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외과 천재의 분초 회귀

2화: 놓쳤던 신호
삐, 삐, 삐, 삐.
생체 징후 모니터의 급박한 경고음이 응급실 중증 구역을 가득 채웠다.
도윤은 턱 끝까지 차오른 거친 숨을 삼키며 시계를 응시했다. 벽시계의 초침은 정확히 밤 10시 55분 49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손바닥 아래에서 차갑게 굳어가던 하린의 흉골 감각이 여전히 손끝에 생생했다. 11시 0분 47초에 선언되었던 사망의 서늘한 무게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열일곱 살 소녀는 분명 체온을 품은 채 희미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환각도 악몽도 아니었다. 죽음의 순간에서 정확히 5분 전으로 시간이 되돌아온 것이다.
“12유도 심전도라니요?”
이서진이 의아한 눈빛으로 도윤을 돌아보았다.
“단순 모니터 리드로는 안 잡히는 게 있습니다. 지금 바로 출력해야 합니다.”
도윤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당황하거나 주저할 틈은 1초도 없었다. 5분이라는 시간은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유라 쌤. 심전도 기계 연결해요. 사지 유도랑 흉부 리드 V1부터 V6까지 전부요.”
“네, 선생님!”
오유라 간호사가 기계를 침대 곁으로 끌어당겼다.
도윤은 직접 흡착 컵과 젤 패치를 쥐고 하린의 가슴 부위에 신속하게 부착했다. 이전 시간선에서는 이 과정을 생략했었다.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불안정한 빈맥에 쫓겨 기본 3유도 모니터만 보며 표준 알고리즘대로 약물을 먼저 투여했었다.
그것이 패착이었다. 단순 상심실성 빈맥으로 판단하고 투여했던 약물이 오히려 환자의 숨통을 끊어놓았던 것이다.
“엄마…… 여기 병원 맞죠?”
하린이 눈을 깜빡이며 속삭였다.
이전 시간선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목소리였다.
침대 난간을 붙잡은 하린의 어머니가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이마를 쓸어내렸다.
“맞아, 하린아. 의사 선생님들이 보고 계셔. 조금만 참자.”
도윤은 패치를 고정하며 하린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하린아. 가슴 안쪽에서 쿵쿵거리면서 소리가 난다고 했지?”
“네…… 빨라지기 전에, 쥐어짜는 것처럼…….”
“지금 심전도 종이 나오는 동안 숨을 천천히 내쉬어 봐. 우리가 꼭 멈춰 줄 테니까.”
지이잉.
심전도 측정기에서 붉은 격자무늬 종이가 밀려 나왔다.
도윤은 출력된 종이를 낚아채듯 받아 들었다. 서진도 도윤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열두 개의 파형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분당 210회가 넘는 빠른 박동 사이로 QRS파의 폭이 미세하게 넓어져 있었다. 보통의 눈으로는 그저 흔한 발작성 빈맥으로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도윤의 눈은 QRS파의 시작 지점을 꿰뚫고 있었다.
상행 각도가 뭉툭하게 꺾여 올라가는 미세한 델타파.
‘조기흥분증후군…… 악성 부전도로다.’
도윤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졌다.
정상적인 전도로 외에 심방과 심실을 잇는 비정상적인 우회로가 숨어 있었다. 이전 시간선에서 일반적인 상심실성 빈맥을 가라앉히기 위해 방실결절을 차단하는 약물을 주입하자 흥분 신호가 전부 이 부전도로로 쏟아져 들어갔던 것이다. 그 결과 심실세동이 유발되었고 심장이 멈춰버렸다.
“서진 교수님.”
도윤이 종이를 가리켰다.
“단순 발작성 상심실성 빈맥이 아닙니다. V1과 V2에서 델타파가 보입니다. 심방세동이 악성 부전도로를 타고 내려오는 프리엑사이테이션(Pre-excitation) 빈맥입니다.”
서진의 안경 너머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종이를 가로채듯 받아 들고 수치를 훑었다.
“이 미세한 파형을 보고 그걸 짚어냈다고요? 만약 그렇다면…….”
“방실결절 차단제는 절대 금기입니다. 아데노신이나 칼슘통로차단제를 쓰면 심실세동으로 직행합니다.”
