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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표국의 절대 배송1화

천하제일 표국의 절대 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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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기한을 적는 사람

깨어난 국주

빗소리가 멎은 뒤에도 귓속에서는 계속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윤도현은 눈을 떴다.

천장은 낯선 한지와 굵은 들보로 가득했다. 몸을 일으키자 등과 갈비뼈가 함께 욱신거렸다. 젖은 아스팔트와 뒤집힌 화물차 그리고 멀어지는 경적 소리가 번개처럼 스쳤다.

‘배송 완료까지 삼백 미터.’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은 그것이었다.

그 뒤에 죽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 그의 손에는 굳은살이 박혀 있었고 손목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자신이 모르는 기억이 끼어들었다.

진하륜.

스물다섯. 청운표국 국주. 병상에 누운 진무백의 외아들.

문밖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국주가 아직도 누워 있나? 만금상에서 온 사람이 기다린다.”

“사람이 죽다 살아났는데 빚부터 찾는 건 너무하지 않소?”

여자의 목소리였다. 낮고 단단했다. 기억 속 이름이 떠올랐다. 서윤아. 청운표국 총표두이자 하륜과 함께 자란 사람.

하륜은 비틀거리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문 옆 탁자에는 붉은 도장이 찍힌 서류와 낡은 장부가 놓여 있었다. 첫 장에는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채무 삼천 냥.

그 아래에는 이자가 붙은 날짜와 만금상이라는 글자가 빽빽했다.

‘만기 전이라도 담보 수입의 우선 변제 요구 가능.’

세 달 뒤가 만기였다. 그런데 채권자는 오늘부터 표국 수입을 내놓으라고 했다. 사업장에서 현금을 먼저 빼내 말려 죽이는 방식이었다.

마당에는 다리를 다친 사내와 팔에 붕대를 감은 사내가 앉아 있었다. 멀쩡한 표사는 넷뿐이었다. 낡은 마방의 말 두 필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앞에 비단 조끼를 입은 사내가 금빛 패를 들고 서 있었다.

“진 국주. 정신은 좀 드셨습니까?”

“당신은?”

“만금상 채무 집행을 맡은 도문석입니다. 오늘 안에 이자 열 냥을 치르십시오. 그러지 못하면 마차와 말부터 가져가겠습니다.”

“만기는 세 달 뒤라고 적혀 있던데요.”

“국주께서 쓰러지신 뒤 표국의 신용이 흔들렸습니다. 만금상은 손해를 줄일 권리가 있습니다.”

“그 권리의 근거도 서류에 있습니까?”

도문석의 미소가 굳었다.

그때 마당 입구의 여인이 한 걸음 나섰다. 젖은 치맛자락을 걷어 올린 채 작은 나무함을 품에 안고 있었다. 함은 붉은 비단으로 감겨 있었고 놋쇠 잠금쇠에는 밀랍 봉인이 두 겹으로 붙어 있었다.

“청운표국 국주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의뢰 내용부터 듣겠습니다.”

윤아가 옆에서 눈을 치켜떴다.

“하륜아.”

하륜은 대답하지 않고 여인을 바라보았다. 지금 필요한 건 사정이 아니었다.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까지 책임지는지였다.

봉인된 혼례함

“저는 송가장 안채의 연씨입니다. 오늘 해가 지기 전 이 함을 송 노부인께 전해 주십시오.”

“송가장까지 거리는?”

“큰길로 삼십 리입니다. 하지만 큰길 다리가 떠내려갔습니다. 산길로 돌아가면 쉰 리가 넘습니다.”

윤아가 곧장 끼어들었다.

“그 길은 지금 못 가. 비가 그친 지 반나절도 안 됐어. 골짜기 흙이 어디까지 밀렸는지도 몰라.”

“그래도 가야 합니다.”

연씨의 손이 함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혼례가 오늘 밤입니다. 이 함이 없으면 예를 치를 수 없습니다. 늦으면 파혼입니다.”

하륜은 함의 외관과 봉인만 확인했다. 붉은 비단에는 목록이 없었고 작은 인수표에 봉인 번호 17번만 적혀 있었다. 밀랍이 젖어 흐른 흔적도 잠금쇠가 흔들린 흔적도 없었다.

“봉인을 열어 확인할 수 있습니까?”

연씨가 흠칫했다.

“안 됩니다. 주인어른께서 절대 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열지 않겠습니다. 표물의 소유자는 의뢰인이고 저희는 운송만 맡습니다.”

