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11화: 숨죽인 발자국
붉은 독 안개가 셔터 아래로 밀려들자 쉘터 안의 눅눅한 공기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민혁은 내화학 고글을 눌러 썼다. 투명한 렌즈 바깥으로 붉은 포자가 비처럼 달라붙었지만 안쪽은 흐려지지 않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방독면 안쪽에서 고무 냄새가 났다.
박태우는 말없이 탐색대의 허리춤에 로프를 연결했다. 선두에는 정찰을 맡은 기석이 섰고 그 뒤로 태우와 유라가 붙었다. 짐을 지는 경호와 도윤이 가운데를 지켰다. 민혁은 맨 마지막 고리를 손목에 두 번 감았다.
태우가 모두의 얼굴을 한 번씩 훑었다.
"입으로 말하지 마. 로프를 두 번 당기면 멈춘다. 세 번이면 뒤로 빠져. 한 번 길게 당기면 앞이 막혔다는 뜻이다."
그는 민혁의 손에 들린 전술 라이트를 가리켰다.
"빛은 발등 앞만 비춰. 이쪽 놈들은 정지한 불빛보다 흔들리는 불빛을 먼저 쫓는다. 겁먹고 사방으로 흔들면 네 목부터 물어뜯긴다."
민혁은 라이트의 빛줄기를 좁게 조절했다. 흰 빛은 젖은 도로 위에 얇은 선만 남겼다. 안개 너머의 건물들은 외벽이 있는지조차 구분되지 않았다.
셔터가 등 뒤에서 완전히 닫히자 마지막 남은 빛도 사라졌다.
기석이 한 걸음 내디뎠다. 로프가 따라 움직였다. 민혁은 앞사람의 배낭만 겨우 보이는 거리를 유지했다.
폐점한 상가 간판이 안개 속에서 기울어 있었고 바닥에는 마른 검은 막이 비늘처럼 깔려 있었다. 발을 잘못 디디면 바스러지는 소리마저 크게 울릴 것 같았다.
도윤이 손을 들어 멈춤 신호를 보냈다.
모두가 굳었다. 먼 곳에서 뭔가가 콘크리트를 긁는 소리가 났다. 한 번. 두 번. 발톱이 바닥의 방향을 더듬는 소리였다.
소리는 이내 끊겼다.
기석이 고개를 조금 돌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선두의 로프가 활시위처럼 팽팽해졌다.
검은 형체가 안개를 찢고 기석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기석은 비명을 삼키며 옆으로 넘어졌다. 붉은 눈 두 개가 방독면 바로 앞에서 번뜩였다.
경호가 산탄총을 들어 올렸다. 태우의 손이 총열을 아래로 눌렀다. 총성 한 번이면 주변의 모든 것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릴 터였다.
울프의 앞발이 기석의 가슴을 짓눌렀다. 턱 아래로 늘어진 검은 침이 방독면 유리에 떨어졌다. 침이 닿은 자리에 얇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민혁은 망설이지 않았다. 라이트를 울프의 눈앞으로 밀어 넣었다.
집중된 빛이 붉은 눈동자를 찔렀다. 울프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앞발을 휘둘렀다. 민혁은 몸을 낮춰 발톱을 피하고 세라믹 대검의 넓은 면으로 턱을 밀어 냈다. 칼날을 깊이 넣지 않았다.
울프 옆구리의 털이 부풀었다. 검은 가죽 아래에 물집처럼 튀어나온 주머니 여러 개가 꿈틀거렸다.
태우의 단도가 그 주머니를 피해 목덜미 밑으로 파고들었다. 울프가 짧게 몸을 떨더니 기석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태우는 칼을 뽑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
"포자 주머니 건드리지 마. 터지면 안개가 아니라 우리 폐 안에서 피어난다."
유라는 기석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바지 자락 아래로 피가 번지고 있었다. 물린 상처는 아니었지만 넘어질 때 철근에 긁힌 모양이었다.
"걸을 수 있어?"
기석은 이를 악물었다.
"뛸 수는 없어."
그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죽은 울프의 몸 저편에서 발톱 소리가 번졌다. 하나가 아니었다. 얇은 벽을 타고 도는 소리와 주차된 차 위를 밟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태우가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였다. 최소 셋.
민혁은 고글 너머를 더듬듯 훑었다. 라이트를 강하게 켤 수 없어서 형체는 잡히지 않았다. 다만 오른쪽 안개가 잠깐 푸르게 번뜩이는 곳이 있었다. 깨진 유리 온실의 철골이었다.
"오른쪽에 온실이 있습니다. 반사판도 남아 있을 겁니다."
태우가 민혁을 보았다.
"왜 거기지?"
"움직이는 빛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저희가 안 움직여도 놈들은 그쪽을 따라갈 겁니다."
태우의 눈빛이 잠깐 날카로워졌다. 위험을 피하는 말이 아니라 위험을 옮기는 방법을 말하고 있었다.
"경호, 기석 받쳐. 유라는 같이 가. 도윤은 뒤를 봐. 민혁이 앞장선다."
민혁은 대답 대신 손을 들었다. 라이트를 바닥으로 향한 채 온실 쪽으로 움직였다.
유리 온실은 반쯤 주저앉아 있었다. 깨진 유리 조각이 바람에 서로 부딪혀 아주 작은 소리를 냈다. 민혁은 그 소리마저 울프를 부를까 봐 발끝으로 잔해를 밀어 길을 만들었다.
안쪽에는 은박이 벗겨진 반사판과 녹슨 자동문 레일이 남아 있었다. 민혁은 반사판 하나를 세워 철제 문틀에 기대고 라이트를 그 틈에 끼웠다.