이전 시간선에서 벌어졌던 참극의 원인이었다. 서진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만약 도윤이 12유도 심전도를 다시 찍지 않고 관행대로 약물을 썼다면 몇 분 뒤 하린의 심장은 그대로 멎었을 터였다.
“혈압 72에 40. 더 떨어집니다!”
오유라가 모니터의 깜빡이는 수치를 외쳤다.
하린의 입술이 점차 창백해지고 있었다. 산소포화도는 89퍼센트까지 내려앉았다. 심장이 지나치게 헛돌며 뇌와 전신으로 피를 뿜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벽시계는 10시 58분 12초를 가리켰다.
그 순간 도윤의 주머니에서 호출기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삐비빅.
도윤은 망설임 없이 스피커폰을 눌렀다. 흉부외과 이태준 교수의 묵직한 음성이 응급실의 기계음 사이로 터져 나왔다.
“도윤아. 3번 수술실 세팅 끝났다. 첫 집도 환자 마취 들어간다. 자정 전에 올라오라고 했을 텐데 어디냐?”
도윤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수년간 갈고닦으며 기다려온 첫 단독 집도였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이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도윤의 눈앞에는 정확히 2분 뒤 심장이 멎었던 열일곱 살 소녀가 누워 있었다.
“교수님.”
도윤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응급실에 악성 부정맥 환자가 있습니다. 혈역학적으로 붕괴 직전입니다. 지금 자리를 비울 수 없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태준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첫 집도의 무게를 잊었나? 응급실은 응급의학과에 맡겨라.”
“제가 놓치면 이 환자는 2분 안에 죽습니다.”
도윤의 단호한 목소리에 곁에 서 있던 서진과 오유라가 숨을 삼켰다.
“……환자를 살리고 올라와라. 늦으면 기회는 없다.”
뚝.
통화가 끊겼다.
침대 위의 하린이 가늘게 뜬 눈으로 도윤을 올려다보았다. 이전 시간선과 같은 질문이 소녀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선생님…… 수술하러 가셔야 해요?”
도윤은 침대 옆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하린의 차가운 손을 잡아주었다. 이전 시간선에서는 미처 건네지 못했던 온기였다.
“안 가. 여기 있을 거야.”
“그러면…… 저 졸업식 때 노래할 수 있을까요? 친구들이랑 연습하기로 했는데…….”
도윤은 하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번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응. 반드시 무대에 서게 해 줄게. 약속해.”
하린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하지만 그 안도감도 잠시였다. 모니터에서 날카로운 비프음이 연달아 터졌다.
삐- 삐- 삐-!
“혈압 60에 30! 수축기 혈압 무너집니다!”
오유라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모니터의 파형이 걷잡을 수 없이 꼬이기 시작했다.
밤 10시 59분 30초.
첫 시간선에서 하린이 심정지로 빠져들었던 바로 그 시간대였다.
“약물로 시간을 끌 여유가 없어요.”
서진이 제세동기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약제 반응을 기다리다가는 뇌 손상이 먼저 옵니다. 전기적 심율동전환 들어갑니다.”
“동기화(Sync) 켜고 100줄(Joule)로 차징하십시오.”
도윤이 즉시 지시를 내렸다.
“100줄이요? 소아 청소년 체중 고려하면 50줄부터 시작하는 게 안전하지 않습니까?”
서진이 반문했다.
“부전도로의 불응기가 짧아서 50줄로는 리셋되지 않고 심실세동으로 퇴행할 위험이 큽니다. 한 번에 정상 동방결절 리듬을 찾아와야 합니다.”
도윤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이전 시간선에서 겪었던 실패의 기억이 그의 모든 판단을 명료하게 벼려내고 있었다.
서진은 도윤의 확신에 찬 눈빛을 마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100줄 차징. 싱크 모드 온.”
위이잉-
제세동기 본체에서 에너지가 차오르는 날카로운 고주파음이 울렸다.
도윤은 젤이 발린 제세동 패들을 쥐었다. 하린의 흉부 오른쪽 쇄골 아래와 왼쪽 젖꼭지 아래 늑골 부위에 패들을 강하게 밀착시켰다.
손바닥을 통해 전달되는 하린의 심장은 마치 터질 듯 불규칙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살린다.’
도윤은 모니터의 R파 플래그를 확인했다.