하륜은 함을 보며 질문을 이어 갔다.

“인수자는 송 노부인 한 사람입니까?”

“예. 노부인의 인장을 보여 주셔야 합니다.”

“장소는 송가장 안채 동쪽 사랑채. 해가 산등성이에 닿기 전. 맞습니까?”

연씨는 잠깐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륜은 시간을 계산했다. 출발까지 한 시진도 남지 않았다. 폭우 뒤 산길 쉰 리를 마차로 달리면 말이 먼저 지친다.

“운임은 얼마를 생각하셨습니까?”

“스무 냥을 드리겠습니다. 선금으로 열 냥을 먼저 내겠습니다.”

도문석이 코웃음을 쳤다.

“삼류 표국이 제법 큰돈을 부르겠군. 함 하나를 옮기는 데 스무 냥이라니.”

“비싸면 만금상에서 맡으시죠.”

하륜이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윤아가 하륜의 팔을 붙잡았다.

“네 명으로는 안 돼. 노칠과 마중원은 부상이고 말도 두 필뿐이야. 지금 받으면 표국 이름만 더럽혀.”

“그래서 조건을 적겠습니다.”

“조건을 적는다고 산이 평지가 되진 않아.”

“산이 평지가 될 필요는 없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아야 해.”

전생의 현장에서도 화물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출발 시각과 도착 기준 그리고 사고 책임을 먼저 정해야 했다.

하륜은 마당 한쪽의 빈 표단을 집어 들었다.

기한을 적는 사람

“붓과 먹을 가져오십시오.”

윤아는 그를 노려보다 표사 한 명에게 턱짓했다.

“가져와.”

도문석이 앞을 막았다.

“국주께서는 채무부터 해결하셔야 합니다. 만금상은 표국의 모든 수입에 우선권이 있습니다.”

“채무 서류에 적힌 범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륜은 빈 표단 위에 선을 그었다.

“표물은 연씨의 소유입니다. 운임 18냥. 선금 9냥. 잔금은 송 노부인의 인수 확인 뒤 지급. 표물은 봉인 번호 17번으로 접수하고 청운표국은 함을 열지 않습니다.”

연씨가 은전 꾸러미를 꺼냈다. 손가락이 떨렸다.

“열 냥을 준비했습니다.”

“한 냥은 돌아갈 여비로 남겨 두십시오.”

“실패하면 어떻게 합니까?”

“표국의 과실로 기한을 넘기면 선금 전액을 돌려드리고 운임을 받지 않겠습니다. 폭우로 길이 무너져 관에서 통행을 금하거나 송가장 측 인수가 거절되면 면책합니다. 저희가 확인도 하지 않고 물건을 세워 두거나 고의로 봉인을 훼손하면 배상 한도와 상관없이 책임지겠습니다.”

도문석이 비웃었다.

“배상할 돈은 어디서 나옵니까?”

“표국이 움직여야 갚을 돈도 생깁니다. 마차와 말을 가져가면 오늘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합니다.”

하륜은 붓을 내려놓고 그를 보았다.

“그리고 채무와 표물은 별개입니다. 연씨의 함에 손을 대시면 만금상 이름으로 절도 사실을 기록해 관아에 제출하겠습니다.”

하륜은 도문석이 아니라 종이에 적힌 줄을 보고 있었다. 계약은 목소리보다 오래 남았다.

연씨가 먼저 서명했다. 그리고 선금 아홉 냥을 내려놓았다.

“정말 맡아 주시는 겁니까?”

“기한을 지키기 위한 조건을 받아 주신다면요.”

“받겠습니다.”

윤아가 표단을 들여다보았다.

“출발 인원은?”

“나와 윤아. 철강과 유발.”

“둘 다 말보다 칼을 잘 쓰는 사람들이야.”

“마차는 큰길 입구까지만 쓰고 산길부터는 화물을 등에 멥니다. 앞뒤를 나눠 세우죠. 송가장에는 먼저 사람을 보내 인수자를 밖으로 나오게 합니다.”

윤아는 표단의 조항을 다시 읽었다.

“네가 이런 걸 언제부터 썼지?”

“방금 생각했습니다.”

“거짓말은 서툴러졌네.”

“거짓말할 이유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윤아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표단을 찢지는 않았다.

하륜은 노칠과 마중원을 돌아보았다.