도윤이 로프를 건넸다. 민혁은 끝을 문 손잡이에 묶은 뒤 반사판 뒤쪽 고리에 걸었다. 바람이 불면 매듭이 당겨지고 반사판이 조금씩 흔들릴 구조였다.
"바람이 안 불면?"
도윤의 입술만 움직였다.
민혁은 온실 천장의 찢어진 비닐을 가리켰다. 붉은 안개가 그 틈으로 흘러들 때마다 비닐이 미세하게 부풀었다.
"안개가 흐르는 방향이 바뀔 때마다 움직입니다. 빛이 꺼지기 전에 저쪽 골목까지는 끌고 갈 수 있어요."
태우는 더 묻지 않았다. 그는 죽은 울프의 발톱에 묻은 검은 점액을 바라보다가 손짓했다.
모두가 몸을 낮췄다.
민혁이 라이트의 출력을 한 단계 올렸다. 반사판은 좁은 빛을 골목 깊숙이 튕겨 보냈다. 처음에는 그저 희미한 얼룩처럼 흔들렸다.
이어 온실 비닐이 크게 들썩였다.
반사판이 끽 소리를 냈다. 빛이 좌우로 길게 흔들렸다.
안개 속 어딘가에서 낮은 으르렁거림이 터졌다.
한 마리가 먼저 달려들었다. 검은 몸이 빛줄기 사이를 가르자 두 마리의 형체가 뒤따랐다. 울프들은 반사판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흔들리는 빛을 향해 골목 안쪽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그제야 태우가 로프를 두 번 당겼다.
멈춤이 아니라 이동 신호였다. 모두가 지체 없이 반대편 배수로로 미끄러졌다.
배수로 입구는 무너진 인도 아래에 있었다. 콘크리트 틈으로 검은 물이 가늘게 흘렀다. 경호가 기석의 팔을 어깨에 걸쳤고 유라는 압박 붕대를 다시 조였다.
민혁은 배수로 안으로 먼저 들어가 라이트를 손바닥으로 가렸다. 빛이 새는 범위를 줄이자 코앞의 벽만 보였다.
"여기로 가면 연구소 서비스동 뒤편과 이어집니다."
태우의 목소리가 거의 숨소리로 스쳤다.
"지도에서 본 거냐?"
"바깥 배수 방향이 그쪽입니다. 건물 안으로 물을 빼려면 연결돼 있어야 합니다."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멈춰 서서 안개 속 발톱을 기다리는 것보다 나은 선택이었다.
배수로는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폭이었다. 젖은 벽에 어깨가 닿을 때마다 차가운 점액이 옷감으로 스며들었다. 민혁은 앞만 보고 기었다.
뒤에서 기석의 숨이 거칠어졌다. 경호가 그의 입가에 손을 대고 고개를 저었다. 아프다고 신음하는 순간 그 소리가 관 안을 타고 멀리 퍼질 수 있었다.
민혁은 가방 옆주머니를 열어 압박 붕대 하나를 꺼냈다. 유라에게 건넨 뒤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유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기석의 입가가 아니라 발목 쪽을 단단히 감았다.
통증이 줄었는지 기석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얼마나 기었는지 알 수 없었다. 방독면 필터를 지나가는 공기가 처음보다 무거워졌다. 민혁은 옆의 작은 표시창을 보았다. 필터 잔량을 알 수 있는 장비는 아니었다. 그래도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이 미세하게 따가워지는 감각은 분명했다.
새 필터도 이 안개를 오래 버티지는 못한다.
그 사실이 민혁의 등을 밀었다.
마침내 배수로 끝에서 금속 벽이 손에 닿았다. 위쪽 환기 틈으로 푸른 비상등이 가늘게 새어 나왔다. 연구소 서비스동의 보안문이었다.
태우가 앞으로 다가와 문틀을 살폈다. 바깥쪽 잠금 장치는 녹이 슬어 있었지만 카드키를 대는 검은 패널만 유난히 깨끗했다.
민혁은 손전등을 더 낮게 비췄다. 패널 아래 바닥에 젖지 않은 먼지 자국이 있었다. 사람 발자국은 아니었다. 고무 밑창이 남긴 반달 모양의 눌림이었다.
"최근에 누가 썼습니다."
태우가 문 아래쪽을 손끝으로 쓸었다. 검은 먼지 위에 얇은 금속 가루가 묻어 나왔다.
"밖에서 용접한 흔적이야. 안에 있는 놈이 문을 잠근 게 아니라 밖에서 누군가 가둔 거다."
도윤이 뒤쪽을 바라보며 손을 들었다. 배수로 입구 쪽 안개가 흔들렸다. 온실 골목에서 멀어졌던 울프들이 냄새를 따라 돌아오는 중이었다.
태우는 산탄총을 쥐었다가 천천히 내려놓았다.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민혁. 네가 문을 봐. 들어갈 구멍이 있으면 네 판단대로 뚫는다."
처음 만났을 때라면 태우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민혁은 문 아래의 환기 틈에 고글 렌즈를 가까이 댔다.
안쪽 바닥에는 쓰러진 안내 표지판과 먼지 쌓인 운반 카트가 보였다. 그 사이로 지하를 가리키는 파란 화살표가 하나 남아 있었다.
‘기밀 보관 구역 B2.’
그 글자를 읽는 순간 스피커에서 잡음이 흘렀다.
지직.
무감정한 기계음이 서비스동 안을 울렸다.
"지하 보관 구역 출입 권한을 확인합니다."
문 너머에는 아직 전기가 살아 있었다.
문 바깥에서는 발톱이 배수로 벽을 긁었다.
민혁은 허리춤의 대검을 다시 잡았다. 연구소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리더라도 그곳이 피난처일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