시계는 11시 0분 15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첫 시간선에서 사망 선언까지 남았던 시간은 고작 32초였다.
“모두 물러서세요! 베드에서 손 뗍니다!”
도윤이 외쳤다.
서진과 오유라가 침대 난간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하나, 둘, 셋. 쇼크!”
쿠웅!
둔탁한 전기 충격과 함께 하린의 상체가 침대 위로 크게 튀어 올랐다가 떨어졌다.
순간 모니터의 모든 파형이 일직선으로 평평하게 늘어졌다.
응급실 중증 구역 전체에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삐-------
도윤의 심장이 멎을 듯 조여왔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1초, 2초, 3초.
찰나의 침묵 끝에 모니터 화면 중앙에서 날카로운 피크가 솟아올랐다.
삐.
규칙적인 P파와 좁고 날렵한 QRS파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삐. 삐. 삐.
분당 82회. 완벽한 정상 굴심방조율(Normal Sinus Rhythm)이었다.
“……리듬 돌아왔습니다!”
오유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혈압 105에 68. 산소포화도 98퍼센트로 상승합니다!”
도윤은 쥐고 있던 패들을 제세동기에 내려놓았다. 장갑을 낀 손바닥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벽시계는 11시 1분 02초를 지나고 있었다.
첫 시간선에서 사망 선언이 내려졌던 11시 0분 47초의 벽을 완벽하게 넘어선 순간이었다.
“하린아…… 하린아!”
커튼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어머니가 무너져 내리듯 침대 곁으로 달려왔다.
하린은 규칙적인 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창백했던 입술에 발그레한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엄마…….”
“그래, 우리 딸. 살았어…… 선생님들이 살려주셨어.”
어머니는 딸의 손을 부여잡고 오열했다. 하린은 도윤을 향해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윤은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시간을 되돌려 한 생명을 건져냈다. 죽음을 덮고 삶을 되찾아왔다.
하지만 환희에 젖을 틈도 없이 오른쪽 관자놀이에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큭…….’
도윤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단순한 두통이 아니었다. 시야 한구석이 번쩍거리며 뇌수를 쥐어짜는 듯한 지독한 편두통이었다. 이전 시간선의 기억과 현실의 시공간이 충돌하며 남긴 회귀의 대가였다.
“도윤 쌤. 괜찮아요?”
서진이 다가와 도윤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눈빛은 안도감 너머로 짙은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일시적인 피로 때문입니다.”
도윤은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손을 내렸다.
서진은 차트 패드를 든 채 도윤을 똑바로 응시했다.
“12유도 심전도를 다시 찍자고 한 것도 그렇고 100줄 동기화 전환을 망설임 없이 지시한 것도 그렇고…….”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날카로웠다.
“마치 이 환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 무너질지 전부 알고 있었던 사람 같네요. 1분만 늦었어도 소생술로 넘어갔을 타이밍이었어요.”
도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서진의 예리한 관찰력은 이미 도윤의 행동이 통상적인 응급 처치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음을 짚어내고 있었다.
도윤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환자가 말했던 흉통의 양상과 청진 소견에서 부전도로 가능성이 의심됐을 뿐입니다. 지체하면 저혈압 쇼크가 올 게 뻔했으니까요.”
“근거가 명확했으니 결과는 완벽했네요. 하지만…….”
서진은 말을 아끼며 침대 위의 하린을 바라보았다.
“정밀 검사는 중환자실로 올려서 진행하죠. 심장혈관내과랑 협진 의뢰서 넣어두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도윤은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완벽하게 정돈된 정상 파형의 끝자락, 화면 모퉁이에서 찰나의 순간 푸른빛을 띤 미세한 잔선이 깜빡이다가 사라졌다.
도윤의 미간이 좁아졌다.
‘저건 대체 뭐지?’
장비의 노이즈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이질적인 파형이었다. 첫 시간선에서 하린이 숨을 거두기 직전에도 보았던 바로 그 빛이었다.
“한도윤 쌤!”
수술실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복도 쪽에서 들려왔다.
“이태준 교수님께서 지금 당장 스크럽 안 들어오면 집도 취소하신답니다!”
도윤은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11시 3분.
죽음의 위기는 넘겼지만 그에게 주어진 밤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도윤은 땀에 젖은 수술 모자를 고쳐 쓰고 수술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