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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살수의 귀농 일기2화

천하제일 살수의 귀농 일기

천하제일 살수의 귀농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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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돌밭 아래 숨은 뿌리

어둠 속에서 비린 쇠 냄새가 짙게 피어올랐다.

진도겸은 회토 더미 앞에 쪼그려 앉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밤바람이 마른 억새를 흔들며 폐광 쪽 비탈을 타고 내려왔다. 조금 전 달아난 자의 거친 숨결은 이미 산그늘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그는 흩어진 낙엽 사이로 드러난 검은 물체를 내려다봤다.

손가락 반 마디쯤 되는 가느다란 금속 조각이었다. 젖은 흙이 엉겨 붙어 있었지만 칼날의 날카로운 결은 숨겨지지 않았다. 끝부분이 억지로 부러진 듯 거칠게 쪼개져 있었다.

도겸은 맨손을 뻗지 않았다.

밭둑 아래에 떨어진 마른 참나무 잎 두 장을 주워 조각을 조심스럽게 집어 올렸다. 손가락 끝으로 잎사귀를 살짝 비틀며 무게를 쟀다.

가벼웠다.

일반적인 농기구나 무쇠 괭이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이 아니었다. 살수의 암기나 소매 속에 숨기는 가느다란 비수에 쓰이는 정련된 흑철이었다.

그는 코끝을 조각 가까이 가져갔다. 흙냄새 사이로 묵직하고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단순한 녹 냄새가 아니었다. 광산 깊은 곳의 바위 틈에서나 스며 나오는 떫은 광물 독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청부의 흔적인가, 아니면 광산의 물건인가.’

도겸은 조각을 마른 잎사귀로 단단히 감쌌다.

도망친 자는 회토 더미를 뒤지다가 도겸의 기척을 느끼고 급히 물러났다. 무언가를 숨겨 두었거나 예전에 묻어 둔 물건을 찾으려던 몸짓이었다.

그는 일어서서 초가 안으로 들어갔다. 방 한구석 삐걱거리는 마루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먼지가 쌓인 바닥 흙을 한 뼘 파내고 감싼 잎사귀를 묻었다.

그 위를 마른 흙으로 덮고 마루판을 원래대로 맞췄다.

살수 무영 시절이었다면 당장 비탈을 타고 올라가 달아난 자의 목을 꺾었을 것이다. 배후를 캐내고 흔적을 남긴 자들을 모조리 지워야 밤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진도겸이었다.

칼을 쥐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섣부른 추격은 은신처만 드러낼 뿐이었다. 지키고자 하는 땅이 있다면 그 땅 위에 서서 때를 기다리는 법도 배워야 했다.

도겸은 다시 마당으로 나가 흐트러진 회토 더미를 원래 모양대로 정돈했다. 억새 매듭도 새로 묶어 울타리 사이에 걸었다.

동쪽 산등성이 너머로 희미한 푸른빛이 번져 오기 시작했다.


새벽안개가 걷히자 밭의 참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도겸은 세 번째 단의 가장 높은 곳에 섰다. 어제 치운 열세 개의 돌 덕분에 흙바닥 한쪽이 겨우 모습을 드러냈지만 여전히 밭 전체는 돌과 마른 잡초로 덮여 있었다.

특히 셋째 단 중앙에는 사람 상체만 한 넓적한 암반이 박혀 있었다.

흙 위로 드러난 것은 모서리뿐이었지만 발끝으로 밟아 본 무게감은 땅속 깊이 박혀 있음을 말해 주었다. 이 암반을 뽑아내지 못하면 물길은커녕 고랑 하나도 똑바로 낼 수 없었다.

도겸은 괭이자루를 쥐었다.

탁.

괭이 날이 바위 옆 틈새로 파고들었다. 흙이 굳어 쇠날이 쉽게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숨을 들이쉬며 손목 안쪽으로 내력을 천천히 흘려보냈다. 단전에 뭉쳐 있던 미세한 기운이 팔꿈치 안쪽의 흉터를 지나 손가락 끝으로 모여들었다.

무흔수의 미세한 진동이 괭이자루를 타고 바위 밑바닥으로 전해졌다.

우지직.

