 하더냐.”
순간 식탁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태준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고 어머니는 막내가 실수라도 할까 봐 초조하게 손을 쥐었다. 강문식 회장은 자식들에게 불필요한 농담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질문은 막내를 향한 갑작스러운 시험이었다.
서준은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답변을 계산했다.
2026년 펀드매니저로서의 정답은 명확했다. 돈은 금리가 높은 곳으로 흐르고 리스크 대비 기대수익률이 가장 매력적인 자산으로 국경을 넘어 순식간에 이동한다. 자본의 탐욕과 공포가 만들어내는 유동성의 물길을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말을 뱉는 순간 스무 살 강서준의 가면은 산산조각 난다.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도 강문식의 뇌리에 작은 쐐기를 박아야 했다.
서준은 일부러 눈을 크게 깜빡이며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
“교수님께서는 돈은 이자가 높은 곳으로 모이고 물건값이 싼 곳으로 흘러간다고 가르쳐 주셨어요.”
태준이 헛기침을 하며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교과서 첫 장에 나오는 원론적인 소리군.”
서준은 태준의 비웃음을 모르는 척하며 말을 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대학생처럼 천진난만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아버지, 전 공부하다가 좀 헷갈리는 게 있었어요.”
“무엇이 헷갈리더냐.”
“교과서에는 다른 나라 돈을 싸게 빌려오면 좋다고 나오는데요. 만약에 달러 값이 갑자기 올라버리면 어떻게 돼요? 우리는 한국 돈으로 물건을 팔아서 번 돈으로 달러를 사서 갚아야 하잖아요.”
식탁 위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서준은 말을 멈추지 않고 철없는 투로 덧붙였다.
“달러 환율이 지금 800원인데 만약에 1,000원이나 1,500원이 되면요? 백 달러 빌렸을 때 8만 원만 갚으면 되던 게 15만 원을 줘야 하는 거잖아요. 그럼 이자가 아무리 싸도 결국 손해 아닌가요?”
태준이 기가 찬다는 듯 숟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서준아, 네가 경제학을 겨우 한 학기 배워서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구나. 환율이 1,500원이라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국가가 환율 방어를 하고 외환보유고를 관리하는데 그런 터무니없는 폭등이 왜 일어나겠니.”
태준은 아버지를 보며 웃었다.
“아버지, 애가 아직 현실 경제를 몰라서 공상 소설을 씁니다.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하지만 강문식은 웃지 않았다.
그의 깊은 눈동자가 서준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강문식은 서준이 계산해서 던진 말인지 아니면 단순히 어린애의 엉뚱한 상상인지 가늠하려는 듯했다.
강문식은 창업 세대였다. 밑바닥에서부터 맨손으로 기업을 일구며 수많은 위기를 겪어본 늙은 승부사였다. 그는 숫자로 포장된 태준의 보고서보다 막내가 던진 날것의 의문에 담긴 서늘한 진실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환율이 오르면 갚아야 할 원화가 늘어난다.”
강문식이 낮게 읊조렸다.
“기본적인 셈법이지. 하지만 기업을 하는 놈들은 종종 그 기본을 잊고 욕심을 부린다.”
태준의 얼굴에서 미소가 굳어졌다.
강문식은 서준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밥 먹자.”
회장의 한마디로 시험은 끝났다.
서준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밥을 씹었다. 겉으로는 안도한 척했지만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강문식의 뇌리에 환율 리스크라는 단어가 분명하게 각인되었다.
식사가 끝나고 가족들은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서준이 2층 복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을 때 뒤에서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최유민이 서 있었다.
“서준아.”
“누나.”
유민은 서준의 곁으로 다가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식탁에서 한 말, 너무 마음에 두지 마. 태준 오빠 말이 좀 거칠어도 원래 성격이 그렇잖아.”
유민의 눈빛에는 막내를 향한 진심 어린 염려가 담겨 있었다. 오너가의 차가운 틈바구니에서 외롭게 버텨온 그녀였기에 막내 동생의 처지에 동질감을 느끼는 듯했다.
“괜찮아요, 누나. 제가 잘 몰라서 엉뚱한 소리 한 건데요, 뭐.”
서준이 헤실 웃으며 대답하자 유민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네가 한 말, 난 틀린 말 아니라고 생각해. 백화점 현장에서 보면 요즘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거든. 손님들 씀씀이도 줄고 결제도 자꾸 밀려. 위에서는 다들 잘나간다고 잔치 분위기지만 난 가끔 무섭더라.”
서준은 유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타고난 현장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복잡한 거시경제 지표를 보지 않고도 백화점 매장의 미세한 결제 흐름과 소비자의 지갑 사정을 통해 위기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훗날 유민이 보여줄 소비 데이터 분석 능력의 싹이 이미 자라고 있었다.
“누나도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몸 상해요.”
“고마워. 푹 쉬어.”
유민이 돌아선 뒤 서준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고 자물쇠를 걸자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서준은 책상 앞에 앉아 스탠드를 켰다.
오늘 식사를 통해 확인한 사실들은 명확했다.
첫째, 대한그룹의 단기 외화 부채 비중은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태준은 눈앞의 저금리에 눈이 멀어 만기 불일치 폭탄을 키우고 있었다.
둘째, 강문식 회장은 본능적으로 불안을 느끼고 있지만 그룹의 확장 속도를 멈출 명분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셋째, 그룹 내부에서 유일하게 현장의 균열을 느끼고 있는 것은 백화점의 최유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아무것도 막을 수 없다.’
서준은 책상 서랍을 열어 자신의 지갑과 통장을 꺼냈다.
잔고는 수중에 쥔 현금 몇십만 원이 전부였다. 재벌가의 막내아들이라는 화려한 껍데기 아래에는 단 한 주의 주식도 단 한 푼의 운용 자금도 없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가문의 파멸을 막으려면 먼저 자신만의 종잣돈과 정보망이 필요했다.
‘내일 당장 대학으로 가자.’
1994년의 금융 시장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신문과 객장에 드러나지 않은 진짜 금리와 환율의 균열이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해야 했다.
시계 초침이 자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서준은 어둠이 내린 창밖을 응시했다. 3년 뒤 닥쳐올 거대한 파도가 저 멀리서 서서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