“노칠은 말 상태와 마차 바퀴를 확인해 주세요. 마중원은 봉인 기록을 두 장 베껴 두고 출발 시각을 적어 주세요.”

노칠이 고개를 들었다.

“국주가 사람을 세는 법을 조금 배웠군.”

“사람을 세는 게 아니라 맡길 일을 세는 겁니다.”

말이 입 밖으로 나온 뒤 하륜은 가슴 한쪽이 불편해졌다. 사람을 숫자로만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입에서는 여전히 계산이 먼저 나왔다.

연씨가 함을 내밀었다. 하륜은 바로 받지 않고 윤아를 불렀다.

“봉인 번호를 같이 확인해 주세요.”

“17번. 봉인 두 겹. 균열 없음.”

두 사람이 같은 내용을 표단에 적었다. 그제야 하륜은 함을 받아 창고 안쪽의 빈 칸에 올려놓았다.

찢긴 노선 장부

도문석은 표단 사본을 받아 들었다.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라. 늦으면 이 계약을 근거로 표국을 압류하겠습니다.”

“늦으면 계약에 적힌 배상을 하겠습니다.”

“배상할 돈이 없으면?”

“그때 담보 이야기를 하시죠. 지금은 의뢰인의 물건 앞에서 채무와 배송을 섞지 마십시오.”

“젊은 국주가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겁니다.”

도문석이 나간 뒤 윤아는 한동안 문 쪽을 보고 있었다.

“괜한 자극이야.”

“맞습니다. 하지만 겁먹은 티를 내면 내일 또 와서 마차 바퀴 하나씩 떼어 갈 겁니다.”

윤아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너 정말 하륜 맞아?”

질문이 날아온 순간 하륜의 목 뒤가 서늘해졌다.

“죽다 살아나면 말투가 달라질 수도 있죠.”

“아버지가 병상에서 네가 깨어난 뒤 이상하다고 했어. 지금도 그래.”

하륜은 대답 대신 창고의 장부 더미를 가리켰다.

“송가장 노선 기록은 어디 있습니까?”

윤아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왜?”

“폭우 뒤 산길의 상태를 확인해야 합니다.”

윤아는 낡은 장부 하나를 꺼내 펼쳤다. 여러 장이 뜯겨 나간 장부였다. 송가장이라는 글자는 중간에서 끊겨 있었고 그 아래에는 오래된 붉은 먹 자국만 남아 있었다.

하륜이 남은 문장을 읽었다.

‘송가장. 해 지기 전. 내부 누설 확인 전에는—’

뒤가 찢겨 있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몰라. 아버지가 직접 적은 건지 누가 훼손한 건지도 확인하지 못했어.”

윤아가 장부를 닫으려 하자 하륜이 가장자리를 눌렀다.

“지금 확인해야 합니다. 길이 위험한데 기록까지 찢겨 있으면 누군가 이 노선을 숨기고 싶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함을 열어 보자는 말은 하지 마.”

“열지 않습니다. 표물은 의뢰인의 소유이니까요.”

하륜은 창고 안쪽의 붉은 비단 함을 바라보았다. 봉인은 멀쩡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그는 몰랐다. 알 필요도 없었다.

지금 필요한 건 함을 열어 진실을 찾는 일이 아니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주인이 지정한 사람에게 그대로 넘기는 일이었다.

“윤아.”

“왜.”

“마차를 지금 움직이죠. 큰길 입구까지 가는 동안 산길 우회로를 확인합시다.”

“해 지기 전까지 쉰 리야.”

“그러니까 멈추지 않는 순서를 만들어야 합니다.”

윤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마당을 향해 소리쳤다.

“철강은 마차 바퀴를 갈아 끼워! 유발은 밧줄과 방수포를 챙겨! 노칠은 말 먹이부터 확인해! 마중원은 봉인 기록을 품에 넣어!”

사람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낡은 마당이 살아났다. 빚 삼천 냥도 끊긴 길도 그대로였지만 종이 한 장에 적힌 기한과 이름이 사람들의 발을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하륜은 창고 문을 잠그기 전에 붉은 비단 함을 한 번 더 확인했다.

17번.

그리고 아버지의 장부에 남은 찢긴 문장.

‘내부 누설 확인 전에는—’

하륜은 등불을 들고 마차 쪽으로 걸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야 했다.

그때까지 밝혀야 할 것은 길의 상태만이 아니었다.

누가 이 배송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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