단단하게 굳어 있던 흙의 결이 아주 얇게 갈라졌다. 바위를 단번에 부수는 것이 아니라 흙이 바위를 붙잡고 있는 악력을 풀어내는 작업이었다.

도겸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팔꿈치의 오래된 자상이 욱신거리며 찌르는 듯한 통증을 보냈다. 내공을 많이 쓴 것도 아니었지만 살을 가르고 뼈를 부수던 힘을 흙을 달래는 데 쓰는 일은 몸에 훨씬 큰 부담을 주었다.

그는 무리하게 힘을 더 주지 않고 괭이를 지렛대 삼아 천천히 몸을 뒤로 젖혔다.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흙더미가 들썩였다.

도겸은 괭이를 놓고 양손으로 바위 모서리를 잡았다. 숨을 길게 토해내며 들어 올리자 묵직한 암반이 마침내 흙탕물을 튀기며 뒤집혔다.

바위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깊은 웅덩이가 생겼다.

도겸은 거친 숨을 고르며 웅덩이 안을 들여다봤다. 메마른 겉흙과 달리 바위가 누르고 있던 바닥은 서늘한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축축한 검은 흙 한가운데에 손가락 굵기의 질긴 뿌리가 엉켜 있었다.

뿌리는 메마른 흙 속에서 꺾이지 않고 바위 틈을 타고 깊숙이 뻗어 있었다. 흙먼지를 털어내자 껍질 아래로 은은한 푸른빛이 비쳤다.

도겸은 무릎을 꿇고 코를 가까이 댔다.

어제 흙을 비빌 때 맡았던 옅은 단내가 이번에는 쌉싸름한 풀 향과 함께 콧속을 찔렀다.

‘살아 있다.’

오랫동안 버려진 돌밭이었다. 가뭄이 들고 사람이 떠난 뒤에도 바위 밑 얕은 물길을 붙잡고 살아남은 야생 약초였다.

뿌리 끝에는 메마른 싹이 가느다랗게 매달려 있었다. 햇볕을 보지 못해 누렇게 떴지만 아직 생명의 끈을 놓지 않은 상태였다.

도겸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넣어 뿌리 주변의 흙을 털어냈다. 칼을 쥐고 사람의 경맥을 짚을 때보다 손끝이 더 조심스러워졌다.

바위가 들리면서 공기 중에 노출된 뿌리는 빠르게 마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입고 있던 삼베 겉옷의 소매를 찢었다. 처마 밑 항아리에서 떠온 맑은 물에 천을 적셔 뿌리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약초 뿌리를 살리려면 알맞은 흙과 물길이 필요했다.

정오가 지나자 도겸은 밭 뒤편의 완만한 비탈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서쪽 폐광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밭 사이의 지형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비탈 위쪽은 바위와 가시덤불이 빽빽했다.

도겸은 허리를 낮추고 바위 표면을 훑었다. 서쪽 능선에서 내려오는 바위틈에는 어제 보았던 검은 물자국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물은 차갑고 쇠 냄새가 섞여 있어 약초 뿌리에 닿으면 금세 썩어 버릴 것이 분명했다.

반면 동쪽 산비탈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바위 틈새에는 맑은 이슬이 맺혀 있었다.

물줄기는 가늘었지만 흙을 적시며 계단밭의 첫 번째 단 쪽으로 자연스럽게 떨어지고 있었다.

도겸은 밭으로 흘러드는 물길의 방향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서쪽의 나쁜 물길은 돌을 쌓아 비탈 밖으로 돌려보내고 동쪽의 맑은 물줄기만 골라 세 번째 단의 약초밭으로 끌어와야 했다.

그가 산허리 바위에 올라섰을 때 산 아래 계곡 너머로 희미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안개 사이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열두 채 남짓한 초가집들이 보였다. 집집마다 낮은 굴뚝에서 가느다란 점심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청운촌 본마을이었다.

폐광이 문을 닫고 가뭄이 닥쳤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저곳에서 밥을 짓고 밭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때 마을 뒤편 능선길을 따라 움직이는 작은 그림자가 도겸의 눈에 잡혔다.

등에 낡은 약초 망태기를 멘 여인이었다. 헝겊으로 머리를 단단히 동여맨 채 험한 산비탈을 능숙하게 걷고 있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가볍고 거침이 없었다. 도겸처럼 은밀하게 소리를 죽이는 살수의 보법이 아니었다. 수없이 산을 오르내리며 돌의 결을 익힌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하고 실용적인 걸음걸이였다.

여인은 바위벽을 타고 자라난 마른 덤불 속에서 무언가를 능숙하게 캐내 망태기에 넣었다.

도겸은 바위 뒤로 몸을 숨긴 채 그녀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여인은 서쪽 폐광 비탈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동쪽의 험한 능선만을 고집하며 산을 탔다. 어디에 좋은 풀이 자라고 어디에 나쁜 물이 고이는지 이미 훤히 알고 있는 태도였다.

‘저자가 마을의 약초꾼인가.’

도겸은 이름을 묻지도 얼굴을 자세히 보지도 않았지만 그녀의 거친 손놀림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일같이 흙과 바위를 마주하는 사람의 고단함이 묻어났다.

여인은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졌고 비탈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도겸은 바위에서 내려왔다. 고립된 채 숨어 살겠다고 들어온 산골이었지만 이 땅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의 삶이 얽혀 있었다.

자신이 파낸 약초 뿌리 하나도 결국 이 산골이 품어 낸 생명이었다.


해가 서쪽 봉우리 뒤로 넘어가며 밭에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도겸은 초가 뒤편으로 돌아와 낮 동안 준비한 흙을 골랐다. 돌을 골라내고 체로 친 고운 황토에 잘게 부순 회토를 반 바가지 섞었다.

회토의 거름기가 너무 과하면 연약한 뿌리가 타 버릴 수 있었다. 그는 흙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축축한 온도를 맞췄다.

셋째 단 양지바른 곳에 얕은 구덩이를 팠다.

젖은 천으로 감싸 두었던 약초 뿌리를 꺼냈다. 푸른빛이 돌던 뿌리는 다행히 마르지 않고 생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도겸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뿌리를 구덩이에 눕혔다. 잔뿌리 하나하나를 사방으로 넓게 펼친 뒤 준비해 둔 부드러운 흙을 조금씩 덮었다.

손끝으로 흙을 꼭꼭 눌렀다. 너무 세게 누르면 숨이 막히고 너무 헐겁게 덮으면 바람에 흔들린다.

생명을 다루는 일은 칼을 휘두르는 것보다 훨씬 정교한 감각을 요구했다.

그는 처마 밑에서 받아 둔 맑은 물을 한 바가지 떠 왔다. 손가락 틈으로 물을 흘려보내 흙이 천천히 수분을 머금도록 했다.

물이 흙 속으로 스며들자 약초 끝에 매달려 있던 가느다란 잎이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들었다.

도겸의 입가에 옅은 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약초 둘레에 주먹만 한 돌을 둥글게 쌓았다. 밤사이 불어닥칠 산바람을 막고 산짐승의 발길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작은 돌둑이었다.

손을 털고 일어서자 온몸의 뼈마디가 뻐근하게 쑤셔 왔다.

팔꿈치와 어깨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겼지만 기분 나쁜 통증은 아니었다. 피비린내 나는 밤을 보낸 뒤에 찾아오던 차가운 공허함과 달리 몸 안쪽에서 따뜻한 온기가 돌았다.

도겸은 마당 구석의 물통에 손을 담갔다.

손톱 밑에 검은 흙이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씻어내도 지워지지 않던 피의 기억 위로 서늘한 흙물이 덮였다.

그는 젖은 손을 옷자락에 닦으며 밭을 둘러봤다.

아직은 황량한 계단밭이었지만 이제 그곳에는 자신이 직접 심어 둔 생명이 숨 쉬고 있었다. 지켜야 할 이유가 생긴 셈이었다.

그때였다.

산 아래 비탈길에서 자갈을 밟는 느린 발소리가 들려왔다.

사각, 사각.

살수의 소리 없는 걸음이 아니었다. 거친 짚신이 흙바닥을 디디며 다가오는 분명하고 묵직한 인기척이었다.

도겸은 고개를 들어 어둑해진 밭 아래쪽 오솔길을 응시했다.

어스름 속에서 낯선 인영이 계단밭의 첫 번째 단을 향해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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